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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저승사자의 시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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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저승사자의 시말서
2003-01-16     프린트스크랩
염라대왕 노릇 3794년 만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과연 이놈들을 지옥에 입주(入住) 시키는 게 합당할까, 만약 합당하다면 형량(刑量)은 얼마씩을 때려 어디다 배치해야할까. 잽싸게 지옥판 인터넷 사이트를 다 뒤져 판례(判例)를 찾아 보았건만 전혀 비슷한 게 없었다. "제기랄!" 대왕은 투덜거리며 조금 전 끌려와 엎드려있는 세 녀석의 몰골을 다시 한번 훑었다. 동양 한 구석에 붙은 한국이란 나라에서 잡혀왔다는 세 놈은 공포감과 억울함으로 범벅이 된 채였다.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그들을 내려놓은 저승사자는 한꺼번에 세 건이나 실적을 올렸다는 사실에 자못 의기양양해 있었다.

세 놈이 죽은 사연부터 희한했다. 그들은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하지만 살던 층 수는 7층과 8층, 9층으로 각각 달랐다. 그리고 같은 장소에 모여있지 않았었는데도 한 날 한시에 목숨을 잃었다. 물론 아파트에 불이 났다거나 하면 '단체 손님'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건 그런 케이스도 아니었다. 염라대왕은 대청 마루에 걸린 괘종 시계를 힐끗 살폈다. 천상(天上) 골프 대회 티 오프 시간이 다 돼가고 있었다. 요즘 캐디 아르바이트 하러 나오는 예쁜 천사들이 많던데... 그는 하필 이 중요한 시간에 골치 아픈 사자(死者)들을 셋이나 잡아온 저승사자를 잡아 먹을 듯 째려보았다.

708호 남자는 바둑 광(狂)이었다. 그날 직장에 거짓말까지 하고 일찍 퇴근한 것은, 8강까지 진출해있는 인터넷 바둑 대회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도대체 사무실에선 눈치가 보여 바둑 한 판 오붓이 둘 수 없단 말이야. 708호 남자는 역도 선수 출신답게 우람한 손길로 초인종을 눌렀다. 한참 만에 문을 열어준 마누라의 표정이 전에 없이 복잡했고, 그 밑으로 웬 낯선 남자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우리집에 도둑이? 그는 집안을 샅샅이 뒤지다가 베란다 바깥쪽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남자 손목 한 쌍을 발견했다. 그 임자가 도둑놈일 것이라고 확신한708호 남자는 양쪽 손 모두를 두 발로 질끈 밟아버렸다.

그런 뒤 베란다 밑을 내려다보니, 비명소리와 함께 추락하던 그 녀석이 1층 정원의 나뭇가지를 잡은 채 또 한번 대롱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어두워서 누군지는 식별할 수 없었다. 화가 치민 7층 남자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손에 잡히는 대로 냉장고를 번쩍 들어다 다시 그 녀석을 향해 내던졌다. 냉장고는 목표물에 명중했지만, 그걸 들어서 내던지는 순간 냉장고 줄에 엉켜있던 전선에 자신의 발이 걸렸다. 중심을 잃은 708호 남자도 베란다 난간을 지나 1층으로 떨어져 즉사했다.






808호 남자는 더욱 극성스런 바둑 광이었다. 앞으로 두 번만 더 지면 708호 남자에게 2점으로 올라갈 판이어서, 그는 그날 베란다 의자에 앉아 기를 쓰고 바둑 책을 탐독 중이었다. 일본 초1류 프로들의 실전보였는데 그 내용이 마침 서부활극 보다도 흥미진진했다. [장면도] 백 1에 흑이 2로 갖다붙였다. 뭔가 짜릿하지 않은가! 평범하게 [1도] 흑 1로 받는 것은 백 2 다음 A, B 두 곳에 단점이 남아 흑 불만이다. 8층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신이 난 김에 난간을 넘어 선 채 바둑 책에 빨려들어갔다.

   
   

백은 어떻게 받아야할까. [2도] 1은 흑 2 이하 8까지 신나게 몰아친다. 백 A, 흑 B까지 싸바르니 이건 거의 환상이다. 그렇다고 [3도] 백 1로 부딪는 것은 4까지 진행된 뒤 A의 절단과 B의 축을 맞봐 더욱 낭패. 백은 할 수없이 [4도] 1로 이었지만 흑 2로 터를 잡으며 하변 백을 공격해간다. 8층 남자는 멋진 장면을 보면 참지 못하고 몸을 흔들어야만 하는 열혈남아였다. 그는 자신의 현재 입지(立地)를 새카맣게 잊은 채 손뼉을 치며 발을 굴렀다. 아뿔싸!

