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鄭道傳)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시다. 삼봉은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까지의 문신이자 학자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고 그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본관 봉화(奉化). 자 종지(宗之). 호 삼봉(三峰). 1342년 고려 충혜왕 3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밀직제학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성하여 목은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당시 동문으로 정몽주, 윤소종, 박의중, 이숭인 등이 있었다.

유학(儒學)의 대가로 개국 후 군사·외교·행정·역사·성리학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였고, 척불숭유(斥佛崇儒)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 《삼봉집(三峰集)》, 《경제문감(經濟文鑑)》, 《심기리편(心氣理篇)》, 《불씨잡변(佛氏雜辨)》, 《심문천답(心問天答)》, 《진법서(陳法書)》, 《금남잡제(錦南雜題)》 등이 있다. 그 밖의 작품에 《납씨가(納氏歌)》, 《정동방곡(靖東方曲)》, 《문덕곡》, 《신도가(新都歌)》 등이 있다.

병풍의 미인도를 보고 노래하다

이 시는 삼봉집 제2권(三峯集卷之二)에 ‘萊州城南驛館屛 有婦人琴棋書畫四圖 戲題其上(내주성 남쪽 역관에서 부인이 거문고 타고, 바둑 두고, 글 읽고, 그림 그리는 네 가지 그림이 붙은 병풍이 있으므로 그 위에 희제하다)’라는 제목으로 읊은 것이다.

琴(거문고)

芳園春到日初長 (방원춘도일초장) 동산에 봄이 오니 해도 길어라

懶整雲鬟倚綉牀 (라정운환의수상) 머릿결 흐트린 채 평상에 기댔네

彈罷一聲無限恨 (탄파일성무한의) 거문고 한자락 타고 나도 한은 끝이 없는데

不知誰賦鳳求凰 (부지수부봉구황) 봉구황(鳳求凰)(주1)을 누가 지엇는지 조차 모르겠구나

懶(라) : 게으르다, 나른하다, 혐오하다 (뢰), 미워하다 (뢰), 鬟(환) 쪽,

棋(바둑)

檻外花枝轉午陰 (함외화지전오음) 난간 밖 꽃가지 낮 그림자 넘어갈 때

閒敲玉子逞芳心 (한고옥자령방심) 한가로이 돌 놓으며 미쁜 마음 다잡네

輸來莫賭黃金百 (수래막도황금백) 졌다고 황금 백 냥을 내놓지 마소

一笑還應直百金 (일소환응직백금) 한 번 웃어 주는 것으로 그 값을 치리니

檻(함) : 난간, 덫, 함정, 逞(영) : 쾌(快)하다, 즐겁다

書(책)

美人如玉罷粧梳 (미인여옥파장소) 머리 빗고 가꾸기 끝낸 옥 같은 미인은

盡日凝眸讀底書 (진일응모독저서) 눈을 내리 깔고 종일토록 책을 읽는데

下女相看亦不語 (하녀상간역불어) 하녀들도 서로 보며 말 한 마디 없으니

無由得近遺瓊琚 (무유득근유경거) 까닭 없이 가까이 가보았자 떡고물도 없겠네

梳(소) : 얼레빗, 眸(모) : 눈동자, 瓊琚(경거) : 훌륭한 선물

畵(그림)

可憐雲雨夢中人 (가련운우몽중인) 가련하다 운우(雲雨)(주2)의 꿈을 꾸는 사람이여

又向瓊臺寄此身 (우향경대기차신) 또한 경대로 가 이 몸을 기대고

思入丹靑終不應 (사입단청종불응) 아리따운 상상에 빠져본들 끝내 응하지 않으니

謾勞心力喚眞眞 (만노심력환진진) 애써 진진(眞眞)(주3)을 부르건만 부질이 없네

瓊臺(경대) : 경궁-요대(瓊宮瑤臺) 즉 호화로운 궁전, 謾(만) : 속이다

희제(戲題)라는 말에 걸맞게 그림을 보면서 얄궂은 상상을 하고, 장난 끼가 발동하여 지은 시다.

주1 : 봉구황(鳳求凰)

봉(鳳)은 수컷, 황(凰)은 암컷을 나타낸다. 따라서 봉황(鳳凰)은 화목한 부부의 상징으로 많이 쓰인다.

