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가을 날씨에 기방에서 심하게 놀고온 지남규는 그만 병을 얻는다. 수삼일을 아팠던 모양이다. 약국에서 '난간전'을 지어 왔다 하는데 동의보감(구기자, 당귀 따위를 넣어 만드는 약. 아랫배와 허리 부분이 차고 아픈 데 쓴다)의 설명으로 병증을 갈음한다. 그리고 근동의 스님이 방문을 했는데 스님이 점을 잘 친다기에 사주를 주어 점을 치게 한다.
스님이 돌아간 후 지남규는 기보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 기가십요(碁家十要)가 있다고 한다. 위기십결을 말하는 것이다. 지남규는 위기십결에 자신을 비추어 보며 아직 멀었다 자탄한다. 위기십결에 부합하는 삶이라면 아마도 그 사람은 한 분야의 독보적인 인물일 터이다.
8월23일(22일 건너뜀). 맑음, 바람.
몸에 탈이나 수일간 아팠다. 약방에서 '난간전'을 두 첩 지어왔다. 가까운 암자의 스님이 찾아왔다. 점을 잘 친다기에 사주를 주었다. 그가 돌아간 후 기보를 보았다. 기가에 십요가 있다. 나는 어느 세월에 그 경지에 이를까. (晴風 身病數日呻吟 往藥房問議 煖肝煎 二貼製來 近洞庵僧訪門 僧有相述矣 寫出流年 退僧以後 見碁譜 有碁家十要 余何歲其所當到也)
기가십요란 말은 조선의 여러 문인들이 언급을 한다. 민노흥, 민백흥, 지남규 등이 언급을 하고 있으나 가장 빠른 사람이 택당 이식(李植, 1584-1647)이다. 이식은 애기가답게 유연한 바둑관을 보여준다. 필자는 이식의 문집에서 아래의 글을 읽고 둔중함을 느꼈다. 이식은 박학다식을 덕목으로 하던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학자다. 성호 '이익'과 비슷한 성격이다. 이식은 아들에게 편지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가십결의 교훈이 잘 묻어난 명문이다.
가난하고 고난한 경우에 처하더라도 초초해 하지 말고 차분하게 자신의 내부를 지킬 것이요, 험액(險阨)과 환란(患亂)을 당할 때에도 강인한 의지로 참아내면서 떨쳐일어나야 할 것이다. 이른바 심기(心氣)로 생활풍파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물과 불도 다치게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하겠다.
마음 속에 매인 바가 없어서 어지러워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군자다. 반면에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란 어떻게 해서든 외물에 의지해서라도 안정을 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독실하게 좋아하는 것이 있을 때에는 외물도 가볍게 여길 수 있는 법이다. 바둑 같은 작은 기예를 가지고도 근심 걱정을 모두 잊을 수가 있는데, 더구나 옛사람의 글을 읽고 옛사람의 마음을 찾으면서 자나깨나 생각하고 붕우와 함께 강론한다면, 그 즐거움이 어떠하겠느냐.
(當飢寒困勞 惟靜默內守 當險阨患難 惟剛忍奮發 此心氣勝外物 所謂水火不能傷也 心無所繫而能不亂 此至人也 衆人之心 須寓於物而安焉 若篤好之 則外物可輕也 博奕小技 皆可忘憂 況讀古人書 求古人心 寤寐思之 朋友講之 則其樂如何耶)
이식은 안성에 오랫동안 칩거하고 살면서 많은 책을 쓰고 후학을 길렀다. 이식은 다방면의 관심으로 후대의 연구자들에게 많은 연구과제를 준 사람이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이 짦은 터치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홍길동전의 저자는 작자미상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이식은 바둑에 십요(十要)가 있다고도 했는데 위기십결, 혁가십결, 기설십요 등 여러가지로 불리던 그 말이다. 이식은 바둑으로 세상근심을 잊을 수 있다고 한다. 책으로는 천하의 근심도 덮을 수 있다고 했다.
지남규를 이식과 비교할 수는 없겠으나 한세상을 살아가며 바둑을 의지하고 바둑으로 위로 받는 모습은 이식에 못지 않다. 그렇다. 오늘날의 바둑의 뒷골목에도 얼마든지 통용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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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천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