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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날 책임 지겠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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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날 책임 지겠다구요?
2002-11-15     프린트스크랩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유치환 ‘파도’ 전문>


노총각 변덕수와 성희룡은 요즘 입술이 바짝 바짝 타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한달 남짓 뒤 면 똑같이 우리 나이로 서른 셋. 나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나랑 양의 마음만 얻을 수 있다면, 그녀를 내 삼촌의 조카 며느리로 삼을 수만 있다면, 까짓 40이 넘으면 어떻고 50이 넘은들 어떠랴. 하지만 이 신체 건장한 두 대한민국 건아들의 끈덕진 쌍갈래 파도에도 그녀는 무슨 거대한 대륙인 양 여전히 꿈쩍도 않고 있었다.

만방기원 오만방 원장의 외동 딸 오나랑 양을 둘러싼 둘 간의 투쟁사(史)는 벌써 1년도 넘는다. 나랑이 고것이 속 마음을 열어보이지 않는 통에 형세는 아직도 오리무중이지만, 덕수와 희룡은 피차 한 가지 점에서만은 암묵적으로 의견 통일을 보고 있다. 나랑에게 자신들을 물 먹일 제3의 남자는 없다는 확신이 그 것이다. 그럴수록 둘은 서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대를 격침시켜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감에 몸부림치곤 했다.

돌이켜보면 둘의 사랑 쟁탈전은 온갖 묘수와 악수, 역전과 반전, 그리고 기기묘묘한 바둑의 전략이 총 동원되다시피 한 싸움이었다. 한 판의 바둑에 비유한다면 초반은 완전히 변덕수의 페이스였다. 아니, 뭐 페이스랄 것도 없겠다. 지난 해 봄, 그는 성희룡보다 석 달이나 먼저 만방기원에 첫 발을 들여놓았었으니까. 성희룡으로선 사실 몇 점을 접어준 접바둑 만큼이나 핸디캡을 안고 출발한 셈이었다.

당시 변덕수는 만방기원에 들어설 때마다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기분이었다. 아흐!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상큼히 미소지어주던 나랑의 그 뇌쇄적 미소. 그녀는 더 없이 싹싹했고 친절했다. 그 때만해도 덕수는 신용금고회사에 근무하던 전도 유망한 샐러리맨이었다. 되먹지않은 상사와 대판 싸우고 나오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기업자(棄業者) 신세도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자신의 바둑을 전면 포기하고, 갓 입문한 나랑 양에게 헌신적으로 바둑을 가르쳤더랬다.

그로부터 석달 뒤 만방기원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성희룡이야 말로 변덕수의 입장에선 사탄이요, 악령이며, 훼방꾼이고, 새치기 족이었다. 녀석은 누가 첨단 기업 사원 아니랄까봐서 와이셔츠 깃도, 멋지게 벗어넘긴 머리칼도 모두가 빳빳했다. 심지어 기료 계산할 때 지갑에서 꺼내는 1만원권 조차 빳빳할 때가 많았다. “짜식이, 그딴거 빳빳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냐.” 변덕수는 속으로 중얼거리곤 했으나 성희룡은 무서운 속도로 오나랑 양에 접근해 갔다.


불과 한 달이 못돼 형세가 역전됐다. 성희룡이 먼저 나랑 양과 함께 영화도 보고 저녁도 같이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무릇 여성이란 선심과 분위기에 약한 법. 그는 봉급을 박박 긁다시피 해서 나랑에게 물량 공세를 폈다. 잔잔한 음악이 온 몸을 휘감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목소리 깐 채 썰도 풀었다. 바둑으로 말하자면 두터운 포석이었다. 그 무렵부터 나랑이 두르고 다니기 시작한 옥색 스카프, 멋진 장식이 달린 명품 손지갑도 성희룡의 진상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거야 말로 선작오십가자필패(先作五十家者必敗) 꼴이었다. 역전을 감지하고도 구경만 하고있을 변덕수가 아니다. 그는 호시침침 기회를 엿보는 한편 후방을 치기로 했다. 오만방 원장과 나죽자 여사, 즉 나랑 양이 세상을 구경하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했던 양친 공략에 나선 것이다. 아무리 민주화에다 서구화까지 이룬 세상이라지만 이 땅의 부모들은 아직도 사위감 선택에 있어 막강한 지분을 쥐고 있다. 덕수로선 가위 성동격서(聲東擊西)에다 도남의재북(圖南意在北) 전법을 택한 셈이었다.



















바둑은 강한데 연애론엔 기초가 쑥맥인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그림이 [장면 1도]다. 고단자들의 실전 기보로, 흑이 △로 끊어온 것은 이 쪽 처리 여하에 따라 흑□를 둘러싼 중앙 공방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뜻이다. 백의 입장에서도 [1도]는 우변이 엷어 중원에서 힘을 쓰기 힘들다. [2도]가 실전 진행. 우하귀를 버린 손해가 크지만 대신 중앙 빵때림을 얻었다. 놀기는 오른 쪽에서 놀았으되 마음은 어복에 있더라... 하는 게 바로 성동격서 아닌가.