봉구황(鳳求凰)은 금곡(琴曲)의 이름으로, 한(漢)나라 때 사마상여(司馬相如)와 탁문군(卓文君)과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담겨있는 고사다. 시 잘 짓고, 거문고 잘 타며, 썩 잘생긴 사마상여는 촉(蜀)의 부호(富豪) 탁왕손(卓王孫)이 베푼 연회(宴會)에 초대받게 되었다. 그 때 탁왕손의 딸 문군(文君)은 시집가는 그날 서방이 죽는 바람에 17살에 청상과부(寡婦)가 된 팔자였는데, 그녀는 얼굴이 몹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음률(音律)을 매우 좋아하였다.

이 사실은 알게 된 사마상여는 거문고로 봉구황곡(鳳求凰曲)을 연주하였다. 과연 문군이 그 곡을 듣고 그날 밤 상여에게로 오니 둘이 갖가지 우여곡절 끝에 부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줄거리다. 우리에게 <춘향전>만큼이나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라 하며, 얼마 전 중국CCTV에서 드라마로 제작하였는데, 한류 열풍을 타고 우리나라의 <박시연>양이 탁문군 역을 맡아 열연했었다.

주2 : 운우지정(雲雨之情)

무산지몽(巫山之夢)이라고도 한다. 《문선(文選)》에 수록된 송옥(宋玉)의 고당부(高唐賦)에서 비롯된 말이다. 전국시대 초(楚)의 양왕(襄王)이 송옥과 함께 운몽(雲夢)이라는 곳에서 놀다가 고당관에 이르게 되었다. 문득 하늘을 보니 이상한 형상의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어 송옥에게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송옥은 그 구름이 조운(朝雲)이며,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옛날 어떤 왕이 고당관에서 연회를 열고 즐기다가 잠시 낮잠을 자게 되었는데, 꿈속에 아름다운 여인이 찾아와 말하기를 "저는 무산에 사는 여인이온데, 왕께서 고당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잠자리를 받들고자 왔습니다." 하였다. 왕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빠져 스스럼없이 운우의 정(雲雨之情)을 나누었다. 헤어질 무렵이 되자 그 여인은 이런 말을 하였다. "저는 무산 남쪽의 험준한 곳에 살고 있는 여인이온데,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양대 아래에서 아침저녁으로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입니다(妾在巫山之陽 高山之岨 且爲朝雲 暮爲行雨 朝朝暮暮 陽臺之下)." 말이 끝나자 여인은 자취를 감추었고, 왕은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다음날 아침 왕이 무산 쪽을 바라보니 여인의 말대로 산봉우리에 아름다운 구름이 걸려 있었다. 왕은 여인을 그리워하며 그곳에 조운묘(朝雲廟)라는 사당을 세웠다. 그 후로 무산의 꿈은 남녀 간의 정교를 의미하게 되었다.

여기서 양대란 해가 잘 비치는 대라는 뜻인 동시에 은밀히 나누는 사랑을 말한다. 그래서 양대불귀지운(陽臺不歸之雲)이라 하면 한 번 인연을 맺고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무산지운(巫山之雲), 무산지우(巫山之雨), 운우지락(雲雨之樂)등과 같은 말이며, 운우지교(雲雨之交)도 이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주3 : 진진(眞眞)

당(唐)나라 조안(趙顔)이라는 사람이 어느 화공에게서 미인도 한 폭을 얻으면서 말하기를 “세상이 이런 미인은 없다. 만일 있다면 내가 아내로 삼겠다.”하였다. 화공이 말하기를 “나의 그림은 신화(神畵)인데 이 미인의 이름은 진진(眞眞)이다. 그 이름을 백날(百日)동안 밤낮으로 부르면 반드시 대답이 있을 것이니, 술에다 백가(百家)의 채회(綵灰)를 타서 부으면 틀림없이 살아날 것이다.”하였다.

조안이 그 말대로 하였더니 과연 그 미인이 살아나서 함께 사랑하게 되니, 일 년 만에 아이를 낳았는데, 그 뒤에 조안의 친구가 이 사실을 알고 “이것은 요물이다. 나에게 신검(神劍)이 있으니 그 요물을 죽이라.” 하고 칼을 내어주었다.

