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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컴퓨터, 뇌출혈로 쓰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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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컴퓨터, 뇌출혈로 쓰러지다
2002-10-01     프린트스크랩
오만방 원장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것은 무엇일까. 마누라? 틀렸다. 아무리 허구헌 날 자신더러 "차라리 죽는게 낫지"를 되뇌이는 생불여사(生佛女史)지만, 그녀는 증오 보다는 그저 공포의 대상일 뿐이다. 만방 씨가 세상 그 무엇보다 미워하는 것은 컴퓨터다. 당장 현실적으로 그 놈의 괴물이 자신의 직업을 얼마나 방해하고 있는가. 인터넷 대국이 확산되기 전인 90년대 중반까지, 손님들로 북적이던 기원을 회상하면 만방 씨는 눈물이 다 찔끔 나올 지경이다.

정서적으로도 컴퓨터는 오 원장의 생리에 맞지 않는다. 도대체 인터넷으로 바둑을 두면 18급이 국수(國手)된다던가? 모름지기 바둑의 재미는 상대의 역경을 즐기는 데 있다고 굳게 믿어 온 오만방 씨였다. 장문이나 회돌이 축 같은 통쾌한 한 수를 두고난 뒤, 썩은 변(便) 색깔로 변한 적의 표정을 살피는 재미를 요새 젊은 놈들은 모른다. 컴퓨터 앞에 혼자 달랑 앉아서 히히덕 거리는 군상들이 그의 눈엔 모조리 미친 놈들처럼 보였다.

그 만방기원 한 구석에 어느 날부터 한 대의 데스크 탑이 척하니 자리 잡았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에 견줄만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어떤 철권 통치자도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거역하지 못하는 것일까. 오 원장으로서도 버틸 만큼 버텼지만 대세에 밀린 셈이었다. 불과 닷새 전, 딸년 나랑이가 주도한 그 민중 봉기의 순간을 떠올리며 만방 씨는 쓴 입맛을 다셨다.

만방 씨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나랑은 코먹은 소리로 말했다.
"아빠, 우리도 컴퓨터 한 대 사요. 응? 인터넷 바둑 두게."
"정신빠진 소리 하덜 마라. 너도 미친 놈 되고 싶냐?"
"아이 참, 아빠. 요새 컴퓨터 없는 집이 어디 있어요. 그러시다가 결국은 사 주실꺼죠? '난 알아요.' 호호.”
"너 갑자기 억양이 왜 그러냐?"
"호호. 서태지가 부른 노래 제목이에요."
"수퇘지가 노래도 불렀어? 하긴 돼지 멱따는 소리 만큼 절절한 노래 가락도 없지."
"아이 참, 수퇘지가 아니고 서태지에요. 서태지."

만방 씨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 저었지만 어째 민심이 심상치 않았다. 입 달린 녀석들마다 한 마디씩들 거들고 나선 것이다. 성희룡이 "계가는 물론이고 중간 형세 판단까지 해주는 사이트도 있더라구요."하며 오 원장의 눈치를 살피자, 허기진은 "입장하자 마자 입맛에 맞는 상대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때는 삼천 궁녀 거느린 의자왕이 된 기분"이라고 했다. "난 어제 밤 집에서 팬티 바람으로 네 판이나 두었어요. 상대방 아이디가 아가씨였던 것 같던데, 이거 오프라인에선 상상이나 할 일입니까?"라며 킬킬거리다가 나랑 양의 눈총을 받은 것은 변덕수였다.

그 날의 만방 씨가 시저(Caesar)였다면 부루터스 역(役)을 맡은 것은 김대박이었다. 그가 "요즘엔 기원들도 컴퓨터 한 대쯤은 모두 갖춰 놓는다"고 전제한 뒤, 마침 친구 사무실에서 교체하기 위해 내놓은 구형(舊型) 컴퓨터 한 대가 있다고 했을 때 군중들은 환호했다. 순간 만방 씨의 뇌리엔 루마니아 차우셰스쿠의 비참한 종말이 떠 올랐다.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다가, 자신의 동상(銅像)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수모끝에 결국은 체포당해 20여년 철혈 통치를 마감했던 독재자. 일단 돈이 안들게 된 것만 해도 어디인가. 혁명군에게 포위된 만방 씨는 컴퓨터 반입을 묵시적으로 승인해 버렸다.
하지만 그 놈의 괴물이 기원 분위기를 그렇게까지 바꿔놓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눈 앞에 멀쩡한 바둑판들이 산처럼 쌓여있는데도 모두가 컴퓨터 앞 자리를 차지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게다가 인터넷 바둑의 장점들 하나 하나가 예외없이 재래식 기원의 단점이란 사실도 기가 막혔다. 만방 씨는 "돌 놓을 때 나무 판 때리는 소리들으며 두어야 제 맛"이라며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그놈의 괴물은 착점음(着點音) 마저 나무 판 뺨치게 낭랑하고도 우렁찬 소리를 쏟아내는 것이었다.

