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일이다. 가정부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인 미영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며칠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경쾌한 느낌이다.

집에 있을 때는 자신의 방에서 두문불출하던 미영이 요즘은 화분에 물도 주고 음악을 들으면서 흥얼거리기도 했다. 또 말도 많아졌다. 하루종일 있어봐야 하는 말이라고는 식사 후에 ‘잘 먹었어요’ 정도였는데 요즘은 무슨 반찬이 맛있다는 둥 이 반찬은 어떻게 만드냐는 둥 묻는 게 많았다. 물론 식사도 잘한다. 전에는 뭐를 먹어도 깨작깨작 먹는 둥 마는 둥이었는데 요즘은 밥 한 그릇을 아주 맛있게 먹는다.

지금도 밥 한 그릇을 밥풀 하나 없이 다 비웠다.

“식사 더 드릴까요?”

“더 먹고 싶은데 살 찔까봐 그만 먹을래요.”

“회장님 살찌실 게 어딨다고요.”

“그래요? 저 안 뚱뚱해요?”

“어휴. 뚱뚱하긴요. 회장님 나이에 그 정도면 요즘 말로 몸짱이죠.”

“나이...”

나이란 말에 미영은 입을 다물었다. 가정부는 혹시 자신이 무슨 말실수라도 한 건 아닌지 불안했다.

“잘 먹었어요. 참, 이것 어떻게 만들어요? 참 맛있네요.”

“아. 네, 코다리요? 지금 가르쳐 드릴까요?”

“나중에요.”

“네, 회장님.”

미영의 밥상에 반찬은 거의 비워져 있었다. 그걸 본 가정부는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미영은 화장대에 앉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에 눈가의 잔주름이 보였다.

-나이, 그러고 보니 내 나이를 잊고 있었네. 내 나이가 몇 살이지...마흔여섯. 그래 그러고 보니 벌써 46년을 살았어. 영민씨 나이는...서른두 살이라고 그랬다. 서른두 살... 14년, 14년의 차이다. 14년 어린 남자-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미영은 침대에 엎드려 얼굴을 쿠션에 깊숙이 묻었다. 

무슨 상관인가. 14년 차이가... 결혼할 것도 아니다. 연애할 것도 아니다. 그저 키스 한번 한것뿐인데...

그래, 상관없어. 나이 같은 건 아무 상관없어.

그때 핸드폰이 울었다. 미영이 재빠르게 핸드폰을 들었다. 이것도 요즘 생긴 습관이다. 그전에는 핸드폰이 울어도 여유작작하게 핸드폰을 받는 미영이었다.

핸드폰 액정에 -영민씨- 라는 이름이 떠있다.

고영민이라고 입력했다가 바꾼 것이다.

“영민씨.”

핸드폰을 받는 미영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금방까지 우울한 감정은 눈녹듯 사라지고 경쾌한 목소리다.

“뭐해요?”

“그냥 이것저것...점심 먹었어요?”

“네, 짜장면 먹었어요.”

“어휴...맨날 그런 것만 먹어서 어떡해.”

“괜찮아요. 전 그런 거 좋아해요. 근데 저 지금 어딘지 알아요?”

“어디긴 어디겠어요. 지금 시간이면 기원에 있겠지.”

미영의 말투는 반말과 존댓말이 섞여 있었다. 상대가 누구든 반말을 거의 안하는 미영이다.

그런데 영민에게는 쉽게 반말이 나왔다.

“아닌데...미영씨 집앞이어요.”

영민의 말에 미영이 기겁을 했다.

“우리집 앞? 여긴 왜?”

“하하하...무슨 죄지은 거 있어요? 왜 그렇게 놀래요.”

“놀래긴 누가...뜻밖이라서 그렇지.”

어느새 미영은 화장대에 앉아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잠깐 나와보실래요?”

“지금? 좀 기다려야 하는데...나, 지금 뭐 좀 하고 있는데...”

“기다릴게요.”

통화가 끝나자마자 미영은 다급하게 화장품을 집어들었다.

미영이 집밖으로 나온 건 20분이 지난 후였다. 

