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의 여름이 얼마나 무더웠는지는 모르나 지남규의 여름나기는 자못 향토적이다. 60년대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도 구경 못하던 시대를 깨복동이로 보낸 필자는 지남규의 여름나기에 공감 가는 점이 많다. 개울가, 목욕. 고기잡기, 등목, 수박 그리고 마을 입구에 있던 정자나무 그늘이 여름나기의 전부였던 필자는 백년전 사람 지남규의 여름나기를 충분히 이해한다.

그리고 불과 수십년 사이에 세상이  엄청나게 변했음을 실감한다. 초가가 즐비하던 동리에 초등학교 5학년때에서야  처음 전기를 구경한 처지에서 지남규의 여름나기를 추억(?)한다면 어폐일까.

6월29일. 맑음 엄청 더움.
덥다. 마을정자 아래에서 더위를 식혔다. 정자그늘이 사방에 돋자리를 편 듯하다. 쓰르라미, 매미소리 성글고 인근 사람들이 모여 마를 찢어 삼베 재료를 만들고 장기를 두며 술을 나눠 마신다. 하늘에 구름이 떠가고 땅 위에 바람이 지나간다. 시 한수를 읊었다.

(蒸 方其日影亭午 濃陰四鋪 蜩螳爲之聲 卽往來者 續麻者 象戱以패 爪酒者 天雲地風 吟詩一句焉)

정자나무 그늘이 짙다. 매미소리 한낮의 정적을 깨고 그 아래 사람들이 모여 더위를 피하는 모습이 제각각이다. 마를 찢어 삼베 재료를 만드는 부업을 하는 실속파가 있는가 하면 막걸리를 마시며 장기를 두는 사람들도 있다. 지남규는 그들을 바라보며 시 한수를 읊는다. 제목이 여름 씻어내기(洗夏吟)다.

한줄기 바람소리 한촌을 지나가고

대나무숲을 때리는 바람소리 물결과도 같다

어지러운 바둑판 착수하기 힘들고

남은 생 여유는 편안함에 있구나.

(一風聲之寒村過/ 竹鳴如楚水如羅/ 碁局縱橫亂着手/ 餘生福祿在優遊) 

이 시는 지남규의 작품인지는 불분명하다. 본인이 지었다는 말을 하지 않고 구절 중에 [기국종횡착수]는 딱히 창작자를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유명한 구절이기도 하다. 어지러운 바둑판을 빗대어 세상의 어떤 문제를 지적하는 비유로 쓰이는 이 구절은 '전당시화'는 물론 '당서집해' 등에도 보일 정도로 역사가 깊은 말이다.

상희(象戱)가 보인다. 상(象), 상희(象戱), 상기(象碁)로 표시되는 장기는 바둑 기(碁), 위기(圍碁), 좌은 등과는 구별되는 용어다. 조선실록 승정원일기 그리고 각종 연행록 등 조선시대의 모든 자료에 바둑과 장기는 확연히 구별되어 나타난다. 한사코 기(碁)를 장기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기에 해보는 소리다.

지남규는 바람쐬고 시를 짓고 장기두는 것을 구경하며 여름을 보낸다. 갑오농민운동과 청일전쟁 등은 지남규의 일상에 큰 변수가 되지 못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