반 평생 한 눈 팔지않고 기원만을 지키며 처 자식 먹여살려 온 만방 씨다. 나름대로는 건전한 레저성 도락으로서 바둑 보급의 한 몫을 맡아왔고, 오늘날 한국이 세계를 제패하는 데도 일조를 했다는 자부심이 그에겐 있었다. 그 터전이 한 아름 크기도 안되는 컴퓨터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만방 씨는 눈에 띠게 풀이 죽어갔었다.


그러나 세상 돌아가는 섭리란 참으로 묘하다. 컴퓨터와 컴퓨터 추종 세력이 며칠 간격으로 동시에 '천벌'을 받은 것이다. 입성 첫 주에 만방기원을 석권해버렸던 괴물은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켰고, 그 괴물 앞에서 충성을 맹세했던 만방기원 '폭도' 중 하나는 고막 파열상을 입었다. 만방 씨가 보기에 이 일련의 부상(負傷) 사건은 어김없는 하늘의 뜻이었다. 기계와 인간이 모조리 다쳤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지난 월요일 아침이었다. 일찌감치 기원에 나타난 변덕수는 오만방 원장과 눈 인사를 마치기 무섭게 컴퓨터 앞에 앉았다. '기업자(棄業者)' 변덕수에겐 누구와의 경쟁도 면제되는 독점적 황금 시간대(時間帶)다. 휘파람을 불며 자신의 ID와 비밀 번호를 쳐 넣자 즉시 접속이 이뤄진다. 대기자 명단에 떠오른 '백수 제왕'을 보며 변덕수는 싱긋 웃는다. 자신의 대화명이다.


오늘은 누구를 혼내줄까. 상대를 고르던 변덕수는 '내추럴V' 3단에 커서를 맞추고 클릭했다. 대화명이 마음에 든다. 내추럴(natural)이라. '자연류'란 뜻이렸다. 한데 막상 바둑을 시작하고 보니 대국 매너에 문제가 많은 친구였다. 인사말부터 생략하는 무례를 범하더니, 중반 초입 무렵엔 물러달라는 요구까지 해 왔다.
[장면 1도] 백이 △에 씌워온 장면. 흑을 쥔 변덕수는 즉각 흑 1에 커서를 맞춰 누른 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쌍립의 급소다. [1도] 백 1에는 다시 2가 급소. 3에 이으면 11(▲의 곳 이음)까지 엄청난 이득을 챙긴다. [1도] 백 3으로 [2도] 백 3에 끊어오면 9까지, 이번엔 선수마저 빼앗은 모습이다.

'무르기 허용'을 켜 놓은 것이 불찰이었다. 잠시 장고하던 녀석이 이 수단들을 읽었던 모양이다. 안면 몰수하고(컴퓨터 바둑에선 이게 문제다. 안면이 안 보이면 마음놓고 비굴해지니까) [장면 1도] 백 △를 '가'에 옮겨놓겠다고 요청해 온 것이다. 변덕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상대방 요구를 들어주었다. 어떻게 두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둑은 뜻 밖의 흐름으로 진행돼 갔다. [장면 2도] 처럼 돼선 필패의 국면. 우하귀 패를 다투다가 좌상 흑을 죽인 것이다. 아까 물러주지 않았더라면 이 흑이 죽는 일은 없었으리란데 생각이 미치자 변덕수는 난생 처음으로 '무름 요청'을 눌렀다. 그런데, 이럴 수가 있는가. 돌아온 대답은 '불허'였다.
그러나 세상사 사필귀정이요, 떼는 떼대로 가는 법이다. 녀석이 막판 기어코 실족을 했다. 그는 차마 또 한번 물러달라는 소리는 못했다. 대신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번엔 '대국 중단'을 요청해 왔다. 다 둔 바둑 이제와서 무효로 처리하자는 제안이다. 변덕수가 매몰차게 거절한 것은 물론이다.

변덕수를 정작 미치게 만든 것은 계가 무렵이었다. 흑을 쥔 변덕수가 사석(死石)을 찍어서 보냈다. 백은 남은 사석을 지정한 뒤 '지정 마침'을 눌러 집 차를 확인하게 돼 있다. 헌데 상대는 4분 가까이를 그냥 버티고 있더니 나가버렸다. 비겁한 자식. 5분이 지나면 자동 시간승이다. 그런데 이 악질이 20여초를 남기고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변덕수는 다시 계가 절차를 밟았고, 또 한참 동안 침묵하던 상대는 나갔다가 또 한번 30초를 남기고 다시 돌아왔다. '대국 중단'을 받아들이지 않은데 대한 의도적인 심술이었다. 내 이 자식을.... 이성을 잃은 변덕수는 더 이상 참지못한 채 데스크 탑 모니터를 향해 재떨이를 날렸다.