외출복 차림이었다.

“웬일이어요? 연락도 없이 갑자기...”

“그래야 더 반갑잖아요.”

“반갑기는 무슨...”

입술을 삐죽이는 미영이다. 귀여운 표정이었다.

“이거요.”

영민이 미영에게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한 면이 40센티 정도인 정육면체 상자는 예쁜 포장지로 포장이 되었다.

“이게 뭐야?”

“선물이어요.”

“선물, 무슨 선물?”

“집에 들어가서 뜯어보세요. 그럼 저 갈게요.”

“이거 주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기원에서 여기까지 던질 수는 없잖아요. 깨지기 쉬운 거니까 흔들지 마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영민은 차를 몰고 휭하니 가버렸다.

20분이나 단장을 하고 나왔는데 겨우 5분 정도 만났을 뿐이다.
이상하게 서운했다. 누군가를 보내고 이런 기분은 처음인 미영이다.

-그나저나 이건 뭐람?

미영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상자를 보았다.

“꺄악!”

자기 방에서 선물포장을 뜯고 내용물을 본 미영은 비명을 질렀다. 상자 안에는 마치 공처럼 둥그런 새하얀 물체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생명체였다. 눈이 말똥말똥한 강아지였다.

“이게 뭐야? 영민씨.”

미영은 득달같이 영민에게 전화를 했다.

“하하하... 포메라니안이란 강아지입니다. 화이트는 아주 귀한 종자여요. 혈통도 최우수 혈통이구요. 수컷이고 이름은 로미입니다.”

“이걸 어떻게 하라구...”

미영은 강아지를 두려운 표정으로 힐끗 보았다. 털이 눈처럼 새하얀 강아지는 처음 온 이곳이 신기한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어떻게 하긴요. 미영씨가 키워야죠.”

“내가 어떻게 키워. 난 강아지 싫어한단 말이야.”

“그래도 키워야 해요. 이제부터 그 녀석 엄마는 미영씨니까요.”

“내가 쟤 엄마라구?”

“키우면 보람이 있을 거여요. 아주 영리하고 쾌활한 녀석이거든요. 태어난 지는 38일 됐구요. 젖 뗀 지는 일주일 됐으니까 이유식을 시켜야 할 거여요.”

“어떻게 이유식을 시키라구...”

미영은 거의 울 듯한 표정이었다.

“그건 엄마가 알아서 해야죠. 참 그 녀석 오줌을 뉘여야 할 텐데...”

아니나 다를까 강아지는 문앞에 오줌을 싸고 있었다. 

영민의 핸드폰으로 미영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핸드폰을 끄며 영민은 웃음을 터트렸다.

“김실장! 김실장!”

미영의 다급한 목소리에 김실장이 황급하게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회장님.”

“저것 좀 봐봐.”

미영의 방안에서 강아지는 침대시트를 물고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웬 강아지여요?”

“나도 몰라.”

진짜 몰라서 모른다는 건지 여자 특유의 회피성 발언인지 김실장은 가늠이 안됐다. 어쨌든 김실장이 아는 미영은 개나 고양이라면 딱 질색인 성격이었다.

“가져다 버릴까요?”

“아냐, 아냐. 버리면 안돼. 내가 키울 거여요.”

“회장님이요?”

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포메라니안 종(種)이군요.”

김실장이 강아지를 안아올리며 말을 이었다.

“포메라니안?”

“지금은 이런 모양이지만 성견이 되면 사자 같은 모양이 되죠. 굉장히 영리하고 활달한 성격에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견종입니다. 보통은 오렌지색인데 이런 하얀색 포메라니안은 저도 처음 봅니다. 아주 귀하다고 들었어요. 어디보자, 생긴 것도 잘 생기고 눈도 초롱초롱한 게 혈통이 아주 좋은 강아지인 것 같습니다. 이런 종자라면 아마 족보가 있을 텐데.”

김실장은 강아지가 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상자 안을 보았다. 상자 안에는 서류가 들어있었다.

