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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옥집에도 볕들 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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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옥집에도 볕들 날 있다
2002-11-01     프린트스크랩
오나가나 그놈의 집이 문제였다. 인생살이도, 바둑 판 위에서도 집 없는 것 이상의 설움은 없다. 운동장 크기 평수(坪數)의 아파트를 몇 채씩 가진 채 거들먹거리는 자들도 많지만, 대다수 서민들은 평생 허리가 휘도록 고생해도 '내 집 마련'이 꿈으로만 머문 채 헉헉대며 살고 있다. 집의 불평등은 바둑 판 위에서 더욱 실감난다. 상대방의 토실토실한 대가(大家)에 뼈다귀처럼 달라붙은 채 내 집만 말라버린 경우, 대마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딱 두 눈을 냈는데 그 중 하나는 옥집이어서 생명이 위독한 경우를 어디 한 두 번 당해 보았던가.

오늘 만방기원 분위기는 우울하다. 제갈길(諸葛吉)이 자칫 거리에 나앉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 때문이다. 교편 생활을 하면서 40여년 평생을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착실하게 살아온 우리 시대 소시민의 전형. 줄기차게 실리만을 파는 기풍처럼 인생도 제 갈길만 묵묵히 걸어온 제갈길이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횡액도 바로 내 집 마련의 꿈에서 출발했던 모양이다. 오만방 원장이 한 숨 섞어 전한 사태의 전말은 이랬다.

“경매에 나온 집을 잘 고르면 반 값에 살 수 있다”는 누군가의 귀띔이 발단이었다. 귀가 번쩍 뜨인 제갈길은 앞 뒤 가리지 않고 생전 처음 경매란 것에 참여했다. 낙찰 금액은 4200만원. 제갈길은 계약 기간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집 주인과 싸우다시피 해서 전세금 3000만원을 뽑았다. 몇해 전 믿었던 친구 빚 보증을 잘 못 선 이후 그가 쥐고 있는 전 재산이다. 그리곤 급하게 몇 곳으로부터 고리(高利)로 융자를 얻어냈다. 15평에 방 2개 짜리 연립 주택은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다. 제갈길은 ‘내 집’을 갖게 된데 감격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먼저 살던 세입자가 입찰 전날 소위 선순위(先順位) 채권액을 대위변제(代位辨濟)하고 저당권 말소등기를 신청한 것이 밝혀진 것이다. 원 세입자 임차인에게 2000만원의 전세금을 물어주고 입주하거나, 아니면 낙찰가의 10%인 입찰 보증금 420만원을 포기하는 두 가지 길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살던 전셋집엔 돌아갈 수 없게 돼버렸고, 생돈 420만원을 포기한다 해도 융자금을 변제할 길이 막막해 오도가도 못하게 됐다는 얘기였다.

“내 집은 집이되 내 집이 아니라…. 바둑으로 말하자면 딱 옥집인 셈이군.” 구경만 선생이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기진은 심각한 표정으로, 갑자기 니코틴에 허기져서 못 견디겠다는 듯 내처 담배만 빨아댔다. “거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왜 그렇게 순진하지?”하며 원통해 한 것은 천하의 승부사 킴노박이었다.

변덕수와 성희룡은 말없이 두던 바둑을 계속했다. 사실 집이라면 둘 모두 누구보다 할 얘기가 많은 사람들이다. 선친의 노름 벽으로 몇 차례나 집 문서가 넘어가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이 울면서 짐을 싸던 기억을 갖고 있는 성희룡은 지금도 하숙집 신세를 지고있다. 변덕수는 지난 늦여름 한반도 동쪽 절반을 강타한 태풍 때 가공스런 피해를 입었던 수재민 중 하나다. 지난 추석 때 고향에 내려갔을 때 받았던 엄청난 충격. 몇 대에 걸쳐 지켜온 고향 집 터는 쑥밭이 됐고, 인근에 모셨던 선영마저 제 위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돼 있었다.


바둑은 흑을 쥔 성희룡의 우세로 흘러갔다. [1도] 상대가 계속 밑으로 파고들자 백 돌들은 어쩔 수 없이 중앙을 향했으나 별로 공격 대상이 보이지 않은 채 집 부족 상태가 됐다. 세력이란 이렇게 허망한 것일까. 하지만 자신이 실리를 취할 때면 번번이 상대의 거대한 세력 그물에 걸려 허우적 거리곤 하니 별 일이었다.

