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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트엔진 단 이쇠돌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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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트엔진 단 이쇠돌 소년
2002-09-17     프린트스크랩
세상은 넓고 고수는 온 천지에 널렸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나는 놈 위엔 제트 엔진 단 놈들도 있다. 이 정도야 바둑 즐기는 사람들한테는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제트 엔진의 성능이 또한 천차만별임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사건이 만방 기원에서 잇달아 발생했다. 기똥찬 초고속 엔진을 어깨 죽지에 꼭꼭 숨기고 다니던 절대 고수들이 만방기원의 판도를 숨가쁘게 바꿔놓은 것이다.

첫 파문은 김대박(金大舶)의 등장에서 비롯됐다. 그가 만방기원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불과 두 달 전이다. 마침 광복절 공휴일 날이어서 만방기원 단골 기객들이 홀을 꽉 채울 만큼 출석율이 좋았다. “얼마나 두십니까?” 처음 보는 손님을 향해 오만방 원장이 미소를 띤 채 물었을 때 40대 초반의 그 작달막한 사나이는 말없이 검지 손가락을 곧추세워 펴 보였다.

1급이라… 오원장은 장내를 둘러보았다. 투수 교체를 위해 어디 쓸만한 구원 감이 없을까 덕아웃을 살피는 프로야구 감독 같은 포즈로. 마침 쉬고 있던 비뇨기과 의사 허기진(許基鎭)이 안테나 망에 걸렸다. 인터넷에 들어가서는 2단을 놓고 둔다지만 표준 급수로는 그도 1급이다. 하지만 1급만큼 까다로운 급수가 또 있을까. 허기진은 이 초면의 사내에게 힘없이 두 판을 졌다.

돌을 쓸어담은 김대박은 카운터에 디스 담배 2갑을 요청하더니 허기진을 향해 싱긋 웃었다. 이번 판엔 담배가 걸렸다는 뜻이다. 관전하던 모든 이들이 잔뜩 긴장했다. 하지만 그는 전문적 내기꾼은 아니었다. 진짜 꾼들은 결코 초면에 전력을 다 쏟는 법이 없다. 그리고 두 판을 두면 한 판쯤은 반드시 져준다. 그렇게 당겼다 놓았다하는 과정에서 상대 실력을 정탐하고, 상대가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서서히 판을 키워가는 법이다. 그런데 그는 상대를 바꿔가며 두는 족족 박살을 냈다.

대단한 실력이었다. 허기진이 담배 두 갑 외에도 박카스 한 박스 값까지 털리고 물러나자,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똘똘 뭉친 변덕수가 한국기원 공인 아마 3단의 명예를 걸고 나섰다. 하지만 그 역시 자장면 둘에다 탕수육 한 접시까지 곁들여 진상하고 강판당했다. 구원 투수 성희룡이 아예 두 점을 깔고 자수(?)했을 때 김대박은 “이번엔 뭘 걸죠?”했다. 치수야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으로. 엄청난 자신감이었다.

성희룡은 쌍화탕을 시켜 전 관객들에게 돌려야했고, 제갈길은 갈팡질팡하다가 대마를 때려 죽이고 시퍼런 배춧잎 두 장을 빼앗겼다. 만방기원 전체가 쑥밭이 된 것이다. 오직 구경만(具敬晩) 선생만이 굳세게 구경만 하는 바람에 유일하게 본전(?)을 유지했다. 하루 웬 종일 돌아가면서 내동댕이 쳐진 셈인데, 그렇다고 뭐 재산 상 크게 피해 본 사람은 없었다. “기원이 아니라 무슨 화원(花園) 같네요. 화초 바둑 상대하면서 내기마저 안 걸면 무슨 맛으로 둡니까. 우하하….” 만방기원 입성 첫날 최고수 자리를 점령한 김대박은 오만방 원장을 향해 이죽거렸다.

김대박은 전국규모 아마대회서 두 차례 4강까지 올라봤다고 했다. 직업은 증권 투자업. 하는 일마다 대박이 터지라고 부모가 지어준 이름인데, 주변에선 자신을 ‘킴노박’이라 부른다며 그는 킬킬거렸다. “그 놈의 주식 열번 깨지는 사이 한 번 먹기 힘들어요. 나중엔 주변에서 절더러 ‘대박’이 아니라 ‘노(no)박’이라고들 부릅디다.” 50년대 영화 ‘피크닉’등에서 죽이는 몸매로 나왔던 글래머 스타 킴노박이 엉뚱한 데서 봉변당하고 있는 셈이었다.