실족한 808호 남자는 천행으로 7층 베란다 바깥 벽을 잡았다. 왕년의 기계체조 선수다운 순발력이었다. 아, 이제는 살았다고 느끼는 순간, 간신히 지탱하던 양손을 누군가의 구둣발이 힘껏 밟아버렸다. 그는 어쩔 수없이 한 때 멈췄던 추락을 다시 계속했다. 기계체조 후예의 순발력은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기적적으로 1층 정원수 나뭇가지 한 자락을 움켜 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횡액인가. 그 순간 무언가 엄청난 쇳덩어리가 위에서 떨어졌고, 그 순간 8층 남자는 즉사했다. 비록 피하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그 물체는 냉장고인 것 같다는 게 순발력 좋은 기계체조 선수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908호 남자는 바둑을 배운지 반년이 채 안됐건만 그 무렵 세상 만물이 온통 바둑돌로 보일 만큼 한창 빠져있었다. 누구건 자신의 바둑 상대만 돼 준다면 무슨 짓도 못할 게 없는 단계였다. 그날 엘리베이터에서 708호 아줌마를 만났을 때, 그는 앞 뒤 재지않고 물었다.
"윤형 들어오셨습니까?"
"아직 퇴근하려면 멀었어요."
"아, 네. 들어왔으면 바둑을 좀 배우려고 했는데..."
"저하고 비슷한 수준이시더군요." 그녀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언젠가 동네 주민들끼리의 바둑 모임 때 908호 남자의 바둑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실 이건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바둑이 좋기로서니 외간 남녀가 밀폐된 한 공간에 단 둘이 마주 앉는다는 게 될 일인가. 하지만 그 때는, 특히 908호 사나이로선 바둑 외엔 세상에 보이는 게 없는 상황이었다. 708호 집 마루에서 908호 남자가 첫 판을 져서 열을 좀 받은 채로 두번 째 판을 막 시작하려할 때였다.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났다. 순간 708호 여자가 "어머, 그이가 온 모양이에요."하고 외쳤고, 908호 남자는 뭐 큰 죄를 진 것도 없건만 당황한 나머지 숨을 데를 찾았다. 그가 찾아낸 피난처는 냉장고였다. 그 물체는 잠시 후 통채로 들려지더니, 그 직후 정신없이 추락했고 그 뒤론 기억이 없다.

염라대왕 앞에서 세 명의 남자는 방방 떴다. 왜 자신이 죽어야 하느냐는 거였다. 게다가 천당도 아닌 지옥이라니. 셋은 여차하면 지옥이고 뭐고 확 뒤엎어 버리겠다는 기세였다. 대왕은 "이제 이 짓도 못해먹겠군."하는 심정으로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예전엔 아무리 억울하게 죽은 자라해도 이런 식으로 대들지는 않았었다. 은밀히 다가와서 봉투 내미는 놈, 묘한 몸짓과 웃음으로 애교떠는 년... 등 만 보아온 염라대왕은 기가 막혔다. 이승에 만연된 젊은이들의 당돌한 풍조가 어느 새 저승까지 전염되고 있었다.

염라대왕은 천천히 업경(業鏡)을 꺼냈다. 잡혀온 자를 비춰보면 그가 생전 인간 사회에서 지은 죄가 모두 나타나는, 일종의 거울 같은 것이다. 백이면 아흔 아홉 놈은 자기 죄를 다 털어놓지 않다가, 업경에 나타나면 그제서야 실토한다. 역시 인간 세태의 반영인지 지옥까지 끌려와서도 "기억에 없다."며 끝가지 오리발 내미는 자들도 적지않다. 심문은 더 이상 비춰지는 죄가 없을 때 끝난다. 그리곤 염라대왕이 죄상을 적은 두루마리를 저울에 달고, 그 무게에 따라 죽은 자를 보낼 지옥을 정하게 돼있다.

업경에 비춘 결과 708호 남자는 가벼운 사기(詐欺) 경력이 나왔다. 808호는 세컨드 소생의 아들을 숨겨 키우고 있음이 들통났고, 908호 남자는 곤드레로 취해서 운전을 하다가 멀쩡한 사람에게 중상을 입혔던 전과가 밝혀졌다. 하지만 그 정도라면 셋 모두 죽을 죄까지는 아니다. 저승사자 녀석이 실적 부진을 추궁당한 뒤 마구잡이 입건에 나선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방(房)도 마땅치 않았다. 8열(八熱) ·8한(八寒)에 16유증(遊增)의 넉넉한 수용 시설을 자랑해온 지옥도 요즘은 초만원이다. 그래서 증축(增築)에 들어갔지만 아직은 이런 송사리들까지 받아들일 곳이 없다.

