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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박학다식'과 '생불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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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박학다식'과 '생불여사'
2002-09-02     프린트스크랩
만방기원 주인 오만방 원장은 타고난 낙천가에 속한다. 그의 따듯한 인정과 탁월한 유머 감각은 자석(磁石) 처럼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인터넷 사이트에 밀려 숱한 기원들이 비명 속에 사라져가고 있지만, 그래도 만방기원이 문 닫지않고 버티는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하루 일과를 얼추 끝내기 무섭게 이 곳으로 모여드는 다양한 직업의 기객(棋客)들 모습을 보노라면, 흡사 날 저물면 안식을 위해 보금자리를 찾아드는 한 떼의 새들을 떠올리게 한다.

60이 낼 모레인 나이에도 오 원장은 30대 젊은이들과 격의없는 농담으로 소일하는 게 낙이다. 3년 전 이 기원을 처음 찾았을 때 성희룡(成喜龍)도 그렇게 당했다. 몇 차례 들락거리면서 딸 나랑에게 부쩍 관심을 보이는 눈치를 만방씨가 못 챌리 없었다. 그것은 '사위 후보'에 대한 일종의 첫 면접이었다.

"자네 이름이 성희롱이라고 했나?"
"희롱이 아니라 희룡입니다."
"거 참 이름 한번 고약하게 지었군. 직업은 어떻게 되는데?"
"예, 자그마한 벤처 회사에 다닙니다."
"뭐 변처? 요즘 세상에도 아직 그 직업이 남아있었나? 죄다 수세식으로 바뀐 줄 알았더니."
" ? "
"아, 변 치우는 직업이라매? 예전엔 변소를 벤소라고 했다구."
"그게 아니고... 말하자면 디지털 시대를 맞아서..."
"돼지 털은 또 뭬야. 좌우지간 자네 생긴대로 꽤 지저분한 일을 하고있는 모양이네 그려. 으하하."

만방기원 핵심 멤버 중 하나인 제갈길(諸葛吉)도 오원장에겐 밥이나 다름없다. 중학교 체육 교사인 그는 옆에서 누가 뭐라건 그저 실리 위주로 제 갈길만 가는 기풍인데, 풍부한 바둑 상식을 자랑하다가 번번이 당한다. 언젠가 그가 "조치훈의 별명이 폭파 전문가라는 거 다 들 모르시지요?"하고 아는 척을 했다. 오만방 원장은 즉각 그에게 '자살 전문가'란 닉 네임을 붙여주었다. 허구헌 날 멀쩡한 대마를 때려죽이니, 그게 자살이 아니면 타살이냐고 다그친 것이다.

당한 사람은 이들 만이 아니다. 변덕수도 거의 만신창이 신세다. 그가 "이창호는 비관파, 유창혁은 낙관파"라고 풍부한 지식을 과시했을 때 오 원장은 지체없이 변덕수에게 '염세파(厭世派)'란 별명을 하사했다. 그가 "원장님, 저는 스스로 생각해도 선 실리, 후 타개 타입인 것 같아요" 했을 때 오만방 씨가 뭐라했는지 아는가. "선 실리까지는 맞는 것 같군. 하지만 뒷 부분은 틀렸어. 선 실리, 후 타계(他界)가 정확하다구"해서 기를 죽였다. 허기진(許基鎭)의 초식이 '흔들리기'로 불리기 시작한 당시는 조훈현 9단의 '흔들기'가 한창 화제에 올랐던 무렵으로, 그 명명도 오 원장이 했다.

그렇게 짖꿎은 오만방 원장에겐 별명이 없을까. 물론 있다. '박학다식(博學多識)'이다. 뭐든지 막히는데 없이 많이 안다는 뜻이다. 별명이라기 보다는 아부에 가까운 이 호칭은 본인이 직접 만들어서 반 강제로 유포시켰다. 손님들에겐 '염세파'니 '자살 전문가'니 하는 우스꽝스런 별명을 안겨주고 자신은 '박학다식'이라고 불러달라는 원장. 만방기원이 그래도 문 안닫고 버티는 건 현대의 첨단 과학 조차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였다.

그런데 참 희한한 일도 다 있다. 기원 손님들이 단 한치의 불만도 없는 표정으로 오 원장을 '박학다식 원장님'이라고 불러준다는 사실이다. 처음 들른 기원 손님들이 의아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여기엔 아주 간단한 비밀이 숨어 있었다. 자기네끼리는 오 원장의 박학다식을 '薄學多食'으로 해석하기로 묵계가 이뤄진 것이다. 학식은 엷고 먹기만 많이 먹는다는 뜻 아니겠는가. 매번 당하기만 하던 만방기원 멤버들의 회심에 찬 반격이었다.



