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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가지 않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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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가지 않은 길
2002-12-02     프린트스크랩
절친한 친구이자 동창생인 최박사의 부음(訃音)은 허기진(許基鎭)에겐 큰 충격이었다. 내과 의사로 특히 결핵 방면에 권위를 인정받던 최박사는 아이러니칼하게도 말기 결핵에 시달려 왔었다. 많은 환자들을 진료해 온 그가 감염 사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병세가 상당히 진척된 상태였다고 했다. 설마하니 평생 다스려 온 결핵균에 자신이 당하리라고는 생각치 못했을 것이다. 건장한 자신의 몸을 지나치게 과신한 것이야말로 인생의 패착이었다.

허기진은 진료실 책상 위에 놓인 자신의 명패(名牌)를 새삼스런 느낌으로 바라보았다. '피부비뇨기과 전문의(專門醫) 허기진'. 그 옛날 의과대학을 졸업할 무렵 전공할 과(科)에 대한 선택을 놓고 얼마나 갈등했었던가. 내과는 가장 오소독스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내키지 않았다. 피부비뇨기과가 성병 치료나 하는 곳으로 치부되는 일반의 인식을 바꾸겠다는 야심도 있었다. 최박사는 최박사대로 산부인과와 내과를 놓고 고심을 거듭했다. 둘은 전공 결정 바로 전날까지 사흘 밤, 사흘 낮을 붙어 지내며 술을 펐더랬다.

그 친구가 만약 내과를 택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까. 그와 내가 전공을 바꿔 선택했다면 오늘의 결과 또한 거꾸로 되었을까. 그는 친구의 빈소를 향해 차를 몰면서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의문은 항상 사람들을 미혹(迷惑)의 수렁으로 몰아넣는다.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해답으로 하여 사람들은 언제나 답답함과 무력감으로 몸을 떨곤 한다.

결혼만 해도 그랬다. 아내의 그 낙천적 기질과 건강미를 허기진은 사랑한다. 집안이 항상 활기에 넘치고 2세가 튼튼한 것도 모두 아내의 덕이다. 하지만 과연 그 선택이 최선이었을까. 허기진은 자신있게 답하지 못한다. 결혼을 한 뒤에야 그는 가정 주부에게 필요한 덕목이 낙천성과 건강함만이 아님을 깨달았던 것이다. 딸 영심이가 두 돌이 갓 지난 무렵이었으니까 결혼 3년차 쯤 됐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출근을 서둘던 허기진을 향해 아내가 갑자기 와이셔츠를 들이대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 나 좀 봐요. 여기 묻은 루즈 이거 어디서 묻혀온 거에요?"
"루즈가 거기 왜 묻어. 아, 어제 병원 결재 서류 도장찍은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인주(印朱)가 묻었구만."
"이게 루즈 아니라구요?"
"허, 그 사람 참. 내가 히포크라테스에게 선서까지 한 사람이야. 그러지 마."
"뭐? 히프 크다…그 년 어떤 년이야. 히프가 얼마나 크길래 선서까지 하고 다녀요. 나도 학교 다닐 때 테스 정도는 읽었다구. 뭐하는 년이에요, 도대체."
"그게 아니고, 의사라니까…."
"흥, 동업자군요. 병원에서 눈이 맞은 모양이네. 어쩜 세상에. 아유 분해."

당대의 의성(醫聖)이 느닷없이 히프 큰 아가씨로 둔갑한 것은 전혀 허기진의 죄가 아니었다. 그러고보니 히포크라테스 영감님 자신도 이런 경우를 예비했던 듯, 멋진 말을 남겼다. 흔히 인용되는 양생훈(養生訓)의 한 구절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기회는 순식간에 사라지며, 실험은 불확실하고 판단은 언제나 어렵다.(Life is short, art is long. Opportunity fleeting. Experiment uncertain, & judgement difficult.)―

과연 죽마고우 최군은 짧은 인생이지만 훌륭한 인술(仁術)을 남기고 갔고, 세상사 모든 일 선택의 기로에서 찬스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지 않던가. 인생도 바둑도 검증이란 불가능하고, 그래서 세상에 확실하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허기진은 친구의 애석한 죽음, 그리고 미래의 안개 속 같은 불확실함에 전율하며 그날 상가(喪家)에서 밤 새 통음했다.