“여기 있군요. 수컷에 이름이 로미군요. 생일이 11월2일이면 젖은 뗐겠군요.”

“이유식을 해야 한다고 그랬어요.”

“제가 이유식을 준비하죠.”

김실장이 강아지를 미영에게 안기고 돌아갔다.

미영의 손에 안긴 강아지는 낑낑대며 미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까맣고 초롱초롱한 눈이었다.

이유식을 만들어 온 김실장은 소파에 앉아 로미한테 이유식을 먹였다. 로미는 배가 고픈지 김실장이 스푼으로 떠주는 이유식을 날름날름 맛있게 받아먹었다. 미영은 멀찌감치 소파 끝에서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거 어떻게 만든 거여요?”

“북어국에 삶은 계란 노른자하고 밥을 조금 넣어서 죽처럼 끓였습니다.”

“맛있나봐, 잘먹네.”

“이렇게 잘먹는다는 건 건강하다는 뜻이죠.”

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식을 다 먹인 김실장은 로미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혹시 얹힐까봐 소화를 시키려는 동작이다. 개를 길러보지 않은 것 같은데도 김실장의 그런 행동은 능숙했다. 무엇을 해도 능숙한 김실장이다.

“어때, 배부르지? 로미.”

로미는 마치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낑낑 댔다.

김실장의 손에서 벗어난 로미는 미영을 힐끗 보더니 뽈뽈뽈 미영한테 갔다.

“하하...그 녀석, 밥은 내가 먹였는데 금방 회장님한테 가는군요. 아마 회장님이 엄마인 걸로 아는 모양입니다.”

엄마.

미영한테는 생소한 단어다. 누군가의 엄마라고 불리는 건 처음이다.

오래전 엄마가 될 뻔한 적이 있었다.

뱃속의 아이. 겨우해야 10주가 된 아이의 엄마.

엄마가 된다는 기쁨에 들뜬 미영이었다.

기쁨은 10주 만에 끝났다.

아이는 유산이 되었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후로 미영은 영원히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자가 되었다.

로미는 미영의 무릎으로 올라와 미영의 손가락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그것을 미영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아지에 대한 거부감이 처음보다는 많이 약해졌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받아들인 마음도 아니었다.

“로미를 키우려면 필요할 게 많을 겁니다.”

“뭐가 필요한데요?”

“글쎄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강아지용 목욕용품도 있어야하고 장난감이나 간식에다 기저귀도 당장 필요하겠군요.”

“강아지용 기저귀도 있어요?”

“네,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평상시에 미장원이나 공공장소에서 옷을 입힌 강아지를 보면 인상을 찌푸린 미영이다. 개가 개다워야지 저게 뭔지... 그런데 강아지용 기저귀라니...

“제가 사올까요?”

“아녀요, 제가 갈게요.”

펫샵을 다녀온 미영을 보고 김실장은 아연실색했다.

차 안에 강아지 용품이 가득했다. 펫샵에 있는 용품을 거의 다 가져온 듯했다.

하지만 그 많은 용품들은 지금 당장은 거의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이빨도 없는 녀석한테 육포나 소갈비만한 개껌이 무슨 소용인가. 더군다나 사온 기저귀는 너무 커서 채우면 거의 옷이라도 입은 꼴이었다. 지금 당장 쓸만한 건 겨우해야 샴푸 정도였다.

미영은 그 많은 용품 중에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다는 게 다행이라는 듯 로미를 목욕을 시켰다. 김실장이 하겠다는 걸 미영이 자신이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이다. 이 쥐방울만한 강아지 목욕시키는 게 뭐 어렵겠는가. 미영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은 금방 후회로 돌아왔다. 쥐방울만해서 더더욱 힘들었다. 로미는 몸에 물을 묻히자마자 천방지축으로 날뛰었다. 워낙 작아서 그것을 잡는 게 힘들었다. 자칫 힘주어 잡으면 다칠 것 같고 적당히 잡으면 금방 미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욕실 안을 좁다고 뛰어다녔다. 목욕을 제대로 시킨 건지 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로미가 목욕을 끝냈을 때 미영은 마치 자신이 목욕이라도 한 듯 흠뻑 젖어 있었다.

