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인을 아끼고 예능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문화사랑은 개인을 건강하게 하고  공동체를 행복하게 하는 순기능이 있기에 백번을 칭찬해도 부족하다. 인재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재는 대개 범상치 않기 때문이다.

'포박자'에  인재를 사랑하는 '섭공'이 나온다. 섭공은 용 그림을 미친 듯 좋아한다. 화원(畵員)을 대접하는 것도 지극하다. 어느날 이 섭공 앞에 진짜 용이 나타난다. 섭공은 대경실색한다(此蓋葉公之好援刑見眞龍而失色也). 이 말은 예인과 예능을 사랑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암시한다. 세상의 인재를 끌어안기가 그리 쉬울까.

앞에서 한번 소개한 바 있는 최북(崔北, 1717-1786)이 그런 경우다. 당대의 화가이자 바둑고수로 이름을 날리던 최북을 한 고관이 불러 바둑을 청해 둔다. 바둑이 불리해진 고관이 한수를 물릴 것을 청하자 최북은 바둑판을 엎어버리고 나온다. 고관은 아연실색한다. 그림 속의 용과 살아있는 용의 차이다.

8월15일. (8월16일) 맑음.
명절이다.

8월17일. 맑음.
강변에 술과 음식을 차려 놓고 바둑 투전 활 등을 쏘며 놀았다. 오후에는 가까운 곳에 사는 노래 잘하는 가동을 불러왔다. 고수와 함께 왔는데 부자지간이다. 노래를 하는데 보니 명창이다. 기녀도 함께 왔는데 노래가 구성지다. 노래를 부르는 가동을 보니 을동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江亭爲宴席 爲圍碁鬪錢射于場 晩近洞名唱歌童來往 同來之鼓手 卽父子之間也 試聽短歌果是善唱也 同行妓唱不勝腸歎 在唱歌童乙童似思.)

'가동'이 부른 노래는 어떤 것일까. 당시대 유행하던  노래가락 한편을 떠올려 본다. 때가 가을이여 더욱 은근하다.

귀또리 저귀또리 어여쁠사 저귀또리
지는 달 새는 밤에 절절이도 슬피 울어
너 비록 미물일망정 내 뜻 알기는 너뿐인가.
 

지남규는 명절 양일간을 공란으로 비워 놓는다. 명절이란 한 마디가 모든 걸 대신한다. 명절은 17일까지 이어진다. 동학혁명,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 역사의 굵은 매듭을 짓던 시대의 현장을 살던 사람들의 모습이 지극히 한가하고 태평하다. 풍전등화 같은 국가의 위급과 바둑돌 쌓아놓듯 위태롭던 국권의 침탈과정이 강상에 모여 놀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별다른 동요나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 충격이다. 정치와 철저하게 분리되고 격리되었던 조선백성들의 입장이라 하더라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추석명절 끝에 사람들이 모인다. 가을이 하늘에서 내려온 강변에 치알을 치고 술과 음악을 차려놓고 바둑두고 투전하고 활쏘면서 명절을 즐긴다. 가까운 곳에서 노래 잘하는 가동과 기녀 등 예인을 불러 노래하고 춤추며 자못 흥겨우면서도 품위까지 챙긴다. 지남규는 흥겨운 이 놀이판에서 노래하는 가동의 얼굴 위로 중첩되는 을동의 모습을 본다. 참으로 못말리는 사람이다.

하수상한 시절.

역사가 망조에 접어들어 도무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어느날  한강변에 모여 추석 한가위를 즐기던 사람들의 모습이 영화의 엔딩 장면마냥 좀처럼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