바둑 꾼 들에게 바둑은 피로 회복제 겸 진통제의 구실도 한다. 파김치가 된 상태에서도 허기진은 이튿날 오후 만방기원을 들렀다. 다시 상가를 찾기 전 울적한 기분을 추스리기 위함이었다. 기원은 언제나 처럼 평온함 속에서도 왁자지껄 했다. 필생의 라이벌 변덕수와 성희룡이 막 한 판을 끝낸 듯, 열띤 복기(復棋)가 벌어지고 있었다. 사생 결단의 사랑싸움 와중에서도 바둑은 그냥 바둑이란 뜻인가. 과연 기도(棋道)정신에 살고 죽는 젊은이들이었다.

"저 친구들 또 시작이군." 구경만 선생의 한 마디에 모두가 미소를 머금는다.
"왜 사람들은 진 바둑에 대해선 단 한번의 예외도 없이 후회하는 걸까요?"(제갈길)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 동경, 뭐 그런 거겠지요."(허기진)
"인생살이하고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몰라. 뒤돌아보면 내게도 꽤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오원장)
"그래도 인생의 길은 많아야 10개 미만 아닙니까? 주식이냐, 부동산이냐, 아니면 하다못해 내기 바둑이냐의 정도인데, 바둑은 흑이 제1착을 둘 수 있는 선택이 무려 361개나 되니…."(김대박)

허기진은 얼마 뒤 기원 문을 나섰다. 상가까지 가는 데 어느 길이 가장 덜 막힐까. 그는 차에 오르면서 올림픽대로와 강북강변로, 로컬 도로 3가지를 놓고 잠시 고민했다. 저녁을 먹고 가는 것과 그냥 가는 것 중 어느 쪽이 좋을지, 내일 장지(葬地)엔 내 차와 장례 차량 중 어느 것을 타고가야 할지도 쉽게 결론이 안 섰다. 아무리 날고 뛰는 슈퍼맨일지라도 인간이 동시에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뿐이란 사실에 허기진은 뜻 모를 비애감에 빠져들었다.

빈소(殯所)는 어제와 달리 꽤 붐볐다. 의과대학 동창회라도 연 것 같았다. 실로 몇 년만에 얼굴을 마주치는 옛 학우들. 친구는 죽어서 또 다른 친구들끼리의 만남의 자리를 마련해주고 있었다. 빈소야 말로 참 묘한 곳이다. 죽은 사람의 영정 앞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은 서로의 건강을 걱정해주고,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래 오래 살자고 교감을 나누는 기묘한 현장이다. 내일 어찌될지라도 오늘 남의 불행은 나의 안전함을 확인시켜주는 거울같은 것이다.

대화를 주고 받는 패, 소주 판을 벌린 패, 화투짝을 돌리는 패 등 영안실의 광경은 다양했다. 그 틈으로 바둑 판의 한 모서리가 삐죽이 보였다. 그랬지. 허기진은 그 옛날 학창 시절을 떠 올리며 미소지었다. 바둑은 당시 그들의 중요한 경쟁 과목 중 하나였다.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찼던 의대생들은 바둑으로도 남에게 지지않으려 했다. 그들은 금쪽같은 수업 시간을 빼먹는 아픔을 감수하며 오로지 이 나라의 기도(棋道) 발전을 위해 밤낮으로 헌신했다. 학교 입구 기원이건, 교정 잔디 위건, 때로는 실험실까지도 그들의 숭고한 정신에 감읍한 듯 장소를 열어주곤 했었다.

방귀봉(方貴奉)과 성기두(成耆斗)가 막 한 판 끝낸 모양이다. 방귀 소리가 항상 우렁찼던 귀봉은 운명이었던지 항문외과 개업의로 명성을 날리고 있고, 성기두(性器頭)의 순 우리말인 무슨 '대가리'로 통하던 기두는 확대술(擴大術)의 대가로 군림 중이다. 한 판이 끝나면 진 쪽에서 군시렁거리고 불평하는 것이 이들 라이벌 커플의 오랜 습관이다. 과연 오늘도 꽤나 시끄럽다.

백을 쥔 귀봉이 이긴 모양이다. 허기진이 가까이 다가가 보니 [1도]가 놓여져 있었다. 흑이 1로 뛰어들었다가 백2의 공격을 당해 망한 모양이었다. "흑1로 'A'에 두어 삭감했으면 집이 많은 흑의 낙승이었어. 이 방귀 뽕같은 자식아." "그 자식 참... 그럼 그렇게 두지 왜 딴 전을 피웠냐, 이 X대가리야." 방귀봉이 지지않고 이죽거린다.



