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남규가 살던 시대는 조선이 망국을 고하던 시대다. 시대적으로 급박하고 역사적으로 큰 매듭이 만들어지던 갈등의 시간을 살아가는 지남규의 일상은 너무도 태평하고 한가하다. 지남규는 도무지 걱정이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 장사하고 술 마시고 바둑 두고 간혹 주변 사람들을 챙기며 사는 소시민의 생활 딱 그것이다.

인간을 주목하고 역사를 주시하는 사가(史家)들은 향기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자신이 속한 세상을 긍정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며 때로는 부조리에 거칠게 저항하는 인간다운 인간들은 향기롭기 마련이다. 어느 시대나 자신이 속한 세상을 긍정하고 부조리에 맞서는 사람은 눈에 띄게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이 역사의 선봉이기 때문이다.

지남규는 망국의 조선의 한 시대를 살아가던 소시민에 불과하지만 지남규는 소중한 덕담을 던져준다. 그것은 재주 있는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8월26일. 가랑비.
가랑비가 오고 늦게 바람이 불었다. 장사를 쉬고 저녁에 주막에서 여러사람들과 술을 마셨다. 15냥을 들여 강변의 정자를 수리하는 것을 의논했다. (微雨晩作風 休店 夕酒幕與人談懷 文十五兩 江亭修粧議也)

8월27일. 맑음.
을동이 왔다. 반나절을 바둑을 두었다. 을동에게 한판을 졌다. 을동의 기력이 일취월장이다. 을동에게 바둑을 지다니...바둑을 지고도 기쁘다니...동리에서 돼지를 잡았다기에 얼마간 사서 을동에게 들려 보냈다. (乙童來半日圍碁 對碁一敗矣 乙童碁力之一就月張 乙童敗兮 碁敗之後 方喜兮 洞里屠猪 微量買次送)

지남규에게 바둑을 배운 을동이 드디어 지남규와 비슷한 기력으로 성장한다. 을동이 언제부터 바둑을 배웠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을동이 나름의 고수인 지남규의 맞상대로 성장한 것은 사건이다.

조선시대 바둑인들은 바둑의 조기교육의 효용성을 알고 있었다. 조선의 각종 기록에 소년바둑 신동의 기록은 수없이 많이 나온다. 어린시절에 바둑을 접하고 고수의 지도를 받을 때 기력이 순식간에 는다는 것은 오늘날에는 상식이지만 과거에도 그런 인식이 있었다. 지남규는 을동이 자신의 기력에 근접한 것을 알고 기뻐한다. 바둑을 패하고도 기쁘다는 지남규의 말은 감동적이다. 지남규는 동리에서 돼지를 잡은 것을 알고 고기 몇 칼을 끊어 을동에게 들려 집으로 돌려 보낸다.

좋은 스승과 좋은 제자 사이에는 향기가 있다. 스승은 제자를 사랑하고 제자는 스승의 사랑에 답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물샐 틈 없는 이익의 관계망이 지고지선(?)으로 인정되지만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내는 향기는 그것을 뛰어넘는다. 가난하고 헐벗던 시대, 지남규와 을동이 만들어가던 청출어람의 에피소드가 선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