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저녁인데도 오뎅바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김이 뿌옇게 올라오는 오뎅통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은 양 옆으로 길게 스툴의자에 앉아 술안주로 연신 오뎅을 골라먹으며 왁자하게 떠들어댔다. 마치 시장통 같은 그런 분위기는 사람들을 자유분방하게 만들었다. 옆사람 눈치 볼 필요도 없었고 큰소리로 떠들어도 누구 하나 그것을 탓하는 사람도 없었다.

미영은 오뎅바가 처음인 듯했다.

“이런 게 안주가 되나요?”

오뎅이란 게 겨우 해야 반찬 정도로만 생각하는 미영에게 오뎅을 안주로 술을 마신다는 게 생경스럽기도 하고 조금은 불만스럽기도 했다.

“오뎅바 처음이세요? 요즘 유행인데...오뎅이라도 다 같은 오뎅이 아니라구요. 모양도 다르고 재료도 다 다르거든요. 이것 보세요.”

영민은 마치 보물이라도 자랑하는 듯이 오뎅통에서 오뎅꼬치를 몇개 건져 미영에게 보여주었다. 영민의 설명처럼 오뎅은 한두 종류가 아니었다. 평범한 막대 모양부터 쭈글쭈글한 모양, 알록달록한 색깔, 생선, 새우 모양 등 십여 종류가 넘었다. 거기다가 오뎅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삶은 계란에 곤약, 두부, 어떤 건 오뎅 안에 국수가 들은 것도 있었다.

미영의 눈은 호기심으로 바뀌었고 부지런히 오뎅통에서 오뎅꼬치를 건져올려 입으로 가져갔다. 먹고 남은 오뎅 막대기가 미영의 앞에 쌓이는 만큼 소주잔도 비워졌다. 오뎅의 느끼함이 자연스럽게 소주를 마시게 한 것이다.

이미 한 병의 소주가 비워졌다.

“정말 술 한잔도 못해요?”

얼굴이 발그스레한 미영은 말투도 조금은 흐트러졌다.

“네, 정말이라니까요.”

“무슨 남자가 술도 못마셔요.”

“체질적으로 못마시는 걸 어떡해요. 뭐라드라...간에 알콜을 분해하는 효소가 없대요. 그래서 한잔만 마셔도 인사불성이 된다구요. 미영씨가 책임진다면 한번 마셔볼 용의는 있는데요.”

“여자가 남자를 어떻게 책임져요.”

“그래서 이렇게 안주만 먹는 거죠.”

영민이 오뎅꼬치 하나를 입안 가득 집어넣자 볼이 잔뜩 부풀은 게 마치 성난 복어 같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미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아세요?”

“뭘요?”

“웃는 모습이 예쁘다는 거요.”

그 말에 미영이 또 웃음을 터트렸다. 이상하게 이 남자의 말에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미영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평생 웃음이라고는 모르는 여자인 줄 알았어요.”

“하긴...”

미영은 가느다란 버지니아 슬림에 불을 붙이고 말을 이었다.

“언제 웃어봤는지 기억도 없네요. 특별히 웃을 일이 없었으니까요. 어쩌면 웃음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죠.”

“부럽군요.”

“네?”

미영이 무슨 뜻인가 영민을 돌아보았다.

“미영씨한테 웃음을 빼앗아간 사람 말이죠. 수락산에 유골로 뿌려진 남자, 그 사람 아닌가요?”

미영은 대답대신 허공에 자욱하게 담배연기를 뿜었다.

-오대호, 그런가? 그 사람 때문인가? 그 사람 때문에 웃음을 잃어버렸던가? 기억이 가물거린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행복했다고 느낀 건 아마 오대호와 같이 한 때인 것 같다.

미영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소주 한잔을 들이켰다. 평소에 쓰디쓴 소주가 달았다.

“그런데 부럽다는 건 무슨 뜻이죠?”

“미영씨 같은 여자한테 죽어서도 웃음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건 충분히 부러운 사실이죠.”

영민의 말에 미영이 피식 웃음 새나왔다.

“영민씨 같은 남자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건 홍콩에서 죽었다는 그 여자 때문인가요?”

미영의 엉뚱한 대답에 영민이 황망하게 돌아보았다.

“이러면 쌤쌤이죠?”

미영의 말에 영민이 비로소 경쾌하게 웃었다.

묘하게 서로의 감정을 드러내는 화답이었다. 그것이 진실인지 가식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서로 주고받은 한마디에 호감이 묻어 있었다.

“어머, 눈이 오네요.”

