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행방이 묘연하던 김(金)이 포천의 고수 서(徐)를 대동하고 나타난다. 지남규에게 큰돈을 따고 그것도 모자라 시장에서 박포까지 벌이며 밑천을 장만해 시장판을 떠났던 김이 돌아온 것이다. 김이 돌아오기 전날 지남규는 모처럼 외박을 한다. (6월16일자와 17일자는 망실)

6월18일. 아침 맑았다 늦게 흐림(朝晴晩陰).
일꾼 다섯 명을 사 논밥과 담장 등을 돌보았다. 스님이 한 분 와 저녁을 대접하고 주역점을 쳐주기에 봤다. 스님을 모시고 주막에 가 주모 박소사의 관상을 보고 웃고 떠들다 밤 늦게 스님은 가고 나는 박소사와 정담을 나누다 새벽에 돌아왔다.

6월19일. 맑음.

김이 포천 서를 대동하고 왔다. 서는 바둑은 고수나 사람이 불손했다. 바둑은 무척이나 힘이 강하다. 마치 둔기로 맞는 듯했다. 고수를 만나 기쁘련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럴 때 '왕태'가 있었다면. 바둑수 약한 것이 한스럽다.

(金來包川徐同行 徐高手焉性精不快也  碁勢力負力强而打然鈍棒 逢高手不好呵 若有王太乎 噫我力不足也)

지남규는 어쩔 수 없는 조선사람이다. 관상과 점을 좋아하고 어떤 날은 주막의 주모와 외박을 하고 그것을 일기에 기록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김이 나타난다. 거의 20여일만이다. 그러나 김은 혼자가 아니다. 연기되었던 '박회'에 초대하기로 했었던 포천 고수 서를 대동하고 의기양양한 모습이다.

그날 지남규는 서와 바둑을 두고 매우 불쾌했던 듯하다. 서의 인품이 지남규와는 전혀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바둑은 무척이나 강했던 모양이다. 힘이 강한 바둑이란 것이다. 한수 한수를 대할 때마다 둔기로 맞는 듯한 충격이 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일정 수준에 이른 바둑인들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말이다. 하수가 상수와 상대할 때 강한 압박과 내리누르는 기세는 상상 이상이다. 지남규는 서에게 일방적으로 패한 모양이다. 그리고 고수를 만나 한 수 배웠다는 소감보다는 왕태(王太)를 운운하며 서의 대국 태도를 꼬집는다.

지남규는 이날 대국에서 무척이나 화가 나고 약이 올랐던 듯하다. 왕태는 유림외사(儒林外史)에 나오는 바둑고수다.

만력23년(1595) 남경의 명사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남경을 떠나거나 두문불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그 중 나무꾼 왕태가 있었다. 왕태는 나무를 팔아 호구를 이어가는 사람이나 어려서부터 바둑을 잘 두어 신기(神碁)로 통했다.

어느날 왕태가 가까운 절에 갔는데 그곳에서 당대의 고수 마(馬)와 변(卞)이 바둑을 두는 모습을 보았다. 마는 하룻밤에 수천냥을 따는 명사였고 변은 천하의 국수(國手)로 통하는 사람이었다. 왕태는 그들의 바둑을 가소롭게 바라보다가 급기야 마와 한판을 두게 되었다. 마는 불과 수십수 만에 돌을 던지고 왕태에게 술 한잔을 권했다. 왕태는 잔을 물리치며 말한다.

'천하의 덜 떨어진 하수를 깨는 것보다 즐거운 일은 없지요. 술은 사양합니다."

그리고 왕태는 사라진다.

유림외사는 중국에서 18세기에 출간되어 조선에도 보급된 책이지만 지남규가 유림외사를 읽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왕태의 에피소드가 조선의  바둑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던 것은 분명하다. 하여튼 포천 서, 이 사람이 또 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