이 처럼 매사 여유롭고 낙천적인 성품의 오만방 씨도 그 앞에선 설설 기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오만방 원장의 아내이자 오나랑 양의 어머니이기도 한 나죽자(羅竹子) 여사다. 평소 위풍 당당하던 만방 씨도 그녀가 눈 앞에 다가가기만 하면 공연히 식은 땀을 흘리곤 한다. 그녀는 오만방씨의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뭔가 기분이 상할 때마다 이 사람좋은 남편을 향해 "차라리 죽어버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구"를 외친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라니. 사실 이 말은 바둑꾼들에겐 꽤 친숙한 표현이다. 살아봐야 죽는 것만 같지 못한 경우가 바둑 판 만큼 자주 발생하는 분야가 또 있을까. 이를 약간 유식하게 덧칠을 한 표현이 있으니 바로 '생불여사(生不如死)'다. 실전 예를 구경해 보자. <장면도> 백이 △로 덥썩 끊어온 상황이다. 이제 백 '가'면 흑 넉점이 잡히는 모습인데, 흑은 어떻게 두어야 할까.



<1도> 흑 1로 단수해 넉점을 살리면 백은 2로 호구쳐 좌하 흑을 공략하게 된다. 31까지, 이 쪽 흑도 살기는 살지만 완전히 쌈지뜬 모습. 백이 32를 차지해 이거야말로 '살면 뭘해, 차라리 죽는게 낫지'의 전형이다. 상대방에 더 큰 이득을 주고 간신히 목숨만 구했으니 생불여사(生不如死) 아닌가. <2도>를 보자. 흑 1로 단수쳐 거꾸로 넉점을 버리는 발상이 참신하다. 9까지 외곽을 싸바른 모습과 <장면도>와를 비교해 보라.

말 끝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구"를 외쳐 온 나죽자 여사가 급기야 생불여사란 별명을 얻은 것은 가위 역사적 필연이었다. 내용 상 별로 기분좋은 별명은 아니건만 그녀 자신은 이 별명에 눈꼽 만큼도 언짢은 기색이 없다. 언짢은게 다 무언가. 기원 내 젊은 손님들이 몰래 히히덕거리며 처음 자신을 이렇게 지칭했을 때, 그녀는 입이 함지박 만큼 째지면서 만족해 했다. 우선 여사(女史)란 호칭을 싫어할 중년 부인은 없다. 문제는 그 앞의 '생불'인데, 그녀는 생불(生佛)로 받아들인 것이다.



생불(生佛)에 대해 국어 사전은 '덕행(德行)이 뛰어난 중으로서, 살아 있는 부처로 숭앙받는 사람'이라 풀이하고 있다. 그녀는 승려는 아니지만 아쉬운 일만 생기면 즉각 부처님에게 삐삐를 칠 만큼 독실한 불교 신자다. 이 풀이대로라면 나죽자 여사로선 극상의 호칭을 얻은 셈이었다. 결국 '생불여사'란 호칭은 '박학다식'과 함께 부르는 사람 따로, 듣는 사람 따로의 의미로 자리잡은 것이다. 만방기원 사람들은 정말 유식하기도 하다.

오만방 씨 부부는 이래저래 천생연분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들 초로(初老)의 커플 사이에는 평화로운 날보다 그렇지않은 날들이 훨씬 더 많다. 그날의 한 바탕 소동도 평소 처럼 사소한 일에서 출발했다. 짜장면 배달이 도착했을 무렵이었으니까 조금 늦은 점심 시간이었을 것이다. 구경만 선생이 보던 신문을 내려 놓으며 오 원장을 향해 탄식 섞어 말했다. "평양서 내려왔던 83세 된 실향민 한 분이 전 재산을 방송국에 기탁했답니다. 그런데 그게 한 두푼도 아니고... 무려 270억원 이라는군요."

돈이 화제에 오르면 졸던 사람도 화들짝 깨는 법이다. 기원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한 마디 씩 감상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성희룡은 "저도 그 기사 봤습니다. 막노동부터 시작해 평생 모은 재산을 그렇게 쉽게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했고, 변덕수는 "초등학교 5학년 학력이 전부라니 돈 버는 것과 가방 끈과는 관계없는 모양이네요"하며 한 숨을 내쉬었다.

외출 준비 중이던 나랑 양도 끼어들었다. "그날 방송국서 전달식을 가진 뒤에 그 분이 '오늘 밤 잠이 잘 올것 같다'고 했대요. 너무 너무 멋진 분 같지요?"하며 주변의 동의를 구했다. 나랑 양은 그러나 월드컵 티켓 사건 이후 부터 성희룡에겐 눈도 마주쳐주지 않는다. 그나저나 생불여사는 거의 기절 직전이다. "뭬라구요. 270억원이라구? 에그머니나. 절에다 시주를 않고 웬 방송국에다... 그런 큰 돈 구경이라도 하고 죽었음 소원이 없겠네. 나무 관세음 보살..."

