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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수(好敵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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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수(好敵手)
2011-01-26 조회 9291    프린트스크랩
 

지난 주 중반 저녁 무렵 가까이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는 사람(편의상 L로 지칭)하고 술내기 바둑을 두기로 했는데 관전도 할 겸 바둑 끝내고 술도 한 잔 할 겸 나오라는 것이다. 근래에는 같이 둔 적이 없지만 십수년 전에는 L과 꽤 많이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L이 바둑이 늘었다며 도전해 왔다는 것이다.

L과 친구는 바둑 두기에 앞서 칫수부터 따지기 시작했다. "2점만 놓을게." "2점 가지고 되겠어?" "되지." "뭐! 예전에도 그 이상 놓고도 졌구만." "아! 바둑이 늘었다니까." 결국 L이 우겨대는 대로 2점 칫수로 시작했으니 L이 두 판을 내리 졌다.

필자가 옆에서 보니 완전히 동네 바둑이었다. 바둑 TV를 즐겨본다는데 얼핏 감각이나 모양은 그럭저럭 TV 본 것을 흉내는 내고 있었다. 하지만 대개 이런 바둑은 물이다. 일명 복덕방 바둑 내지는 목욕탕 또는 이발소 바둑 수준인 것이다. 둘의 바둑이 끝났을 때 필자가 슬몃 떠보았다. "저하고 한 판 해보시렵니까?" "얼마나 놓아야 할까요?" "글쎄요? 한 다섯 점이나 여섯 점 정도로 해보시죠." 

동네 바둑의 특징 중 하나는 가급적 한 점이라도 덜 깔려고 한다. 기원에서 내기 꽤나 두는 속칭 세미 프로들은 한 점을 더 깔고서라도 이기려 드는데 화초(花草) 바둑들은 거꾸로다. 5점을 접고 두 판을 내리 보냈다. 내심 제대로 당해보라는 심사가 작용한 것이다. 황망했던 모양이다.

술자리로 옮겨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L에게는 바둑 친구가 둘이 있다고 한다. 서로서로 엇비슷한데 하루가 멀다하고 셋이 사무실에 모여서 바둑을 둔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재미있단다. 이기면 기분이 좋고, 지면 약이 올라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지면 그 다음날 전화로 약을 살살 올린단다. 머리 돌아가는 게 그것 밖에 안되냐. 공부 좀 더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도전해 봐야 안되는 바둑이 뭘 또 덤빈다는 거냐. 등등등.

후끈 열이 받아 호승심이 더 생긴단다. 자신이 이기면 역시 같은 식으로 놀려준단다. 바둑도 재미있지만 그 놀리는 재미가 더 쏠쏠할 때도 있단다.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다 걸려들면 그 통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단다. 서로가 그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것이다.

정말 바둑을 좋아하는 애기가였다. 또 함께 할 맞수가 있으니 그 즐거움이 더욱 큰 것이다.

필자는 L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열기 가득한 그 대국 현장이 눈에 그려지는 듯하다. 옛 사람들은 어땠을까? 필자가 보기엔 지금과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다음 시를 감상해 보자.   


諸般技倆盡天機    제반기량진천기
妙處看來各自知    간래각자지
戰罷一枰誰勝負    전파일평수승부
音含六律定成虧    음함육률정성휴  (조욱 趙昱, 1498~1557)

하늘의 기틀(天機)를 알아낼 만큼 모든 기량을 다한단다.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한 판 이기려면 젖 먹는 힘까지 써야되지 않겠는가.

묘처(妙處)라고 했으니 아마도 급소 또는 노림수를 의미할 것이리라. 각자 노림수는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상대 몰래 함정을 파고 있다는 뜻일까?

육률(六律)은 음악 용어다. 즉, 1옥타브의 음역을 12개의 음정으로 구분하여 각 음 사이를 반음 정도의 음정차로 율을 정했다고 한다. 이 12음계는 저음으로부터 황종(黃鐘:C) ·대려(大呂:C#) ·태주(太簇:D) ·협종(夾鐘:D#) ·고선(姑洗:E) ·중려(仲呂:F) ·유빈(蕤賓:F#) ·임종(林鐘:G) ·이칙(夷則:G#) ·남려(南呂:A) ·무역(無射:A#) ·응종(應鐘:B)의 순으로 되어 있다.


각 율은 황종을 기본음으로 하여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으로써 음정을 구한다. 십이율은 음양(陰陽)의 원리에 따라 양을 상징하는 황종 ·태주 ·고선 ·유빈 ·이칙 ·무역 등 홀수의 여섯을 육률(六律)이라 하고, 이를 양성(陽聲) ·양률(陽律) ·육시(六始) ·육간(六間)이라고도 한다. 또 음을 상징하는 대려 ·협종 ·중려 ·임종 ·남려 ·응종 등 짝수의 여섯을 육려(六呂)라 하고, 음성(陰聲) ·음려(陰呂) ·육동이라고도 한다.

성(成)은 '일어나다, 흥기하다'의 뜻이 있다. 휴(虧)는 '이지러지다, 기울다'의 뜻이다. 따라서 육률을 머금은 소리가 커지고 작아지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즉 이긴 자는 그 목소리가 우렁차고 진 사람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낸다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익살맞은 시를 다음과 같이 새겨본다.

 

하늘의 기틀을 알아낼 만큼 모든 기량을 다하여

급소를 찾아내고 몰래 각자 서로 노리는구나  

바둑판의 한 싸움 끝났을 때 누가 이기고 졌는가?

이긴 자는 큰 소리 떵떵, 진 사람은 사그러지는 소리 


맞수가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바둑의 효용 중 하나는 좋은 벗을 얻는데(得好友) 있다고 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또 하나의 효용은, 바둑을 통해 상대 말을 공격하고 포획하는 등의 행위를 통해, 인간 심리에 내재된 파괴본능 내지 공격본능을 정화(淨化)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욕망이 정화되면 마음은 저절로 관대함과 포용성의 증대로 승화되어가지 않을까?

그렇다면 바둑이 끝이나서 술 한 잔 기울이며 뒷 담화를 나눌 때 맞수끼리의 우의는 더욱 돈독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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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靑 |  2011-01-27 오전 11:18:51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앞뒤가 딱딱 맞는 글은 읽기도 듣기도 좋습니다. (兩鍛叩聽音) 천기는 내 손안에 있다던 사람들의 호연지가가 절로 느껴지는군요. 정신이 맑아집니다  
술익는향기 |  2011-01-27 오후 12:20:11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ㅋㅋㅋ 여현님처럼 수염이 덥수룩한 동네 기원 원장님이 저만 보면 "화초바둑 왔구먼" 하고 반겨 주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2점은 더 깔아야 되는데.... 물론 매번 담배값 상납했구요...

 
전등산박새 |  2011-01-29 오전 7:49:41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좋은 글 감사~  
jini43 |  2011-02-09 오전 1:56:26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내 예기를 보는 것 같애...ㅋㅋㅋ  
haemosu |  2011-02-09 오전 2:24:0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듣고 보니 내 예길쎄..그려...ㅋㅋ  
석맥05 |  2016-10-06 오전 1:48:42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여선생님의 글을 저 혼자 보기 너무 아까워 우리 바둑 친구들에게 전하려 모두 퍼 갑니다.이청 선생님의 글 또한 소개 하려 합니다.아무쪼록 강건 하셔서 계속 이어지길 소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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