덕수는 그날부터 기원에 들어설 때는 하다못해 군밤 보따리라도 사다가 생불여사에게 안겨드리곤 했다. 손님이 입장하면 벌떡 일어나 “어서 오세요”를 외쳐댔고, 뜨내기들은 자리를 뜰 때 변덕수를 원장으로 알고 기료(棋料)를 지불하기 일쑤였다. ‘입’도 풀 가동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환심을 사는데는 립 서비스 만큼 효과적인 것도 드물다. 뻔히 아부성 발언이란 걸 알면서도 듣는 사람 입장에선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다. 지난 달 벌어졌던 길 건너 헛수기원과의 친선 교류전 때 변덕수와 오만방 원장 간의 대화 녹취록 일부만 소개하자.

“원장님, 우리 쪽 선수들이 잘 싸우고 있습니다. 저 쪽에 강자가 훨씬 많은데 이것 참 희한한 일이네요.”(변덕수)
“까짓 헛수만 놓는 놈들, 만방으로 보내버리는 거지 뭐. 헛헛.”(오원장)
“맹장(猛將)밑에 약졸(弱卒) 없다는 말은 역시 만고의 진리인 것 같습니다. 원장님의 탁월하신 영도력이 기적을 만들어 낸 모양이에요.”(변덕수)
“허허. 자네 생긴 것에 비해 판단력은 제법이군. 그런데 원래부터 맹장(盲腸) 밑에 약졸이란 건 없다네. 맹장 아랫 쪽에 있는 건 항문하고 대변 뿐이지. 자넨 곱창 배치도(配置圖)에 관해 공부 좀 더 해야겠네.”(오원장)


어쨌건 변덕수와 성희룡의 사랑 쟁탈전은 확전 일로였다. 그것은 마치 인생이란 이름의 한 판 바둑에 승부 패(覇)가 벌어진 형국이었다. 이를테면 [장면 2도] ‘가’의 곳과 같은 대형 패다. 산지 사방 흑 백 돌들의 운명이 이 패의 결과에 따라 판가름난다. 두 남자는 충실하게 팻감을 쓰듯, 연심을 호소하는 편지와 이 메일을 매일 밤 눈에 핏발을 세운 채 경쟁적으로 발송했다. 휴대폰과 컴퓨터 속에 밤 사이 수북히 쌓인 두 사람의 음성 녹음과 이 메일을 지우는 게 매일 아침 일과가 돼버린 나랑은 행복감과 부담감 사이에서 곤혹스러워하곤 했다.


물론 둘 모두에게서 악수(惡手) 팻감도 심심치않게 등장했다. 털털하고 저돌적인 성격의 덕수는 지난 봄 하마터면 몰수패를 선언당할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모름지기 바둑이나 여자나 선치중(先置中) 후행마(後行馬)가 승리의 지름길이라 믿고있는 그는 치밀한 거사 계획까지 세웠으나, ‘안면 치중(顔面 置中)’ 단계에서 엄중 경고를 받고 물러선 일이 있다. 깔끔한 타입인 희룡이 지난 여름 월드컵 대회때 멋진 팻감을 쓰려다가, 본의 아니게 바람둥이로 오해받아 두 달 이상 ‘대화 금지’의 형벌을 감수했던 얘기는 앞서 소개했다.

추석과 추분 다 지나고 찬 바람이 돌면서 두 사람은 더욱 조급해졌다. 잠시라도 방심하다 이 천지대패(天地大覇)를 진다면 만사가 끝나면서 천사는 악마의 품에 안겨버릴 것이다. 둘은 상대방에게 감시의 눈초리를 번뜩이며 웬만한 곳은 붙어 다니다시피 했다. 가위 ‘미생마는 동행하라’였던 셈이다. 누군지는 몰라도 그 기훈(棋訓)을 만든 사람은 바둑 못지않게 연애에도 깊은 조예를 지녔었음이 분명했다.

초조한 것으로 말하자면 변덕수 쪽이 더했다. 자격지심이었을까. 나랑도, 나랑의 부모님도 자신보다는 성희룡에게 더 살갑게 대하는 것 같았다. 하긴 그렇다. 남들 다 직장에 출근하는 아침 시간에 기원으로 직행해 하루 종일 죽치는 자신에게 점수를 더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변덕수는 아무래도 자신이 패를 써야할 차례라고 느끼고 있었다. 뭔가 비상 팻감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한 팻감, 결정적인 딱 한 개의 팻감이 문제였다.

그녀가 만방기원에 등장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한 판의 바둑이 그렇듯 인생에서도 종종 뜻 밖의 변수가 등장한다. 스물 서너살 쯤 됐을까. 세련된 미모는 아니었어도 한국적 구수함을 풍기는 복스런 인상이었다. 서봉숙이라고 했다. 그러고보니 저 유명한 ‘진로배의 사나이’ 서봉수 9단의 분위기와 닮은 데가 있었다. 뜨내기려니 했는데, 뜻 밖에도 오후 서너 시 경이면 어김없이 나와 어느덧 단골 손님이 돼가고 있었다.