어쨌거나 김대박의 출현 이후 만방기원 손님들은 독재 치하의 민초들처럼 기가 죽어갔다. 오로지 건전한 기도(棋道) 정신에만 길들여졌던 이 온실 화초들에게, 껌 반쪽이라도 걸지 않으면 상대도 않으려는 김대박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느닷없이 나타난 이 절세 고수와 마주앉게 될 때마다 체면 불구하고 흑 돌을 왕창 깔았다. 알량한 자존심과 얄팍한 용돈을 맞바꿀 바보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엔진의 성능도 천차만별이다. 만방기원의 백성들은 불과 얼마 후 권세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황제라는 자리가 얼마나 뚜렷하게 총칼의 위협에 노출돼 있는지 뼛속 깊이 아로 새기는 사건을 맞는다. 아래층 어린이 바둑 교실의 강수만 사범이 모처럼 윗층으로 놀러왔던 게 그날 사건의 발단이었다.

오원장의 딸 나랑 양이 그 당시 바둑 잡지의 묘수풀이를 놓아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강 사범이 몇 마디 힌트를 주는 일이 없었더라면 김대박의 철권 통치는 좀 더 계속됐을 것이다. 어랍쇼? 이 기원에선 내가 최고수인 줄 알았는데 저 친구는 뭐시랑가. 타고난 투사 김대박의 호승심(好勝心)이 즉각 발동했다. 처음 강 사범은 대박의 대국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애들 강좌 시간이 40분도 안남았다고 했다.

대박은 원장 책상으로 다가가더니 서랍에 보관 중이던 계시기를 들고 오며 말했다. “아, 한 수 배워봅시다요. 제한 시간 각자 10분씩 하면 초읽기까지 해도 30분이면 끝난다니깐.” 그 시간이면 당신의 팔을 비틀어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이란 말투였다. 기원 안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 마음이 흔들리던 강수만에게 대박이 기어이 결정타를 꽂아 넣는다. “부담 안 줄테니 너무 겁내지 마쇼. 조그맣게 배춧잎 두 장에 똥 다섯 장으로 딱 한판만 합시다.” 본방 2만원에 한 방 당 5천원. 방내기를 제안한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강수만은 대박의 맞은 편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돌을 가려 김대박의 백번. 과연 바둑은 계시기가 필요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장면 1도] 백은 좌변 대마도 갇힌 상태이고, 상변 또한 흑 A면 백 7점이 잡힌다.



하지만 대박은 자신 만만한 손길로 △자리에 백 돌을 내리쳤다. 그것으로 백 B와 C가 맞보기가 됐다. 흑이 B의 단점을 커버하면 백 C로 우변 흑 대마가 잡힌다. 그렇다고 흑이 D로 백 두점을 잡고 우변을 살리면 백에게 B 자리를 끊겨 오히려 우상 흑 아홉 점이 잡힐 판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백도 충분히 승산이 있는 형세다.

어쩔 것인가. 잠시 생각하던 강수만 사범, 조용히 흑 돌 하나를 들어 [1도] 1에 갖다 붙인다. 여기서 백이 [2도] 1로 젖히는 것은 흑 2로 상하가 모두 해결된다. 이제 백 E면 흑 F가 듣는 것이다. 김대박은 상기된 얼굴로 [3도] 백 1, 흑 2를 먼저 교환한 뒤 3에 호구쳤다. 그러나 강수만은 이미 수읽기가 끝났다는 듯, 즉각 4로 막는다. 백은 5 이하로 우측과 연결을 꾀했으나 흑 12까지, 절묘한 수순으로 중앙 백 요석을 일망타진했다. 흑은 사통오달했고 동시에 바둑도 끝났다. [3도] 백 3으로 [4도] 백 1에 잇는 것은, 이번엔 흑 2로 찝는 수가 묘수로 역시 백이 안된다.





















김대박은 흡사 바지에다 똥 싼 표정이었다. 큰소리 치다가 대패했으니 우선 이런 망신이 없다. 게다가 방내기 얘기를 자기가 꺼낸 마당에 패배를 선언하고 돌을 거두지도 못할 처지다. 수 십집을 져 있어도 끝까지 두어서 집 차를 확인하고 셈을 마쳐야만 하는 것이 방내기다. 하지만 강수만은 싹싹했다. 시계를 보며 “빨리 끝내 다행이군” 하고 중얼거리더니, 엉거주춤하고 있는 대박을 향해 말했다. “다음에 틈 나면 다시 한 수 하시지요. 내기 바둑만 아니면 언제든지 좋습니다.”