오만방 원장으로서도 한 마디 안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됐다. 큰 기침과 함께 그가 입을 열었다. "크험. 사실 자선(慈善)이란 꼭 돈이 많아야만 하는 건 아니야. 옛날 사위국(舍衛國)에 난타(難陀)란 이름의 가난한 여인이 있었다네. 그녀는 하루 종일 구걸해 번 돈으로 한개의 등(燈)을 사서 부처님께 공양을 했지. 적은 돈이지만 온 노력을 바쳤던 셈인데, 바로 빈자일등(貧者一燈)이란 고사 얘기야."

과연 오만방씨는 박식(博識)하다. 이 정도에서 그쳤더라면 그 풍부한 상식이 얼마나 돋보였으랴. 하지만 그는 신이 난 김에 기어코 오버 페이스를 저지르고 말았다. "돈이 많으면 불쌍한 사람을 잘 도울 것 같지만 그것도 그렇지 않아. 부자가 자선을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더욱 훌륭한 셈이지. 미국에 젊은 컴퓨터 재벌 게이트라고 있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매번 엄청난 자선을 베풀어 많은 극빈자들이..."

모두들 웃음을 참고 있는데, 우직한 변덕수가 기어코 난장을 쳐 버렸다. "원장님, 게이트가 아니라 게이츠, 빌 게이츠입니다. 워낙 뭔 게이트, 뭔 게이트 하고 나오니까 잘 못 알고 계셨군요. 우하하." 졸지에 만방씨의 박식(博識)이 박식(薄識)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원래 박이부정(博而不精)은 말이 많아지면 반드시 뽀록나는 법이다.

이 대목에서 생불여사가 마침내 폭발했다. 2백억이니 뭐니 소설같은 얘기를 듣고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해져 있던 터에, 엉뚱한 소리로 웃음꺼리가 돼버린 남편이 한심하다 못해 괴씸해진 것이다. 그녀는 꺾어 들었던 나무 젓가락을 남편을 향해 휘두르며 외쳤다. "어이구, 남들이 몇백억 씩 버는 동안 당신은 그 나이까지 뭘했어. 그저 당신같은 사람은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낫다니깐."

생불여사는 혈압이 매우 높은 편이다. 그녀를 진찰할 때마다 의사는 절대 흥분하는 일이 없도록 신신당부를 한다. 나죽자 여사가 얼굴이 시뻘개진 채 허위적거리자 나랑 양이 당황해 어쩔 줄 몰라했다. 이럴 때 가만히 있을 성희룡과 변덕수가 아니다. 나랑 양의 불행은 곧 나의 불행이고, 나죽자 여사의 목숨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장모없이 장가드는 불상사를 맞게될지 모른다. 둘은 가위 경쟁적으로 생불여사를 안채 방까지 업어다 안정을 취하게 했다.

대국실 홀로 돌아가면서 변덕수와 성희룡은 실로 모처럼만에 대화를 나눴다. 바둑 판과 사랑 앞에선 박살을 내야하는 적(敵)이지만 이럴 땐 제법 동료 의식도 드는 모양이다.
"성형, 생불여사 혹시 돌아가시면 어쩌지요? 우리 장모님 오래 사셔야 할텐데..."
"뭐, 우리 장모님이라구? 좋아, 그럼 변형이 두 분 잘 모시고 사시요. 나랑씨는 내가 책임질테니. 으흐흐."
"여사가 언젠가 돌아가셔도 바둑에 생불여사란 말은 계속 남으리란 걸 생각하면 서글퍼져요."
"글쎄. 그나 저나 원장님이 너무 태평이시군. 혹시 맨날 잔소리만하는 여편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닐까요?"
"그럼 호칭이 복잡해지는데... 생불남사라고 부를 수도 없고..."

킬킬거리며 대국실 문을 열고 들어서던 둘이 발 걸음을 딱 멈췄다. 그리곤 입구에서 갑자기 석고 처럼 굳어버렸다. 대국실 광경이 너무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만방 원장은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태평스런 동작으로 짜장면을 혼자 꾸역꾸역 맛있게 들고있었다. 구경만 선생은 그런 오 원장의 동작을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 눈 길로 관찰 중이었다. 마치 오랑우탄의 야생 활동을 연구하는 동물학자 같은 자세로. "장인 어른 박학은 몰라도 다식(多食)은 확실하시군." 성희룡의 가느다란 탄식에 변덕수는 말없이 고개만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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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찻잔 |  2007-08-07 오전 11:29:00  [동감1]  이 의견에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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