그야말로 기진맥진이었다. 드라이기로 로미의 털을 말린 미영은 피곤한 몸을 침대에 던졌다. 피곤해서 금방이라도 눈이 감길 것 같은데 이상하게 눈길이 로미 쪽으로 향했다. 로미는 목욕을 끝내서 그런지 방안 한쪽 구석에서 잔뜩 웅크린 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문득 펫샵 주인의 말이 떠올랐다.

-목욕을 시킨 후에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세요. 잘못하면 금방 감기 들어요.

미영은 지친 몸을 일으켜 담요를 꺼냈다. 담요라도 덮어줄 생각이다.

그런 미영을 로미가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은 마치 ‘엄마 추워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미영은 담요를 버리고 로미를 안아 침대로 갔다. 침대에 누워 미영은 로미를 토닥거렸다.

자장 자장...

금방 로미는 쌔근거렸다. 

그렇게 아기는 엄마 품안에서 잠이 들었다.

아기가 잠든 것을 본 미영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로미가 온 이후로 회장님이 무척 밝아지셨어요.”

로미와 장난을 치는 미영을 보고 가정부가 김실장한테 말했다. 미영의 변화에 김실장도 내심 기쁜 마음이었다. 단지 로미한테 흠뻑 빠진 미영이 일은 뒷전인 게 걱정이었다. 당장 처리해야할 큰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미영의 하루는 로미로 시작해서 로미로 끝났다. 

일어나자마자 로미 이유식을 만들고 운동을 시키고 대소변 가리기 훈련에 펫 동호회에 가입해 애완견 기르기 정보를 주고받았다. 그동안 영민은 만나지는 못했지만 전화는 수십 통을 넘게 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전화로 영민에게 보고하는 미영이었다.

며칠 전에는 로미가 처음 짖었다. 작지만 제법 개가 짖는 소리였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말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영은 감격에 겨워 영민에게 전화를 했다.

“로미가 나한테 엄마라고 불렀어.”

미영은 들뜬 목소리로 영민에게 외쳤다.

지금도 득달같이 영민에게 전화를 거는 미영이다. 로미가 지정된 장소에 소변을 본 것이다.

“영민씨 로미가 이제 소변을 가려요.”

“정말요?”

핸드폰으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영민의 목소리가 전달돼 왔다.

“아직 두 달도 안됐는데 소변을 가린단 말여요?”

“정말이야, 모래로 화장실을 만들어 놨는데 거기에다가 소변을 보더라고...”

“그것봐요, 내가 뭐라고 그랬어요. 그 녀석이 그렇게 영리하다니까요.”

“엄마를 닮아서 그런가봐.”

“하하하...”

미영의 말에 영민이 배꼽이 빠질 듯이 웃었다.

“그나저나 로미 그 녀석 나도 좀 보여줘야 하는 것 아녀요? 어떻게 크는지 궁금해요.”

“나도 영민씨한테 보여주고 싶어. 오늘 기원으로 데리고 갈까?”

“기원은 안되요. 사람들이 싫어할 수도 있고 공기가 탁해서 로미 건강에도 문제가 있을 수도 있어요.”

“맞아, 그렇네.”

“제가 미영씨 집으로 갈 수도 없고...”

“참, 삼성동에 오피스텔이 있는데 거기서 볼까?”

“삼성동에요?”

“미라클이란 오피스텔이야. 지금 준비하면 5시까지는 갈 수 있는데.”

“그래요, 그럼 그쪽으로 제가 갈게요.”

전화를 끊고 미영은 가슴이 들떴다. 오랜만에 보는 영민이다.

영민은 창밖을 보았다.

정해진 수순대로 가고 있다.

대마의 사활이 눈앞에 있었다.

이제 앞으로 두어 수 후면 대마를 잡을 수 있다.

기뻐해야할 영민의 마음은 왠지 무거웠다. <6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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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5  본 내용은 작가의 순수 창작물이므로 무단복제나 도용, 표절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