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겹친 1894년의 역사적 사건들도 지남규의 생활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지남규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사람들도 대동소이하다. 지남규에게는 국가적 사태보다는 김과 포천서에게 당한 횡액(?)이 더 큰 현실적 문제로 느껴진다. 추석이 가까워 오자 지역의 유지이자 바둑동호회 좌장인 박초시가 밥 한끼를 낸다. 그 자리에서 박초시는 호연지기를 한껏 뽐낸다.

8월7일. 맑음.
박초시가 저녁을 냈다. 밤에 바둑을 두다가 술을 마셨다. 박초시가 한 손에 기보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좌 춘추요 우 기보라.

기보의 으뜸은 현현기경입니다. 바둑의 깊고 심원한 묘미는 개합 취사 조종 변화에 있지요. 그 감탄할 만한 묘미를 비교할 것은 없습니다. 하여 고금의 놀이의 왕이라 바둑을 일컫는 겁니다. 

과연 그렇다.세상의 길은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左春秋 右碁經也 一譜碁經而圍碁深微 有開闔 有聚捨 有調悰 有變化 無意於用巧 而古今莫之能戱及 斯其所以碁乎 然世不一路也)

지남규는 박초시의 말을 곱씹는다. 애기가 박초시가 조금 과장하여 한 말이기는 하나 지남규는 고개를 끄덕인다. 기경(碁經)은 현현기경을 말한다. 현현기경을 '춘추(春秋)'에 비교한 박초시의 생각이 흥미롭다. '춘추'를 조선 식자들은 모든 책의 모범으로 생각하던 인식이 있다.

박지원은 '주역'과 '춘추'가 모든 글쓰기의 모범이라 했다. 주역은 은밀하고 춘추는 밝기에 글쓰는 사람은 이 두권의 책을 잘 공부하면 대문장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박지원은 한발 더 나아가 이 두권의 책을 잘 이용한 사람으로 '장자(莊子)'를 들면서 세상의 모든 작가의 영웅이 바로 '장자'라고 했다. 박지원은 이 발언을 열하일기 서문으로 쓰고 있다. 그만큼 비중 있는 말이다.
박초시는 춘추의 대구(對句)로 현현기경을 든다. 바둑인에게 현현기경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이겠다.

지남규는 박초시의 말을 기록하며 인간의 삶은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토로한다. 생의 고민은 언제나 이렇게 당면한다. '양주(楊朱)'가 기산에서 동서로 갈린 길을 보고 울고 '묵자(墨子)'가 실을 염색하면서 황색과 붉은 색을 고민했다는 이유도 이런 경우일 것이다. '맹자'가 이 고민을 듣고는 공자를 거론하며 나를 아는 자도 춘추고 나를 옥죄는 자도 춘추다(罪我者其唯春秋 知我者其唯春秋) 한 이유가 그것이다. 인간이  삶을 살아가며 갖게 되는 신념의 문제인 거다.

'춘추'가 동양 역사의 전범이 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그것은 '사실만을 쓰고 한번 기록한 것은 고치지 않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20세기 이후를 과학의 시대니 이성의 시대라 하면서 날마다 과학과 이성을 들이대면서 역사를 고쳐 쓰는 현실을 보면 춘추가 왜 춘추인지를 알게 된다. 이런 배경을 알고 나면 박초시가 좌중을 향해 기보를 들어 보이며 '좌 춘추 우 기경'을 외친 치기(?)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