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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웬수, TV서 마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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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웬수, TV서 마주치다
2002-08-01     프린트스크랩
오늘 따라 하필 이렇게 몽땅 다 모일 수 있는가. 실내를 죽 둘러보던 변덕수(邊德洙)는 길게 한숨을 뿜어낸다. 도대체 ‘만방 기원’ 골수 멤버 치고 빠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저들 앞에서 꿇어앉은 채 성희룡(成喜龍) 따위의 물바둑을 공개적으로 상수(上手)로 인정해야 하다니. 바둑을 시작한 후 이렇게 치욕스런 날은 없었다. 변덕수는 타는 듯한 갈증에 냉수를 반 주전자나 들이켰다.

오늘 만방 기원에선 ‘시사회’가 열릴 참이다. 거의 매일 얼굴을 마주치는 기우들이 이미 TV 모니터를 향해 의자를 돌려놓고 관람 자세에 돌입했다. 취화선을 감상키로 했느냐고? 아니다. 그렇담 포르노 합동 관람? 그것도 아니다. ‘세기의 바둑 대결’을 보기 위함이다. 출전 선수는 변덕수와 성희룡. 이제 조금 뒤면 막 시작 공이 울릴 참이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 설명이 필요하리라. 발단은 2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만방기원의 주인이시자 정신적 지도자이시기도 한 오만방(吳萬方) 원장이 어디로부터인가 전화를 받더니, 싱글벙글하면서 통화 내용을 털어놓았다. 바둑TV ‘우리 기원 라이벌’ 제작 팀에서 다음 주에 만방기원 편을 방영키로 했다고 알려왔다는 것이다. 각 기원 별로 피터지는 라이벌 한 쌍 씩을 스튜디오로 불러내 공개리에 승부를 가리는 이 프로그램은 만방기원 멤버들에게도 퍽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누구를 내세울까. 5, 6단급 강자들에다, 아랫층 바둑교실 사범들까지 포함하면 7단들도 몇명 있었지만 만방기원 사람들은 국무회의 뺨치게 진지한 토론을 거쳐 성희룡 대 변덕수로 결론을 냈다. 바둑은 아마 3단 정도에 불과하지만, 라이벌이라면 이들 이상으로 누가 있느냐는 거였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이 결정에 치열하게 저항했다. 성희룡은 “변덕수 씨가 어떻게 내 라이벌이냐, 그 동안 딴 돈으로 곧 집을 살 판인데”라고 외치자 변덕수는 변덕수 대로 “세상에 제자 뻘하고 공식 대국을 두라니. 원장님, 혹시 스승의 날 특집 프로는 안 만든답디까?”라며 이죽거렸었다.

성희룡과 변덕수는 나이도 설흔 둘 동갑인데다 바둑 실력 또한 한 치도 기울지않는 난형난제의 관계다. 변덕수는 변덕스런 ‘떡수’가 트레이드 마크다. 떡수라면 얼핏 약점으로 들리겠지만, 그는 이 거친 초식으로 심심치않게 불가사의한 괴력을 발휘하곤 한다. 직업? 요게 약간 좀 그렇다. 쉽게 말해 ‘주 7일 휴무제’니까. 실업자(失業者)란 표현을 가장 싫어하는 그는 대신 기업자(棄業者)로 불러 줄 것을 주문한다. 무슨 신용금고에 다니다가 상사와 대판 싸우고 나왔으니 직장을 ‘잃은’ 것이 아니라 ‘버렸다’는 논리다.

성희룡은 무슨 벤쳐 회사에 다닌다는데, 그 직업적 정체가 변덕수보다 오히려 불분명하다. 도대체 젊디 젊은 직원이 일터보다 기원에서 개기는 시간이 더 많다면 말이 되는가. 첨단 지향 기업들이 요즘 자금난으로 고전한다는 소문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성희룡과 변덕수 두 사람은 모든 면에서 라이벌 관계인데, 여기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또 하나 있다. 앞으로도 많이 나오겠지만 둘은 여자 하나를 두고 치열한 암투를 펼치고 있다. 연적(戀敵)이란 얘기다.

공개 대결 전야 두 사람은 명량 해전에 임하는 이순신 장군 처럼 비장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싸움은 기세에서 반 쯤 먹고 들어가는 법. 변덕수는 “원장님, TV 프로엔 방내기 제도가 없나요? 만방기원 편이니 만방으로 끝내도 뒷 말이 없겠죠?”했고, 성희룡은 “내가 만약 이번 대결서 진다면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여러분들에게 아마 3단 단증에 대한 재 신임을 묻겠다”며 너스레치고 다녔다.