혁명이나 유혈극으로 군주가 바뀌는 것 만큼 일반 백성들 사이에 큰 화제거리는 없다. 고작 보름 천하로 끝난 김대박으로선, 모처럼 호기롭게 밑천을 털어부어 사들인 주식이 하한가로 꼬나박힐 때의 심경이었다. 반대로 강수만은 새로운 영웅으로 탄생했다. 왕년엔 지하 내기 바둑계에서 알아주던 강자였었다느니, 입단 대회 본선에도 몇 번 진출한 바 있다느니하는 뒷소문이 풍성했다. “워낙 말수가 적어 그런 줄 몰랐는데 대단한 인재가 숨어있었군.” 오만방 원장도 감탄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건 예고편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꼭 열흘 뒤, 만방기원 안에선 더욱 놀라운 일이 터진 것이다. 사건 현장은 아랫층 바둑교실. 발생 시간은 강수만 사범이 고급반 어린이들을 상대로 실전보 강의를 마친 직후였다. 그리고 사건의 주역이 그 곳서 사환으로 잔 심부름일 해 오던 이쇠돌 소년이란 말을 전해들은 주위 사람들은 한 동안 충격을 억누르지 못했다.

쇠돌이는 남해 바다 어느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는 17살 먹은 소년이다. 오만방 원장의 고향 친구가 하루는 연락도 없이 만방기원에 들렀다. 약간은 꾀죄죄한 행색의 10대 소년과 함께였다. 자신의 조카인데, 집도 부모도 없는데다 자신도 데리고 있을 처지가 못되니 당분간만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그저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리곤 “그 애가 바둑은 좀 둔다고 하니 부려먹기는 만만할 것”이란 말도 덧붙였다. 오만방 원장의 부인인 우리 생불여사 마음이 좀 하해(河海) 같이 넓은가. 그녀의 재가가 떨어지면서 쇠돌이는 만방기원의 최말단 식구로 편입됐었다. 그게 불과 지난 봄의 일이다.

밤 늦게까지 위 아래 층을 오르내리며 심부름하랴, 틈틈이 쓸고 닦고 문 단속하랴 쇠돌이는 매우 바빴다. 하지만 과묵하면서도 성실한 이 소년에 대해 만방 씨 부부는 물론이고 어른들 모두가 매우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그 뿐이었는데, 이 쇠돌이의 진면목이 실로 우연한 기회에 드러난 것이다.

그날 밤 현장으로 되돌아가 보자.
[장면 2도]가 해설 판에 놓여진 문제의 장면. 강수만 사범은 “흑 1에는 백 2로 받아 좌하귀엔 별 수가 없다.”는 마무리로 강의를 막 끝낸 참이었다. 아이들도 거반 강의실을 빠져 나갔다. 이제 쇠돌이가 해설판 위의 흑 백 돌들을 떼어내 돌 통에 담고 강의실 청소를 마치면 하루 일과가 끝난다. 하지만 쇠돌이는 평소와 달리 주춤거렸다. 돌들을 바로 떼내지 않고 한 동안 좌하귀를 노려본 채 서있더니, 흑 돌 하나를 조심스럽게 집어 ▲자리에 갖다놓는 게 아닌가.











화장실에서 손을 씻은 강수만 사범이 강의실로 되돌아오다가 이 광경을 보았다. 강 사범은 “어, 제법인걸?” 하는 기분으로 다가와 [1도] 백 1에 돌을 갖다 놓았다. 흑은 즉각 2. 둘 간의 기묘한 수담(手談)이었다. 그 순간 강수만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이제 흑은 A를 선수하고 B에 두면 귀가 산다. 그걸 방지하려고 백이 B에 뻗으면 흑은 C로 오른 쪽 백 두점을 잡으며 살아갈 것이다. 강수만은 [1도] 백 1을 떼어내 [2도] 1에 이었다. 쇠돌이는 망설이지 않고 2 이하 5까지를 거친 뒤 6으로 연결했다. 계속해서 둔다면 [3도]인데 이것은 빅 아니면 패의 모습.










좀 더 보충 설명을 하자면, 거슬러 올라가 [장면2도]의 흑 ▲ 치중으로 [4도] 흑 1을 먼저 두는 것은 흑 7을 생략할 수 없을 때 백 8까지 안된다. [5도] 역시 수순 착오로, 이제와서 흑 D는 백 E로 받아 별 볼일 없다. 그저 [6도]처럼 흑 1로 한집 끝내기에 불과하다고 봤던 강수만으로선 얼굴이 화끈거리는 변화였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 이 말없는 몇 수의 교환만으로 강수만 사범은 쇠돌 소년의 숨겨진 재주를 바로 꿰뚫었고 진심으로 승복했다. 사환 꼬마가 천하의 강 사범을, 그것도 한 판 제대로 두어보지도 않은 채 항복시켰다는 소문은 만방기원 일대에 삽시간에 퍼졌다. 쇠돌이는 만방기원에 그렇게 공식 데뷔했다. 기원 안에서의 쇠돌의 인기는 바깥 세상에 불어닥친 19세 소년 이세돌의 돌풍에 결코 못지 않았다. 아, 고성능 제트 엔진의 대책없는 천차만별이여. 우주의 광활함과 수(手)의 무변(無邊)함이여. 제제다사(濟濟多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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