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남규가 일기를 쓴 갑오년은 조선이 역사의 격류에 휩쓸려 가던 시대다. 동학혁명, 청일전쟁, 갑오개혁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는 오백년 왕조를 이어온 일국(一國)을 좌초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역사의 격류 속에 살고 있는 자연인 지남규의 일상은 너무도 태평하고 한가하다. 지남규는 새로 구입해 온 바둑판과 돌 등 수벌의 바둑기물(器物)을 보고 흡족해 한다.

5월22일. 거친바람 그리고 맑음.
바람이 거세다. 측간 지붕이 바람에 뒤집어졌다. 비도 조금 뿌렸다. 요사스런 날씨다. 술을 마시고 잤다.

5월23일. 맑음.
박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바둑판과 알 등 10벌을 40냥에 샀다. 바둑알이 일정하게 고르니 아주 좋다. 동리 김생원에게 30냥을 융통해 줬다. 30냥 이익을 보았다.

 
지남규는 박회를 대비해 10벌의 바둑기물을 구입한다. 기록은 없지만 모임 협찬물인 듯하다. 지남규는 끊임없이 바둑의 기력을 탐하면서도 주변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다. 바둑인들의 모임을 주도하고 어느 정도의 비용도 기꺼이 부담한다. 지남규는 열 벌의 바둑기물을 구입하고 상품인 바둑알에 기쁨을 표시한다. 바둑알은 쉽게 구하기 힘든 물품이었던 듯하다.

바둑알은 자연석에서 원료를 채집해 2차 가공을 해야하는 탓으로 기계공업이 발전하지 못한 시대니 이해가 된다. 하여 조선시대 바둑돌에는 부산 바닷가를 살던 소년들의 아픔이 묻어 있다. 일찍이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이 그들의 애환을 간파하고 기록한 바 있다.

[검은돌은 기장고을의 십리포에서 나오고 흰돌은 동래 수영포구에서 나온다. 관아에서 부리는 아이들이 이일을 하는데 밥을 싸들고 가서 돌을 주워모아 단단한 돌에 간다. 익숙한 아이라도 하루에 수십 개를 만들 정도로 어렵다. 흑백돌이 각각 2백알이 한벌인데 기장관아에서만 한해 바치는 것이 1천 벌이다.

관아의 아이 20명이 1년 내내 바둑돌을 갈지 않는 날이 없다. 한 아이가 흰바둑돌 수십 개를 순백의 옥처럼 다듬는데 본(本)이 되는 돌에 맞지 않으면 버려진다. 본은 뿔을 깍아 만든 것으로 마치 주조(주물)한 것과 같다. 바둑돌 모양은 딱 이것과 같아야 한다.

一官童手待白碁數十 如削玉戴肪 猶不中本見黜 所謂本者 削角本如鑄範 色狀一祝此少違不用也.]

 
십리포는 부산 '기장(機張)구포'의 하나로 기포(碁浦)라 불리던 곳으로 이동(伊東) 마을을 말한다. 이곳에서는 바돌개 마을이라고도 했다. 이곳은 옛날부터 검은 바둑돌이 많이 난다고 한다. 수영포구는 해운포에서 경상수군영(水軍營)이 옮겨온 감만포다. 지금도 해안가에서 횐돌을 발견할 수 있다. 동래 기장고을이 바둑알의 특산지라는 말은 이런 연유가 있다.

동물의 뼈를 깎아 만든 바둑알의 '기준모형'에 맞추어 돌을 갈아 딱 맞춰야 했던 관아에서 일하는 아이들의 손에 피가 나고 굳은살이 붙은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심노승은 관아에서 부리는 아이들의 손톱이 하나같이 닳아 문드러져 있었다(人人皆指爪穿削叩之)증언한다. 심노승이 기장현감을 역임했으니 그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다 할 것이다. 기장관아의 아이들은 1년에 1천 벌의 바둑알을 만들어야 했다. 그 바둑알은 모두 한양으로 가는 물건임은 물론이다.

인구 20만이 조금 넘던 조선의 수도 한양으로 한 고장에서 1년에 1천 벌의 바둑알을 보냈다면 도대체 당시 바둑인은 얼마나 된다는 말인가. 오늘날 천만 인구의 서울에서 1년에 바둑판 천 벌이 팔리기는 하는걸까. 필자가 늘상 조선은 바둑의 천국이었다는 주장이 이런 기록 때문이다. 어쨌든 지남규가 구한 바둑알도 이런 과정을 거친 생산물일 터이다. 역사 기록의 저변을 살피고 나면 심노승의 기록은  진정 감동적이다.

지남규의 바둑사랑은 지극하다. 스스로 고수를 꿈꾸다가 여의치 않음을 느끼고 주변과 후학에 관심을 두고 바둑을 퍼트린다. 주변에 끝없이 바둑관련 일을 만들어 붐을 조성하고  재주있는 소년 을동을 키우는 이유 등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