두 사람의 호언 장담을 그냥 듣고만 있을 우리의 오만방 원장이 아니었다. 그는 소주 잔을 높이 치켜든 채, 자신이 무슨 공정선거 관리위원장이나 되는 듯 느릿느릿 말했다. “나도 두 사람이 맨날 싸우는데 지쳤어. 이번 기회에 둘 간의 명백한 서열을 정했으면 하네.” 그리곤 구체적 방법까지 제시했다. 이번 대결은 다음 주 TV에 방영되고, 그 시간 만방기원 사람들은 함께 모여앉아 ‘공개 시사회’를 지켜보도록 하자. 그리고 그 바둑이 끝난 직후 진 사람이 이긴 쪽을 향해 꿇어앉은 채 ‘상수 님’하고 부르도록 하는게 어떠냐. 모인 사람들은 박수와 환호로 그 제안을 환영했다.

그랬는데, 아 그랬는데 변덕수는 그 바둑을 졌다. 세상에 국수전 보다도, 아니 LG배나 40만달러 짜리 잉창치 배 보다도 더 중요한 그 바둑서 다른 사람도 아닌 성희룡에게 패한 것이다. 이제 불과 몇분 후면 저기 놓인 TV 모니터에선 그 프로가 녹화 방영될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결과를 모른 채 기다리고 있는 이 사람들은 그 치욕의 현장을 똑똑히 지켜 볼 것이다. 이 불상사를 어찌할까. 변덕수는 그저 죽고싶은 마음 뿐이었다.

성희룡은 표정 관리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도 기원 사람들에게 그 바둑의 결과는 아직 알리지 않은 모양이다. 극적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수작이 아니겠는가. 교활한 자식. 망신살이 뻗치느라고 때맞춰 아래 층에서 공부하던 바둑 교실 어린이들까지 몰려든다. 우리 기원이 TV에 나온대. 조막만한 꼬마 수십명이 재잘거리며 들어서자 홀이 꽉 차버렸다. 구경 밝히는데는 애 어른이 따로 없구나. 제기랄! 변덕수는 눈을 감아버렸다.

마침내 오만방 원장이 TV를 켠다. 이번 포즈는 영락없이 개표 개시를 선언하는 감표위원장의 그것이다. 하긴 감개무량하기도 할 것이다. 30년 세월 온통 자신의 젊음을 바쳐 온 이 삶의 터전이 난생 처음 TV에 소개되는 순간 아닌가. 해설을 맡은 낯 익은 프로 기사와 아마추어 진행자 두 사람이 만방기원 기객들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계시원 아가씨가 “대국을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원 내 관객들은 일제히 꼴깍 침을 삼켰다.

성희룡의 흑번. 대충 포석이 끝나기 무섭게 우변에서부터 접근전이 시작됐다. 싸움은 갈수록 전면전으로 번져간다. 평소에도 오로지 상대를 때려누일 펀치만 있고 수비를 위한 가드는 없는 난투극을 펼쳐왔던 두 사람이다. 협공에 되협공. 우중앙에서의 첫 접전은 치열함을 극한 끝에 쌍방 대마가 빅의 형태를 이뤘다.



국면이 [장면도]도에 이르렀다. 백이 막△에 협공한 순간이다. 해설자는 여기까지 백 우세로 진단했고 당시 변덕수의 생각도 같았다. “내가 오늘 이 친구를 박살을 내리라.” 그는 그 무렵만 해도 두터운 중앙세에 만족하면서 진짜 ‘만방’을 만들 생각이었다. 세 불리를 느낀 성희룡은 죽기 살기로 부딪쳐오고 있었다.

바둑은 난전인 채로 확전 일로다. 대국 당시엔 급소라면서 자랑스럽게 놓은 점들이 많았는데, 해설자의 설명을 듣고보니 쌍방 모두 엉뚱한 점이 한 둘이 아니다. 저 건너쪽에 앉아 TV 모니터를 보는 성희룡의 표정도 꽤 붉어져 있다. 그 역시 낯이 뜨거운 모양이다. 역시 전문가 앞에서 발가벗는다는 것은 승패를 떠나 보통 쪽 팔리는 게 아니군.


둘 모두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해설자가 웃음 띤 얼굴로 말한다. “흑 백 모두 참을성이 대단한 기풍이군요. 서로 경쟁하듯 급소를 양보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두 분이 활동하시는 기원 이름이 뭐라고 했지요?” 진행자가 만방 기원이라고 답하자 해설자는 기어이 결정타를 넣는다. “제 생각엔 ‘자비(慈悲)기원’이나 ‘인내(忍耐)기원’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이 기회에 바꾸시는 게 어떨까요? 으하하하.”



