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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제자를 키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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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제자를 키운다는 것
2010-03-18 조회 9419    프린트스크랩

 

시골에서 한양으로 바둑 원정을 가는 사람과 내기바둑을 두는 지남규의 기력이 궁금하다. '기보'를 챙겨두고 틈날 때마다 들여다보는 정도라면 바둑마니아다. '기보'는 조수삼, 조희룡, 정약용, 이서구, 박지원 정조 등의 문집에도 빈번하게 등장할 정도이고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기보는 현현기경류의 묘수풀이집류와 개인과 개인간의 두어진 바둑내용을 기록하고 기력증진으로 활용한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조선말기의 기보 수십 점이 발굴되기도 했고 이 난에 소개도 될 것이다.

 

4월16일. 흐렸다 맑았다.

을동이 왔다. 점포를 열고 물건을 진열한 후 바둑을 두었다. 을동의 바둑이 제법 삼수기(三手碁)는 될 정도로 세졌다. 조금만 더 정진하면 나도 부치겠다. 을동이 일수기가 된다면 절로(自然) 웃음이 나온다.  오늘 이문이 20냥이다. 쌀 한섬을 200냥에 들여 놓았다.


4월18일.(17일자 해독불가) 맑았다.

윤진사댁 장례에 부조 10냥을 했다. 담배값 술값이 1냥이다. 사정(射亭)에서 활쏘는 것을 구경하고 나도 몇순(한순에 5발) 쏘았다. 김이 한양에서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은 오지 않았다. 갑식이네가 빌려간 돈의 이자를 15냥 가져왔다. 원금은 다음달 갚는다 한다. 오늘 이익이 30냥 남짓이다. 무쇠솥을 세개를 들여 놓았다.


4월19일. 곧 비가 올 듯(雨勢將作).

땔감을 10냥어치 사고 비가 샐까 점포주변을 살폈다. 김이 왔다. 한양에서 백냥 이상을 따왔다고 기분 좋아 했다. 점심과 술을 김이 냈다.

진고개 박국(바둑 장기 마직 등을 하던 곳)에 갔던 얘기를 했다. 일본 바둑이 엄청 세다고 했다. 술이 너무 취해 바둑은 두지 않았다. 장사는 이문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지남규의 점포로 을동(乙同)이란 소년이 찾아온다. 지남규는 을동과 바둑을 둔다. 그는 을동의 기력이 일수기(一手碁)가 되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 한다. 지남규는 스스로만의 바둑에 만족하지 않고 근동에 사는 바둑에 재주가 있는 한 소년을 후원하고 있다. 을동에게 바둑을 가르쳐 주고 밥주고 용돈까지 쥐어 주는 모습이 그렇다.

'일수기'란 말은 국수급 바둑인을 지칭하는 용어다. 일수기 중에서 가장 강한 자가 국기(國碁)다. 1930년 동아일보는 조선에 일수기가 열명 있다고 했다. 백남규, 노사초 등이 그들이다. 일수기가 당대의 고수를 지칭한다면 삼수기 또한 수준급 기력의 소유자라 판단할 수 있다.

지남규는 근동의 윤진사댁 상가에 조의를 하고 활을 쏘는 곳을 방문하는 등 개인 취미에도 힘을 쏟는다. 그때 한양에 갔던 김이 돌아와  백냥을 따왔다며 밥과 술을 산다. 그 김의 진술이 심상치 않다. 진고개에 있던 박국(博局)을 구경하고 온 김이 일본바둑이 엄청나게 세다고 한다.

진고개란 말은 진흙이 많아 질척질척 하다는 뜻으로 생긴 말이라 한다. 진고개가  이현(泥峴)으로도 불리던 이유다. 진고개는 임오군란 이후 일본 공사관이 자리잡으며 일본 상인들이 대규모로 이주해 와 일본인 주거지역으로 발전하고 있는 중이었다.

진고개에 있던 '박국'은 1891년에 쓰여진 [하재일기-서울시사편찬위원회 발간]에도 보이는데 사람들이 모여 바둑 장기 마작 등을 하던 기원(棋院)이다. 1891년에 서울 명동에 기원이 있었고 그것을 1894년에 지남규의 바둑친구 김이 증언을 하는 모습이다.

'박국'은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생긴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조선의 바둑도박은 내공(?)이 있다. 1909년 중추원 관보에 조선의 도박열풍을 보고되어 있는데 바둑 장기 도박이 성하고 바둑은 집수의 차이, 장기는 기물의 움직임에도 돈을 걸 정도라 할 정도다. 물론 우리나라 땅에서 기원이란 말의 효시는 일본인들이 운영했던 위기교습소(1934년 동아일보)지만 위기교습소의 전신격인 박국의 모습은 성현의 용재총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김이 한양에서 보고온 일본바둑은 대단했다. 이때 막부의 후원이 사라진 일본바둑은 '방원사'체제로 단단하게 결집했다가 '사상회' '피성회' 등으로 사분오열하면서 각기 도생의 길을 찾기 시작했고, 일단의 고수들이 조선 중국으로 진출하던 때였다. 조선에도 그들이 들어와 있었을 것이다. 과연 당시 조선에 들어와 있던 일본 프로기사들은 누구였고 그들의 바둑활동은 어떤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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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pan |  2010-03-18 오전 1:01:2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일본의 바둑이라..한창 배웠던 시절이 있었죠..  
자객행 |  2010-03-18 오전 7:11:31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奬學]
오늘의 사람이 내일의 사람을 위해 줄수 있는 최고의 선물.  
AKARI 와~댓글이 넘 멋있네요..오늘의 사람이 내일의 사람에게...
AKARI |  2010-03-18 오전 8:44:3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곧 비가 올 듯(雨勢將作).

날씨 표현을 한자로 한것..
왠지 신선하게 재미있네요...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도살자 |  2010-03-18 오전 10:44:56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woaldlTrp wkfdlrdjTtmqslek.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박국에서 뵙시다.  
돼지곱창 |  2010-03-18 오전 10:53:56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일수기가 오늘날 기원1급(인터네 바둑 5~6단) 정도의 실력인가요? 삼수기는 3급?  
테크노홍 |  2010-03-18 오전 11:59:02  [동감1]  이 의견에 한마디
일기내용이 갈수록 궁금합니다 지나간 세월을 거꾸로 올라가서 그시대의 생활사를 엿볼수가 있어서 재미가 있읍니다 다만삼일치만 연재되니 감칠납니다 번역하시는분고충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독자생각만 해서 미안합니다 강령하십시요
 
알프스소년 |  2010-03-18 오후 4:29:5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저는 일본 바둑입니다. 일본책으로 배웠으니...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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