그 순간 얌전히 앉아있던 방사선과 전문의 백광선(白光善)이 말없이 [2도]를 늘어놔 보인다. 백2로 퇴로를 차단하면 7까지, 이건 백의 좌변 세력이 완전히 무너진 모습이다. "햐! 그거 괜찮은 수네." 방귀봉이 탄성을 질렀지만, 사실 이 그림은 문제가 있다. 흑 1에 백이 2로 바짝 막아서지 않고 A 쯤에 두어 B와 5의 씌움을 맞보면 어쩔 것인가.
허기진의 이같은 지적은 그러나 얼마 더 버티지 못했다. 대학 시절 의과대학 대표 선수를 지냈던 마취과의(醫) 최강수(崔强洙)가 [3도]를 늘어놓은 것이다. 백2는 9까지 되끊겨서 한 마디로 좀 위험하다는 것. 그는 [4도] 백2에 붙여가는 변화를 보여준 뒤, 이건 흑도 진짜 곤란하므로 [5도] 3으로 물러나는 정도로 보인다고 결론지었다.



붙임수가 결정판이겠군. 오청원 선생이 와도 다른 수는 없겠어. 모두가 감탄하자 최강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지. 더 좋은 수가 있을지도. 아니, 아마 분명히 있을꺼야. 바둑에서 '이 한 수'라고 단언할 수 있는 장면은 제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 해도 드문 법이지." 아닌게 아니라 대마 수상전 같은 극히 제한된 경우를 빼면 '절대수'란 신(神)의 영역이다. 허기진은 갑자기 자신이 견딜 수 없도록 초라하게 느껴졌다. 산에 묻어둔 보물을 캐러 수십명의 배테랑 형사들과 함께 나서 샅샅이 뒤졌는데도 끝내 찾지 못하고 빈 손으로 내려오는 기분이었다.

바둑이야 그래도 복기(復棋)를 통해 최선으로의 접근이 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순간 순간이 선택의 연속인 인간 사회 세상사는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오직 한가지 길 외엔 동시 선택이 불가능하고, 그나마 그 것이 최선이었는지의 여부 또한 훗날에도 알아낼 방법이 없다.
"그렇담 뭐야, 열심히 일한다는 것, 최선을 다해 산다는 것 모두가 의미 없다는 말이 되잖아." 소주잔을 털어넣으며 방귀봉이 투덜거리자 성기두가 빙글거리며 되받는다. "아, 자네의 경우엔 정답이 나와있지. 이 순간 칵 죽어버리는 게 아마도 최선일꺼야."

허기진은 죽은 최박사와 그 옛날 캠퍼스 언덕에서 바둑 두던 추억을 되살렸다. 허기진보다 약 반점 쯤 약했던 그는 결정적 장면에서 삐끗할 때면 어김없이 한 수 물러달라고 떼를 쓰곤 했다.
"야, 너 앞으로 의사된 뒤에도 환자 죽여놓고 배 새로 쨀꺼야?"
"제길. 히포크라테스 영감도 실험을 자주 하라고 했잖여."
"무르는 게 실험하고 무슨 관계가 있냐?"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반복 탐험이지. 인생은 무를 수 없지만 바둑은 그게 가능하잖아?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의 길을 갈 수 있나 그걸 규명해보려고 그런다. 짜식 쫀쫀하기는..."

의사들이 종종 자신이 전공한 분야의 질병으로 죽는 아이러니는 사실 별반 이상할 게 없다. 병원체(病原體)에 항상 노출되기 때문이다. 최박사가 지난 날 내과 대신 외과를 택했더라면 오늘의 이 비극은 없었을지 모른다.
소줏잔이 오가면서 떠들썩하던 테이블이 한 순간 갑자기 조용해졌다. 허기진이 눈시울이 벌개진 채 속삭이듯,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것은 고인이 생전 애송하던 시(詩)였다. 검은 테 두른 영정(影幀) 속에서 최박사는 정들었던 옛 동창생들을 향해 밝게 웃고있었다. 방귀봉과 성기두와 최강수들은 하던 동작을 멈추고 숙연한 자세로 귀를 기울였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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