중앙이 온통 백세인데도 흑이 마냥 움직이자 변덕수는 칼을 뽑기로 했다.
[1도] 백 1 이하로 움직여 일망 타진을 외친 것이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교활한 성희룡은 우변 빅 모양의 약점을 빌미로 덫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흑 6에 이르자 중앙과 하변이 동시에 걸린 것이다. 할 수없이 7, 9로 아랫쪽을 연결해 갔으나 그 통에 백 요석 석점이 잡혔고, 빅으로 살아있던 오른 쪽 백 열점이 속절없이 나포돼 버렸다. 하다못해
[2도]처럼만 됐어도 끝난 바둑이었다며 해설자는 또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아직 절망은 아니었다. 하지만 변덕수는 열이 오를대로 올라 있었고, 그 여파가 우상귀에까지 미쳐 변덕수는 장렬히 옥쇄하고 만다. 앞으로 20여수 뒤면 그 장면이 모니터에 등장하리라. 하지만 아직은 TV속의 해설자와 진행자도, 여기 모인 수십명의 관객들도 이 바둑이 어떻게 끝날른지 모른다. 결과를 아는 사람은 승자인 성희룡과 패자 변덕수, 단 두명 뿐이다. 변덕수는 미쳐가고 있었다.



이 자리에 나올 때 각오는 했더랬다. 까짓것 바둑이란 질 수도 있는 것, 사나이답게 성희룡을 향해 “자네가 상수일쎄”하고 추켜 줄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박장대소 하면서도 나의 그 의연함에 감탄하겠지. 하지만 아니었다. 막상 자기가 둔 바둑의 비참한 피날레를 지켜보노라니, 유관순 누나에게 가해졌던 일제의 그 어떤 악랄한 고문(拷問)도 이보다는 덜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며 목이 칵 메어왔다. 해설을 맡은 프로 기사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자꾸 킬킬거렸다.

변덕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에 앉아 관전하던 구경만(具敬晩) 선생이 한 마디 던져온다. “맞아, 이런 장면에서 오줌이 찔금거리지 않으면 그게 신선이지 사람인가” 변덕수는 사람들의 웃음 소리를 뒤로 한채 방을 나왔다. 그러나 복도로 나온 그는 화장실을 지나 잰 걸음으로 옆쪽 비상 계단을 향했다. 그런 다음 점프하듯 한 번에 서너 단계 씩을 냅다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TV 속 바둑 판에 흑백의 돌 들이 빼곡하게 채워져가고 있었다. 성희룡의 가슴은 첫날 밤 신방에 들 신랑을 기다리는 새색씨의 그것처럼 콩닥거린다. 이제 몇 수 뒤엔 변덕수가 자신의 별명에 걸맞게 최후의 ‘떡수’를 터뜨리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마침내 항복을 고하게 돼 있다. 세계 유일의 바둑 전문 채널과 수십만 시청자들이 그 역사적 승부의 증인이다. 방송이 끝나면 저 쪽 구석에 쭈그리고 있던 변덕수는 꿇어앉은 채 나를 올려다보며 “상수 님”하고 부르겠지. 기우들은 박수를 치며 웃으리라. 그의 상판대기를 바라보면서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줄까. 성희룡은 소리를 죽인 채 흐흐거렸다.

TV속의 해설자는 “역전은 됐지만 백이 최선으로 둔다면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오만방 원장, 구경만 씨, 아래 층 바둑교실의 강수만(姜守滿) 사범 등 관전 중이던 모든 사람들이 의자를 TV 앞으로 더욱 당겨 앉았다. TV 속 자신의 손에 실린 흑 돌이 마침내 최후의 전장(戰場)이 된 우상귀로 향하자 성희룡은 더는 참지 못했다. 그가 “으하하하!”하고 웃음을 터뜨린 것과, 만방기원 홀 전체가 암흑에 휩싸인 것은 거의 동시였다.

같은 시간, 변덕수는 기원 건물 맞은 편 공터에서 칠흑으로 변한 6층짜리 빌딩을 올려다 보며 형언 못할 엑스터시에 빠져들고 있었다. 불타는 현장을 숨어서 지켜보는 방화범(放火犯)의 심리가 이런 것일까. 원래는 기원이 세 들어있는 4층 스위치만 내릴 생각이었는데, 건물 전체의 주 전원(電源)을 잘 못 건드렸던 모양이었다.

그거야 아무려면 어떠랴. 마침 경비원 김씨는 자리를 비웠고 지하 발전실 열쇠는 얌전히 벽에 걸려있었다. 모두들 저 깜깜한 암흑 속에서 지금 쯤 어떤 표정들을 짓고 있을까. 변덕수는 담배 불을 비벼 끄면서 악마 처럼 싱긋 웃었다. 그리곤 두 손을 입에 모은 채, 기원 건물을 향해 젖먹던 힘까지 모아 악을 썼다. “성희룡 너는 영원한 내 하수다아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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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성의난 |  2003-08-24 오전 10:57: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덕수 선생님 승부 조작을 -_-;;;  
추락한구름 |  2007-10-14 오후 8:13: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팔월이 시작 되면서 이 글을 썻는데 ...오늘 보면서 기다림이 없어서 좋겠구나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 읽으면서 온갓 웃음을 짖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나의 이삼대의 추억이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구명인 |  2009-08-07 오후 1:52:54  [동감1]  이 의견에 한마디
작가님, 다 좋은데 띄워쓰기좀 하시는게... 눈이 무쟈게 피곤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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