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남규의 일기를 온전한 바둑일기로 읽기에는 내용이 너무 소략하다. 그러나 한 사람의 바둑마니아의 면모를 엿보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본다. 마니아는 어떤 분야에 특별한 열정과 사랑이 있는 사람이다. 마니아는 순수하다. 하여 직업으로 어떤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들보다 자신의 관심 분야에서 큰 기여를 하는 경우가 있다. 전문가는 많지만 뼛속까지 전문가인 사람은 많지 않다는 말이 생각난다. 검사 신분으로 고서화 수집 마니아였던 사람이 수십년 고서화 수집 현장에서 보고 느낀 심정을 쓴 책에서 본 말이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드디어 연기되었던 바둑모임 '박회"가 열린다. 강변에 줄지어 장막을 치고 그 아래에서 한바탕 바둑축제가 열린 것이다. 1894년 7월5일 양주군 북한강변에서의 일이다.

7월5일. 맑음.
계원 20여 명이 모였다. 좌수와 박초시를 좌장으로 하루 시간을 보냈다. 구경꾼들이 백여 명이 와 술과 장국밥 국수를 냈다. '조'는 과연 일수기답다. 나와 박초시는 넘보지 못할 고수다. '포천 서'가 거친 파도라면 조는 날카로운 비수다. 조를 집으로 모셔 대접했다.

7월6일. 맑음.
조를 대동하고 박초시댁에 가서 인사를 했다. 박초시가 좌수가 내놓은 돈이라며 20냥과 자신이 30냥을 더해 곗돈에서 준비한 50냥을 더해 조에게 거마비로 주었다. 조를 나루까지 배웅했다.

지남규와 박초시가 주도한 '박회가 성대하게 끝난다. 한양에서 초대한 고수 '조'가 왔고 관에서는 오늘날의 군의장격인 좌수가 참석해 자리를 빛내준다. 20여 명의 계원이 참석했고 백여 명의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술과 안주 그리고 밥을 내어 정겨운 축제 한마당이 펼쳐진다. 한양에서 초대한 조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지남규는 도무지 자신이 넘볼 수 없는 기력이라 감탄하며 그의 바둑수가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비수(夜陰之乘 匕手)라고 한다.

지남규는 일수기 조를 지극정성으로 모신다.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을 불편 없이 쉬게 하고 거마비를 챙겨 나루까지 배웅을 한다. 이 장면은 오늘날의 지방 바둑대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시대는 변했어도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만나면 반갑다.

조선시대 바둑대회와 각종 바둑모임이 있었던 것은 여러 기록으로 확인된다. '이서구' '이덕무' '유본학' 등의 기록이 그것이다. 가까운 예로는 1907년 울산군에서 있었던 바둑대회가 그것이다. 최현배(崔鉉培, 1894-1970)는 울산군 하상면에 살며 12살에 동리 서당대표로 군바둑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여 지역에서 바둑신동이라 불렸다. 이 기록은 최현배가 자신의 자전기에 쓰고 있다. 1920년에서 30년대에는 매년 수십 개의 바둑대회가 전국에서 열렸다. 동아일보에 보이는 매년 수십 건의 바둑대회 기록은 조선의 바둑열풍이 결코 오늘날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지남규는 바둑마니아다. 지남규는 바둑을 예의와 정성으로 대한다. 이런 지남규를 지켜보면서 떠오르는 울림이 하나 있다.

바둑을 누가 만들어 오늘에 이르게 했나.

요순의 사업임을 어찌 믿으랴.

과학이 생겨나기 전 어떻게 생겨났을까.

쉬운 말로 한갓 도략이라고 말들 하지만

바둑은 우주

그대여 하늘을 보라  바둑판에 빛이 비추기 전을.

(碁遂古之初 誰傳道之. 堯舜事業何有信之. 科學未生 何能始之 卽戱物焉 . 碁之天機. 君仰宇宙 盤上兮未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