모니터에 제대로 맞았더라면 컴퓨터가 그 정도로 중상을 입는 일은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게 빗맞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 사람도 바둑도 다 그렇지만 기계 역시 급소가 있는 모양이다. 컴퓨터는 그 길로 병원에, 아니 서비스센터로 실려갔다. 당황한 변덕수는 기원 사람들에게 "내추럴(natural)이 어떻고..." 하면서 변명하기 바빴다. 이 대목을 오만방 원장이 들은 모양이었다. "올커니, 그 괴물이 뇌출혈을 일으켰단 말이지? 하기사 컴퓨터는 바이러스에도 감염된다 카던데 까짓 뇌출혈 쯤이야. 으하하, 통쾌하다." 컴퓨터의 병명은 그날부터 '뇌출혈'이 돼 버렸다.

두 번 째 사건이 터진 것은 그로부터 꼭 사흘 뒤였다. 이따금 만방기원을 찾는 손님 가운데 안공배(安恭培)군이라고 있었다. 대학 1년생인 그는 바둑을 엄청나게 좋아하면서도 기원엔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주로 집에서 통신 바둑을 즐기기 때문이다. 내성적 성격에 외로움이 짙게 밴 모습이지만 어른들에겐 항상 예절바르던 학생. 그가 모처럼 만방기원을 찾았다가 고막이 터지는 사고를 당했다. 당사자들의 증언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안군의 대국 상대는 제갈길이었다. 다소 급한 성격에 의협심 강한 제갈길에 따르면 안군은 이날 아주 공손한 자세로 바둑을 시작했다. 40대 초반인 제갈길은 안군 나이의 두배 쯤 된다. 바둑 돌도 조심스럽게 갖다놓는 품이, 요즘 세상에 이런 젊은이도 있었나하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바둑이 가열되기 시작하자 안군의 대국 태도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상대가 알아듣기 힘들게 혼자 군시렁대기도 하고, 축 모양이 발생했을 때는 바둑판 위로 축 머리를 짚는 자세를 취하다가 깜짝 놀라 손을 거두기도 했다. 마지막 승부를 가릴 대형 수상전이 펼쳐졌을 때 기어이 사고가 터졌다. 제갈길의 안형(眼形)을 옥집으로 조이면서 안공배 군이 의기양양하게 외친 것이다. "짜샤, 너는 유가무가 불상전도 모르냐!"

순간 공배 군의 왼 쪽 뺨에 불이 번쩍 일었다. 이번에도 빗맞으면서 애꿎게도 그의 고막이 파열됐다. 피를 흘리면서도 공배 군은 즉시 사과했고, 당황한 제갈길은 그를 부축해 병원으로 데려갔다. 만방기원 식구들이 정작 놀란 것은 그날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었다. 도대체 그토록 온순하고 예절바른 청년에게서 어떻게 그런 행동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비밀은 안공배 군의 실토로 밝혀졌다. 그는 하루 밤에 열 판을 넘기는 건 보통인 통신 바둑 광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세상이다. 문제는 그의 대국 습관이었다. 축 머리는 모니터 화면 위로 손을 짚어 두 칸씩 죽죽 그어서 확인하는 것이 몸에 밴지 오래됐다. 게다가 그는 심야 대국 때 마구 떠들었다. 상대방이 듣지 못하는데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야, 그걸 수라고 두냐"하는 건 기본이고, "어쭈, 용을 쓰네 용을 써..." 어쩌구 하는 식이었다.

심야 통신 바둑을 통해 안 군은 인간적 외로움, 그리고 일상사의 스트레스를 다스려왔다. 바둑은 그에게 단순한 취미 이상이었던 셈이다. 그런 그에게 모처럼의 대인(對人) 대국은 엄청나게 부자유스러웠으리라. 처음엔 조심했으나 무심결에 욕설이 튀어나오려고 해서 혼이 났다고 했다. 컴퓨터 대국 때마다 애용했던 '놓아보기'도, '형세분석'도 이용할 수 없자 안 군의 짜증도 극에 달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안 군은 빠른 속도로 회복한데 반해 컴퓨터는 다음 주나 돼야 만방기원에 귀환할 모양이다. 사고 나흘 만에 안 군이 만방기원에 나타나자 아이스크림 파티가 열렸다. 짠돌이 제갈길이 마련한 자리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끔찍한 한 주일이었다.
"부상 1명에 대포 1문 파손. 원장님, 아군의 피해가 적지 않습니다." (성희룡)
"아니지. 아군 사병 부상 1명, 적군 대포 1문 파손이니까 1대1이야. 인간과 기계 문명 간의 대결은 비긴 셈이라구." (오만방 원장)
"기계 문명이 초래한 비 인간성에 촛점을 맞춘다면, 두 사건 모두 피해를 본 것은 우리들이니 기계 쪽의 2전 2승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요?”(구경만 선생)
"허허. 그런 셈인가. 어쨌거나 그놈의 괴물이 눈 앞에서 보이지 않으니 살 것 같소. 나는 내가 전승한 기분이오." (오 원장)

그 순간 기원 출입문이 열리면서 오나랑 양이 들어섰다. 그리곤 대짜고짜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 참, 아빠. 컴퓨터 언제나 다 고친대요? 밥은 안먹어도 살지만 통신 안하니까 허전해서 죽을 것 같아. 적금부었던 내 돈 찾아서 새 걸로 한 대 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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