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양(朴戴陽)'은 갑신정변 후 일본으로 망명을 한 일단의 정객들을 잡아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일본으로 떠났던 조선 사신단의 일행이었다. 그는 일본의 문물을 보고 치를 떨었다. 고집스런 양반사족의 눈에 비친 일본은 기교(奇巧)스러웠고 본받을 것은 못됐다.

박대양은 조선사신단을 위한 연회장에서 기겁을 한다. 연회장에 참석한 외교관들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장면에서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박대양은 외교관들의 부인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장면에서는 뒤로 자빠진다. 남녀칠세부동석이 문제였다. 박대양은 '일본은 야만의 족속임이 분명하다' 성토를 한다.

지남규시대 조선사회는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격던 때다. 조선의 근간인 유교적 사고관에 편리하고 간편하며 풍족하기까지 한 서양문물의 틈입이 혼란을 일으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10월15일(14일자 결간). 함박눈이 오다.
아이 주먹만한  눈이 쉬지 않고 내렸다. 군자는 연말의 끝쯤에 오면 행동을 가다듬고 마음가짐도 새롭게 해야 한다. 세상의 망언과 망동에 흔들려서는 안된다. 근자에 동리의 젊은이들이 일본과 청나라의 문물이 좋다며 업으로 삼으려 한다. 큰 화근이 될 듯하다. 저녁에 박초시와 술을 마시고 바둑을 두었다.

(雪不休數如幼拳 世尾矣 君子方新 必其心與行 亦要一新 世言有不安正 妄言妄動 而可以主身敬存心者也 近洞數少年 取淸日好感 妄動主業 始禍根也 夜朴與飮酒圍碁也)

(지남규 필사 기보자료)

지남규는 상인으로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알고 어느 정도 그에 맞추어 살면서도 근본은 조선사람이다. 젊은이들이 일본과 청나라의 문물이 좋다며  그쪽으로 생업을 삼아야 한다는 움직임에 장차 나라의 화근이 될 것이라는 오판(?)을 하기도 한다. 노인은 항상 젊은이들을 걱정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근래에 '좌은담총'과 '난가당기화'를 다시 읽는다. 이런 책이 국내 번역본이 없다는 것이 불가사의다. 좋았던 시절(?)에도 못한 일을 훗날로 미루는 것도 딱하다. 이 두권의 책을 거듭 거듭 읽으며 과연 국내에 이 책을 세밀하게 읽어본 사람은 있는지가 궁금(?)했다. 바둑인이라면 귀가 아프게 들어본 책이기에 해 보는 푸념이다.
 

지남규는 이 날짜와 다음날 일기의 사이에 '기보' 한점을 필사해 놓고 있다. 실전에서 곤란을 겪은 사활문제로 추정된다. 지남규 스토리에는 이런 기보가 몇 점 더 들어 있다. 수법의 내용이나 용도는 훗날 책으로 출간 할 때를 기약하기로 한다. 필자가 자문을 구한 '박성균' 사범은 상급수준이라 했다. 상급수준이란 아마5단 정도의 기력으로 이해된다. 마침 창문으로 함박눈이 쏟아지는 것이 보인다. 아이의 주먹만한 눈송이라 말한 지남규의 시대로 돌아가 그 눈을 바라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