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은 개점 휴업이다. 논밭을 손보는 농민 외에는 움직이는 사람들도 드문 때가 여름 장마철이다. 지남규는 열었던 상점문을 태풍에 닫아 걸고 자신의 집과 전답 그리고 마을을 돌아보며 피해 상황을 살핀다. 바람에 지붕이 날아가고 담장이 무너진 집들이 속출한다. 지남규는 한강이 넘치는 수재도 큰 걱정이다.

6얼12일. 미친 듯한 바람 그리고 비(狂風然雨).
큰바람이다. 상점문을 닫았다. 마을의 초가들 지붕이 날아가고 헛간이 무너진 집이 다수다. 강물이 넘칠까 두렵다. 수재가 난다면 정말 큰일이다. 담배, 물고기를 3냥어치 구입했다.

옛날 사람들은 여름에 발생하여 조선팔도 곳곳에 큰 피해를 주는 태풍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듯하다. 기록으로 보이는 태풍의 정보는 오늘날의 상식에 비추어 웃음이 나올 정도이지만 그들 나름대로 태풍에 대한 두려움과 대처 방법도 고민했다.

1897년 일성록은 고종이 근위내관 '정환덕'에게 호남에서 강원도 삼척으로 널뛰기를 하는 비바람 피해에 대해 점을 치라 명령한다. 정환덕(鄭換悳)은 김천출신으로 고종이 상수(象數)에 능하다는 이유로  발탁, 시종내관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정환덕은 남가지몽이란 일기를 남겨 고종의 내밀한 생활 모습을 전해준 사람이다.

6월13일. 잠깐 갬 그리고 비.
동리를 한바퀴 돌아 보았다. 김의 집도 다녀왔다. 빈집이다. 김이 궁금하다. 재주가 있으나 뿌리가 없어 항상 고생이다. 기보를 놓아 보다가 바둑을 생각해 본다.

세상의 모든 유혹 중 미색만한 것이 없지만 바둑은 예외다. 한번 그것에 빠지면 주색도 마땅찮다. 그것이 바둑이다. 먹고 마시는 것도 잊고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 잡기이며 그 중 투전이 일착이지만 그것도 바둑에 비교할 바 아니다. 나는 이리 생각한다. 바둑은 만가지 놀이의 으뜸이다.

(蓋惑於物者 莫如美色 而此圍碁 則猶有相離之項  耽嗜於美者 莫如酒色 而此圍碁 則亦多不飮之時 沆溺於雜伎者 又莫如投錢 而亦不如圍碁之須臾不離 吳此由其何爲而然也 圍碁 萬物之戱 元也)

(1972년 아스타나고분 발굴 당나라시대 벽화)

지남규는 마을을 돌아보고 김의 집도 다녀온다. 애증이 쌓인 관계지만 지남규의 김에 대한 생각은 애뜻하다. 지남규는 그날 밤 기보를 놓아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바둑을 생각한다. 일종의 바둑론이라 할만하다. 필자가 알기로 조선시대 바둑론을 말한 사람은 10여명 정도다. 민백흥 이덕무 최한기 조희룡 유본학 이규경 등 나름대로 모두 명망가들이다.

지남규는 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무명이지만 바둑을 대하는 모습은 위의 누구보다 따뜻하고 겸손하다. 지남규는 바둑을 한마디로 말한다. 바둑은 만가지 놀이의 으뜸이다.

필자는 지남규의 이 말에 적극 동조한다. 바둑은 놀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끝을 알 수 없는 수(數)의 갈등으로 인간의 탐구욕과 호승심을 자극하고, 동시에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동양 천문관의 반영으로 철학성까지 갖추고 있어 자칫 한끝 차이에 불과한  체면과 타락의 간극을 잘 아우른다.

오늘날 게임 세상을 지배하는 어떤 게임도 백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둑은 누천년(累千年)을 이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판단을 할 수 있는 이유도 바둑이 내포하고 있는 속성 때문일 것이다. 그 속성을 지남규가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