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남규는 김이 여주관아에 구금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날 여주로 간다. 여주는 지남규가 살고 있는 고을에서 지척이다. 동시에 여주는 한강지류의 도회지다.
 

5월12일. 맑음.
여주에 저녁 늦게 도착해 객점에서 묵었다.

5월13일. 맑음.
관아로 가 김을 만났다. 그는 도박죄로 장 30도를 받아 놓고 있었다. 속량금이 1도에 3냥, 도합 90냥으로 기한은 이달 말까지다. 옥사 안의 죄수들 중 구레나룻이 성한 사람이 하나 있는데 니들이 시경을 아냐며 고래 고래 소리를 쳤다. 김이 돈 사람이라고 했다.

5월14일. 흐림 비 조금.
여주기방에서 60냥을 변통해 90냥을 만들어 관아에 냈다. 그날을 기방에서 묵었다. 어린 기녀들이 바둑을 두는 것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1920년대 평양기생들이 당시 유명 문인을 편집장으로 초청하여 만든 잡지 '장한')

지남규는 여주에도 인맥이 닿는다. 기방에서 60냥을 쉽게 변통하는 것이 그렇다. 물상의 이동선상에 있는 상인의 강점일 터이다. 지남규는 김의 석방을 기다리며 그날 밤을 기방에서 보낸다. 어린 기녀들이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조선시대 기방의 기녀들이 바둑을 배운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조선시대 기녀들은 해어화(解語花)라 불렸다.

기녀를 말하는 꽃으로 본 조선시대 밤의 문화의 중심이었던 기녀들은 시와 음악을 기본으로 춤 바둑 재담 등에 타고난 끼를 발산했던 나름 예능인이라 할 수 있다. 기녀들은 한양 평양 대구 등 도회지를 무대로 지역적 자긍심을 갖고 활동을 했는데 그중 평양의 기녀들은 자못 유명했다.

19세기 개성에 살던 '한재략'은 '녹파잡기'라는 책을 지어 평양의 기녀 65명을 취재, 기록한 바 그중 일지홍(一枝紅)이 단연 돋보인다. 녹파잡기는 정지상의 시 '송인(送人)' 중 '해마다 눈물 보태는 것을'에서 따온 것으로 무지막지(?)한 남녀의 만남과 이별을 반복해야 했던 기녀들의 삶과 잘 부합되지만 일지홍은 특출난 기녀관과 기개로 세인의 주목을 받는다.

일지홍은 샛별같은 반짝이는 눈과 눈썹이 봄날의 산처럼 산뜻하다. 성품이 곧고 속되지 않고 총명함까지 있어 평양 사내들의 사랑을 받는다. 거기다 요리는 물론 다도를 알고 바둑까지 잘 두어 사내들의 가슴을 태운 모양이다. 오늘날에도 바둑을 이해하는 여성들은 적고 조선시대도 예외가 아니라면 일지홍의 다재다능한 재능이 느껴진다. 기녀들의 주 소비층이던 선비 문인들의 고상한 취미가 거문고와 바둑 그리고 활쏘기 등인지라 미모를 갖추고 취미까지 공유할 수 있는 여인의 가치는 대단했을 것이다. 일지홍이 어느날 한재략에게 말한다.

"제가 기녀가 된 것은 운명이지만 천성이 남에게 꺾이거나 굽히질 못한답니다. 기녀들 속에 묻혀 살지만 동료들이 문에 기대어 웃음을 파는 것을 보면 저도 모르게 서늘해지고 꺼려진답니다.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떤 남자가 금을 광주리에 담아오고 구슬을 말로 퍼가지고 매일 찾아온대도 저는 꺾이지 않을 겁니다."

여자들의 인권개념이 없던 시대, 천것으로 치부되던 기녀들의 삶은 막장이다. 그러나 그런 막장 속에서도 선비 문인에 못지 않은 문장과 음악적 재능을 보여준 기녀들이 많다. 그들 중 기걸찬 남아에 견줄만한 기녀가 일지홍이다. 일지홍은 날마다 당면하는 막장의 현실 속에서도 사내들을 스스로 택하며 자존심을 지키며 나름의 저항을 한다. 말하는 꽃 기녀를 넘어 기녀도 사람이고 여자라는 인식이 처연하다.

한재략은 한가한 인물이다. 변변한 벼슬도 명망을 받는 저술 한권 남기지 못한 시골 선비다. 그러나 생활은 풍족했던 모양이다. 평양 기녀들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그들의 용모와 성품 재주까지 기록할 정도라면 오늘날의 강남 오렌지족쯤 된다 하겠다. 그러나 한재략은 일지홍의 기록을 남겨 여권이 살아난 21세기로 그녀를 안내한 공이 있다. 지남규는 역사속에서 흔치 않은 바둑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지남규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