“누가 ‘집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허기진이 구경만 선생을 향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인간을 자연적 피해와 사회적 침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건물’. 이것이 사전적인 정의지요.”
“바둑 또한 자기 돌들로 둘러싼 점령 공간을 집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인간생활과 매우 흡사해 보입니다. 선생님의 지금 그 정의가 바둑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까요?”
“그게 참 묘해요. 인간의 주택은 공동적 취락(聚落)을 통한 적절한 사회적 관계가 필수라고 돼 있지. 하지만 바둑에선 한 곳에 붙어있는 두 집은 오히려 잡히고 따로 분리된 두 집이라야만 살 수 있지 않소?”
“그러고보니 2집이 아니라 3집이나 4집도 붙어있으면 못 사는군요. 심지어는 5궁도화나 매화6궁에 이르기까지…. 바둑이 인간 사회의 축소판이라고들 하지만, 그 투쟁의 대상으로 집약되는 집의 기능은 다소 다르다는 점이 꽤 흥미롭습니다.”

출입문 입구 쪽에선 좀 더 현실적이고도 즉물적인 대화가 한창 오가고 있었다. “인간 사회에서 집이라면 재력의 가장 큰 척도인데, 쌍방 수십집 씩 나는 바둑의 계산 단위를 하필 ‘집’이라고 붙인 건 암만봐도 좀 과하단 말씀이야. ‘칸(間)이나 눈(眼) 정도가 적당하지 않았을까.”돈과 ‘한 탕’에 언제나 관심이 많은 킴노박의 주장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무승부 방지용이라지만 ‘반 집’은 또 뭐냐고 그는 흥분했다.

“바둑판 위의 집도 무시할 게 아니던데요. 몇 년 전 일본 천원전에서 류시훈 7단이 고바야시 천원에 3대0으로 이겨 타이틀을 빼앗은 적이 있지요? 그 때 세 판 모두 반집 차로 이겨서 1300만엔의 우승 상금을 받았는데, 우리 돈으로 한 집에 1억원 꼴이더라구요.” 마침 놀러와 있던 아래층 바둑교실 강수만 사범이다. 꼭 결정적일 때는 그가 나서게되니 김대박에겐 이래저래 천적인 모양이다.

바둑 한 집이 사람 사는 집 한 채 값과 맞먹는다면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김대박이 머쓱해있는 사이 우리의 박학다식 원장이 대미를 장식하러 나섰다.
“그보다 더 한 이야기 들려줄까? 1978년 제2기 일본 기성전 도전기 때 얘기로, 후지사와(藤澤秀行) 9단에게 가토(加藤正夫) 9단이 도전했지. 7번기가 3대3으로 마지막 7국까지 갔는데, 그 바둑이 어느 쪽 반집 승인지 판단이 안 설 만큼 미세했어. 검토 기사들이 ‘만약 1집을 1000만엔에 사고 팔 수 있다면 두 기사 모두 사고싶은 심정일 것’이라고 했을 정도였지. 결국 그 판은 후지사와가 반 집을 이겨 4대3으로 우승했고, 4200만엔이란 엄청난 우승 상금을 획득했어. 킴노박 선생, 이래도 바둑의 한 집이 사람 사회의 집 한 채에 비해 보잘 것이 없소?“


성희룡과 변덕수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대국에 열중하고 있다. [2도] 종반을 향해 치닫고 있는 장면. 좌상귀가 이렇게 들어가선 백이 집 부족에 허덕이는 형세다. 이대로라면 도저히 역전은 불가능하고, 이 바둑의 승자는 성희룡이 확실해 보인다. 고심을 거듭하던 변덕수의 뇌리에, 반파(半破)된 채 흙탕물로 온통 뒤덮인 고향 집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건 도저히 집이라곤 말할 수 없는, 그야말로 옥집이란 표현이 딱 어울리는 몰골이었더랬다.

그나 저나 역경에 처한 제갈길을 도울 길은 없을까. 오만방 원장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이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각자 형편에 따라 조금씩이라도 모금을 좀 하자는 얘기, 우선 몇 명이서 제갈길을 찾아가 위로하고 도울 방법을 모색해 보자는 얘기가 나오던 참이었다. 출입 문이 열리고 황천길(黃泉吉)이 들어섰다. 제갈길과 같은 중학에 재직 중인 그는 제갈길을 따라 바둑을 배우겠다며 몇 차례 만방기원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이미 제갈길의 직장 동료들은 모금을 시작했단다. 일부 학생들도 나선 모양이었다. “임시 거처(居處)로 우리 집 건너방을 쓰기로 했습니다. 제갈 선생 가족들이 많이 불편하겠지만 당분간 참아야지 어떡하겠습니까?” 지난 봄 타계한 선친이 쓰시던 방이라고 했다. 두 집안은 워낙 가깝게 지내와 아내와 초등학생 딸들 끼리도 스스럼 없는 사이란다. 제갈길은 만방기원 사람들이 걱정할 것을 우려해 황천길을 만방기원에 들러줄 것을 부탁했던 모양이었다.