그리곤 1주일 쯤 지났을까, 하루는 서봉숙이 변덕수에게 지도 바둑 한 판을 요청해 왔다. 남는 게 시간밖에 없는 사람인데 그거야 뭐 어려우랴. 오직 ‘사랑의 팻감’ 생각만이 머리 속에 꽉 차있던 덕수는 덤덤한 마음으로 응했다. 칫수는 다섯 점. 그녀는 생김새와는 딴 판으로 야무지게 파고 들어왔다. 나랑 양을 석 점은 접을 수 있는 5급 실력이었다.

60여수가 넘어설 무렵, 섬광같은 아이디어가 변덕수의 머리를 때리고 지나갔다. 맞아. 이 여자를 이용하면 결정적인 팻감 하나를 마련할 수 있을지 모른다. 미인계일 수도 있고, 연환계(連環計)일 수도 있는 전략. 덕수는 속으로 무릎을 쳤다. 설렁설렁 판을 메우고 나니 열 일곱 집이나 지고 있었다. “잘 두시네요. 졌으니 제가 차 한 잔 대접할까요?” 덕수의 말에 봉숙은 빙긋이 웃으며 커피 자판기가 놓인 복도 쪽으로 따라 나섰다.

덕수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친구인 성희룡을 위한 자극 요법임을 거듭 강조했다. 변덕수에 의해 성희룡은 변덕수의 둘도 없는 죽마고우로 치장되고 있었다. 그 녀석은 집안 어른들의 독촉으로 빨리 장가를 들어야 할 입장이다. 이 기원 원장 딸을 짝사랑해 온 모양인데, 그녀에겐 장래를 약속한 남자가 따로 있다. 그러니 그 녀석이 빨리 현실을 깨닫고 딴 길을 찾게해 줄 자극이 필요하다...

봉숙은 꽤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세상에! 그렇담 제가 어떤 역할을 해 주길 원하시나요?”
“눈 딱 감고, 오나랑 양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성희룡이에게 한 마디만 해 주세요.”
“뭐라구 말하죠?”
“’지난 번에 저를 책임지겠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이지요?’라고. 그러면 정신이 번쩍 들어 진짜 이루어질 배필 감을 찾아나서게 될 겁니다.”

잠시 침묵하던 봉숙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저도 앞날이 구만리같은 처녀의 몸입니다. 변선생님은 친구를 살려서 좋겠지만, 저는 뭐가 되지요?”
“어려운 부탁인 줄 압니다. 하지만 어쩝니까. 저 친구 그냥 뒀다간 폐인이 될지도 몰라요.”변덕수는 자신의 기막힌 친구 사랑에 도취된 채 눈물까지 찔끔 나왔다.
또 한번 뜸을 들이던 봉숙이 작심한 듯, 낮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좋아요. 해 볼께요. 그런데, 제겐 어떤 보상을 해 주실 작정이세요?”
덕수는 입이 찢어진 채로 말했다. “아, 그거야... 봉숙 씨 신랑감은 내가 책임지고 해결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크흐흐.”

이튿날. 변덕수와 성희룡은 나랑과 봉숙이 대결중인 옆자리에서 한 판 벌이고 있었다. 여자 끼리의 바둑이 막 끝난 참이었다. 서봉숙 양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대각선 자리에 앉은 변덕수를 향해 물었다. “참, 어제 저를 책임지겠다고 하셨지요? 그게 무슨 뜻인가요?”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대사(臺詞)는 정확한데, 무슨 놈의 배우가 번지수를 저렇게도... 덕수는 못 들은 척, 바둑 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봉숙이 다시 말했다. “변선생님, 안들리세요?”
“옛? 제가 어제 뭐라고 했다구요?”
“제가 앞날이 구만리같은 처녀의 몸이라고 했더니 걱정 말라고, 변 선생님이 책임을 지시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한 자리 건너 편에서 바둑을 두고있던 허기진이 쿡쿡 웃었다. 그걸 신호삼아 기원 내 모든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런 낭패할 데가. 덕수는 얼굴이 시뻘개진 채 반박할 기력조차 잃었다. “내가 아니고 성희룡씨일 텐데요”하고 훈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아, 남녀간 사랑의 감정 만큼 미묘한 게 세상에 또 있을까. 서봉숙 그녀야말로 변덕수에게 사랑을 호소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로선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였겠지. 하지만 덕수는 천하의 악수 팻감으로 코끼리보다 더 큰 인생 대마가 몰살하는 느낌에 혼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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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우체국 |  2006-09-30 오후 5:58: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움화하하하...  
중복1 |  2007-11-18 오후 9:03:3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웃겨 미칠뻔 ㅡㅡ; 계속 미만 치지말고 파도 치고 솔도 쳐야되는데 크크
그나저나 서봉숙같은 여자분 ㅠㅠ 저한테도  
신선부 |  2011-01-15 오후 4:56:51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작가님의 재치있고 감칠맛 나는 재미난 글 덕분에 오랫만에 입이 저절로 벌어지내요. 앞으로도 건필하시길 빕니다.  
탕탕평평 |  2011-09-07 오후 6:25:49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정말 재미있는 반전이네요... 이선생님의 글 잘보고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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