조안에 방에 들어가니 미인이 울면서 말히기를 “나는 남악(南岳)의 신선인데, 지금 그대가 나를 의심하니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다.”하고는 아이를 안고 그 그림 속으로 다시 들어가서 술을 토해내니, 본래 그림에 어린 아이 하나가 더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금기서화(琴棋書畵)

거문고, 바둑, 독서와 서예, 그림 등 이상 네 가지는 고려 시대에 지식인 및 교양인들이 갖추어야할 4대 덕목이었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소위 <바둑 왕국>이라고 할 정도로 바둑이 오락의 으뜸이었다. 왕부터 사대부, 시골 관청의 아전, 기생까지 바둑은 신분과 귀천을 떠난 조선의 오락이었다는 것이다(이청의 한국바둑사).

금기서화에 더해 시주화(詩酒花)까지 더해져 일곱 가지를 즐길 줄 알아야 사대부였던 모양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모여 자연을 감상하면서 차를 마시고, 시를 짓고, 바둑을 두며, 거문고를 타고, 그림을 감상하는 모임을 자주 열었다 한다. 이러한 모임의 정경을 시와 그림으로 많이 남겼는데, 그 그림을 <아회도(雅會圖)>라 한다.

아회도에는 다양한 취미와 풍류를 즐기는 우아한 선비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이 정겨운 풍경에서 옛 선비들이 간직한 일상의 여유와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제 한가위다. 그동안 떨어져 있었던 가족을 만나고 이웃 친지들을 볼 것이다. 그리웠던 회포도 풀고, 밀렸던 이야기와 함께 정감도 나누고, 술도 한잔 기울일 것이다. 그리곤 아마도 다함께 어울려 국민 오락인 <고스톱>을 칠 것이다.

국민오락이 <고스톱>에서 <바둑>으로 바뀌는 그 날을 꿈꾸어본다.

딴지 : 내주(萊州)

시를 지은 곳이 내주(萊州)라고 되어 있다. 보통 내주라고 하면 등주(登州)ㆍ내주(萊州)ㆍ빈주(濱州)ㆍ체주(棣州) 등 산동반도(山東半島) 일대를 지칭한다. 이 시를 짓게 된 내주가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갔었을 때 들렀던 곳이었는지 혹은 당시 고려와 조선의 영토가 산동반도에까지 미쳤는지 모를 일이다.

요즈음 재야사학계에서 대륙조선설(大陸朝鮮設)을 꾸준하게 제기하는 모양이다. 나 역시 그 설에 꽤 동조하고 있는 편인데, 이러면 미친 놈 소리를 듣는 것이 지금의 형국이다.

조선왕조실록 肅宗(숙종) 38卷, 29年(1703 癸未 / 청 강희(康熙) 42年) 12月 7日(戊寅) 에 이런 기사가 있다.

戊寅/召對玉堂官, 講《東國通鑑》, 至高麗安市城事, 上歎曰: “高麗, 一小國耳, 以善守城名, 能抗隋、唐百萬之師。 我國地方, 比高麗倍之, 山川險阻, 古今一也, 而丙子之亂, 虜兵如入無人之地, 竟有下城之辱。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여 《동국통감(東國通鑑)》을 강하였는데, 고구려(高句麗) 안시성(安市城)의 일에 이르렀을 때 임금이 한탄하기를,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도 성(城)을 잘 지키는 것으로 이름이 나서, 수(隋)·당(唐)의 백만 군대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방이 고구려에 비하여 배(倍)나 크고 산천이 험준한 것은 고금(古今)이 같은데도, 병자년12215) 의 난리에 오랑캐 병졸이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같이 밀려 들어와, 마침내 하성(下城)하는 치욕을 당하였다.”)

병자호란을 운운하니 인조뿐만 아니라 숙종 당시 조선의 강역이 고구려의 두 배나 된다는 말이다. 지금의 역사 상식으로는 숙종이 <미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명색이 왕(王)으로서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영토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모를 일은 없을 것이고, 설마하니 고구려를 코딱지만한 나라로 알리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겨놨는데, 후손인 우리가 풀어야할 숙제가 아니겠는가! 

국민적 오락의 성격도 바뀌어야 하지만, 왜곡된 역사도 바로잡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딴지>를 걸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