“황 선생은 이 담에 늙어 죽더라도 저승 가는 길이 심심치 않겠소. 제갈길 같은 친구가 있으니. 뭣하면 함께 가는 것도 괜찮겠는데?” 황천의 순 우리말은 저승이다. 그의 이름을 빗댄 우스개에 황천길이 지지 않고 받는다. “저도 데리고 가고 싶지만 암만해도 힘들 것 같네요. 살아서도 자기 이름처럼 저렇게 자기 갈 길대로만 살아온 사람이 저승길 간다고 절 따라 나서겠습니까. 하하.”


그 순간 성희룡과 변덕수의 바둑이 벌어지고 있던 한 쪽 구석에서 환성이 일었다. 백이 돌 던지기 일보 직전이던데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일까. 좌상 백이 용케 중앙으로 연결은 해갔지만 전체가 살기 어려운 모습이었는데... 뜨내기 기객들을 포함해 십수명이 우루루 그 바둑을 향해 달려갔다. 바둑 판에는 [3도]가 펼쳐져 있었고, 흑이 B의 곳을 먹여쳐 백이 막 △로 한 점을 따낸 상황이었다. 흑을 쥔 성희룡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문제는 좌변에서 중앙을 거쳐 좌상에 이르는 엄청난 백 대마의 목숨이었다.

확실한 눈은 A의 한 곳 뿐, 나머지 B, C는 모두 옥집이다. 백 D에 놓는 것 역시 집이 안된다. 그렇다면 교과서에서 배운 바 대로라면, 돌 수만 53개에 이르는 이 거대한 공룡은 죽어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잡는단 말인가. 공배를 다 메우더라도 흑은 어느 한 쪽도 단수를 부를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백은 온전한 집 한 개에다 2개의 옥집 뿐인데도 떵떵거리며 살았다는 결론이었다. 이 백이 살아선 흑은 더 해볼 데가 없다.

“우와! 세상에 별 일도 다 있네”라며 허기진이 감탄사를 연발하자 김대박이 “아깝군. 방내기였더라면 백이 무조건 열 방은 건진 셈인데…”라며 혀를 찼다. 강수만 사범은 기보를 떠 놓겠다며 설쳐댔고, 언제 소문을 들었는지 이쇠돌 소년까지 쫓아 올라왔다. 아직 10급의 벽을 허물지 못한 황천길은 몇 번이고 공배를 채워가며 정말 살았는지를 확인했다.

허기진이 말했다. “온전한 집 여섯 채로도 잡히는 판인데, 집 한 채에다 불완전한 집 2개만으로 살 수 있다면 바둑에 대한 기본 개념부터 바꿔야 하는 것 아닐까요?” 구경만 선생이 그 말을 받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툭하면 바둑과 인간 사회를 놓고 견강부회하는 짓은 이제 삼가야 할 것 같아요. 인생에선 절대 그런 일이 없으니까.”

잠시 침묵하던 오만방 원장이 나섰다.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낮고 엄숙한 목소리였다. “젊은 시절 우리 집은 바둑으로 말하자면 반 집도 못됐지만 아쉬움없이 살았었고, 옥집이나 마찬가지인 지금 집에서도 전혀 불편함이 없소. 바둑 또한 오늘 보았듯 옥집만으로 거뜬히 살 수 있지. 심지어는 단 1집도 없는 바둑에서도 지지않는 경우도 있어요. 증거를 보여줄까? 바둑이 인생의 축소판이란 말은 계속 유효해.”


그는 선반에서 케케 묵은 옛날 바둑 소설책 한 권을 빼 내 ‘증거’를 펼쳐 보였다. 바로 [4도]다. 흑 백의 돌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최종 결과는 소위 ‘판 빅’. 전 판의 흑 백이 모조리 비긴 상태이니 쌍방 모두 단 1집도 없는 셈이다. 만방 씨 말대로 이 바둑에 패자는 없다. “바둑이건 인생살이건 집 없다고 좌절할 필요가 전혀 없는 셈이지. 고래등 같은 호화주택 짊어메고 저승가는 부자 놈들 하나도 못봤으니까... 그렇지 않소?” 황천길을 향해 눈을 찡긋하는 오만방 원장의 표정은 어떤 부동산 재벌의 그 것보다도 여유가 넘쳐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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