염라대왕은 다시 한번 시계를 보았다. 그리곤 결심한 표정으로 골프 가방을 둘러메더니 서둘러 판결을 내렸다. "708호, 808호, 908호 남자는 다시 인간 세계로 복귀할 것을 명한다." 세 남자가 환호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엔 누군가 (또는 무언가)에게 대신 죄를 물어야하는 것이 천상(天上) 세계의 규칙이다. 지옥까지 잡혀갔던 사람을 되풀어 주는 건 일종의 행정 실수이므로, 저승사자는 그 일련의 과정에서 대신 책임을 물을 대상을 찾아내 염라대왕에게 추후 보고토록 돼 있었다. 저승사자는 시커먼 입술이 댓발이나 나온 채, 휘파람 불며 필드로 나서는 염라대왕 등 뒤에서 쉴 새없이 투덜거렸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마친 서봉숙 양이 방긋 웃었다. 만방기원을 메운 기객들이 얘기를 계속하라고 아우성치자 봉숙이 말했다. "저도 여기까지 밖에 못 들었어요. 원래 이 이야기의 뼈대는 인터넷 유머 난에 나왔던 거라던데... 어쨌든 세 명 모두 살아서 돌아왔으니 잘됐죠 뭐. 그나 저나 저도 뒷 얘기가 궁금해요. 저승사자는 세 남자를 살려보내는 대신 과연 어떤 대상을 새로운 범인으로 시말서에 올렸을까요?" 이렇게 해서 만방기원 사람들은 때아닌 '아파트 세 남자 연쇄 추락 사건'의 배심원이 됐다.

"아, 그야 당연히 708호 여자가 책임을 져야지."하고 앙칼지게 외친 것은 생불여사였다. 하긴 그녀가 908호 남자를 집안에 끌어들이면서 3명이 차례로 죽는 연쇄 사건이 발생했다. 생불여사는 젊고 매력적인 여성들에겐 맹목적 적대감을 갖고있다. 그 순간 김대박이 나섰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요. 바로 아파트가 문젭니다. 셋 모두 떨어져 죽었잖아요?" 그는 일반 주택에 살았더라면 전혀 벌어지지 않을 사건임을 강조하면서 아파트 유죄론을 폈다. 김대박은 언젠가 서울 근교의 어느 아파트에 투자했다가 왕창 손해를 본 뒤부터 아파트에 영 감정이 좋지않다.

"냉장고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 써야한다."는 주장을 편 것은 평소 찬 음식은 입에도 대지않는 현직 의사 허기진이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면 사실 꽤 그럴듯 하다. 냉장고만 아니었다면 9층 남자가 그 속에 숨어 들어가지도, 7층 남자가 그걸 던지다가 줄에 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8층 남자는 1층에서 정원수를 잡아 일단 살아났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추락사가 아니라 냉장고에 의해 타살(打殺)된 것이다. 그 칼같은(?) 논리에 감명받은 오나랑 양이 박수를 쳤다.

듣고만 있던 구경만 선생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내 생각엔바둑이 유죄 아닌가? 셋 모두 바둑을 몰랐더라면 황천 구경을 할 필요가 없었구만." 그것도 그렇다. 변덕수가 갑자기 코를 벌름거렸다. 자신의 입장에서도 바둑과 인생과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바둑 때문에 난생 처음 연애도 해봤고, 실연도 경험했고, 또 다른 만남도 얻은 것이다. 하지만 30년 이상 기원을 생활 터전으로 지켜온 오만방 원장만은 바둑이 세 남자 사망 사건의 발단이 될 수 없다며 혈압을 높였다.

끝으로 제갈길은 만유인력(萬有引力)을 주범으로 지목했다. 역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다운 학구적 분석이었다. 과연 이 사건의 모든 현상은 인력(引力)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세 명의 남자를 죽음으로 이끌 정도로 인간을 매료시키는 바둑, 708호 여자의 908호 남자에 대한 유인, 그리고 세 남자와 냉장고가 대책없이 추락할 수 밖에 없었던 뉴턴의 운동법칙까지. 끈덕진 접근끝에 이제는 약혼녀로 만든 오나랑 양을 힐끗 훔쳐보던 성희룡은 속으로 "이게 정답이다."라고 외쳤다.

그날 만방기원 배심원 회의에선 어떤 결론도 얻지 못했다. 세 남자가 이승으로 다시 돌아올 때 그들은 어떤 저승 발(發) 교통편을 이용했을까. 셋은 한 층 간격의 같은 아파트 주민으로 되돌아갔을까. 그랬다면 예전처럼 또 다시 바둑 두고 어울렸을까. 그나 저나 708호 아줌마는 어찌됐을까. 떼죽음 장례식 준비하다가 환생해 온 세 남자를 보고 기절하지는 않았을까... 만방기원 사람들은 침묵한 채 제각기 상상(想像)의 날개를 폈다.

하지만 그 중에 저승사자를 떠 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죽어서 잡혀온 세 남자가 자해 공갈단처럼 방방 뜨는 바람에, 그리고 그 여우같은 천사 캐디들에게 홀린 염라대왕이 깊은 숙고없이 그들을 풀어준 바람에, 모처럼 올린 세 건의 실적을 아쉽게 놓친 저승사자는 어둡고 음습한 지옥 구석방에서 혼자 투덜거리며 한창 시말서를 쓰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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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돌 |  2005-01-12 오후 8:52: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너무 황당하고 당황해서.......글 쓰시는 분, 누군지 정말 궁금하네요 ㅋㅋ암튼 글 읽는 동안 너무 재미있었어요.  
soul0307 |  2006-01-11 오후 1:24: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미소도 띄었다가, 또 반성도해보고 그랬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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