미영이 소녀처럼 손뼉을 치며 소리치자 영민이 창밖을 돌아보았다. 낮부터 낮게 깔린 잿빛 하늘은 기어코 눈을 뿌려댔다. 첫눈이었다.

오뎅바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일제히 창밖을 보며 소리를 질러댔다. 첫눈은 언제나 사람을 들뜨게 하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서로 건배를 하며 첫눈을 축복했다.

“우리도 건배해요. 같이 첫눈을 보게 된 것을 축하하며...”

영민이 콜라잔을 내밀자 미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피이...겨우 콜라로 무슨 건배를 해요.”

“나도 오늘 같은 날은 한잔 하고 싶지만 소주 한잔에 취해서 늑대로 변할까봐 참고 있는 거라구요.”

“순진한 줄 알았더니 그런 면도 있었나요?”

“나도 남자라구요.”

영민의 불끈하는 말에 미영이 깔깔대며 웃으며 소주잔을 내밀었다.

콜라잔과 소주잔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첫 랑데부다.

여자는 변한다.

누구 때문에. 혹은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미영은 그날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10대 소녀 같았다. 끊임없이 웃고 재잘거리는 미영이었다. 사실 영민도 그런 미영을 보고 내심 놀랄 정도였다.

미영이 소주 두 병을 비우고서야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영의 혀는 꼬부라져 있었고 다리는 풀려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두 사람의 머리와 어깨 위로 함박눈이 내려앉았다.

“눈도 탐스럽게 오네. 어때요, 우리 좀 걸을래요?”

미영이 영민의 팔짱을 끼었다. 그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마치 오래된 연인 같은 모습이었다. 당황한 건 오히려 영민 쪽이었다.

“시간이 꽤 됐습니다. 집에 가셔야죠?”

“집...그래, 집에 가야지. 그럼...대리를 불러야지.”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아냐...대리 부르면 돼.”

미영의 말투는 어느새 반쯤 반말로 변해 있었다.

“미영씨 같은 미인을 어떻게 대리운전사한테 맡겨요. 불안해서 안돼요.”

영민의 말에 미영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영민씨는 사람 기분 좋게 만드는 기술이 있나봐.”

“차 키나 주세요.”

빨간색 폭스바겐 비틀이었다.

미영은 운전석에 앉자마자 고개를 유리창에 기대 잠에 빠졌다. 영민이 그런 미영에게 안전벨트를 매주기 위해 몸을 미영 쪽으로 기울였다. 그런 영민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미영의 가슴에 닿았다.

특유의 샤넬넘버5의 향과 함께 미영의 숨소리가 전해졌다.

쌔근쌔근...안정적인 숨소리였다.

두근거리는 건 오히려 영민 쪽이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영민은 마치 나쁜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황급하게 미영에게 안전벨트를 채우고 운전석에 자세를 바로 잡아 앉았다. 내비게이션을 켜자 모든 출발점이 평창동으로 표시돼 있었다. 물론 내비게이션이 아니더라도 이미 미영의 집 정도는 알고 있는 영민이다.

첫눈은 역시 아쉬웠다. 금방이라도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을 듯한 기세로 퍼붓던 눈발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쳐 있었다. 비틀은 내비게이션이 친절하게 안내해 준 코스를 따라 평창동으로 접어들었다.

미영을 만나기 전 한달 동안 영민이 잠복한 곳이다. 그러나 영민은 한달 동안 미영의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가끔 미영이 탄 걸로 생각되는 벤틀리만 몇번 봤을 뿐이다.

벤틀리를 미행해봐야 미영이 가는 곳은 언제나 사무실이나 호텔같이 폐쇄된 장소였다. 차에서 내린 미영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건 순간이었다. 그것도 아주 먼거리였다. 영민은 겨우 해야 미영의 윤곽 정도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영민이 미영을 가까운 거리에서 본 것은 수락산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숨소리를 느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영민은 비틀을 미영의 집 앞에 세우고 미영을 보았다. 유리창에 기대 잠들은 미영의 옆 얼굴이 영민의 눈에 들어왔다. 

눈처럼 새하얀 목덜미 위로 둥근 턱선이 부드럽게 오버행어를 이루고 있었고 붉은 입술이 보였다. 고혹적인 입술이었다. 볼은 적당히 통통했고 가운데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콧날이 중심을 잡았다. 콧날 위로 잠든 눈이 보였다. 긴 눈썹에 종잇장처럼 얇은 눈꺼풀이었다.

아름다움이란 단어로 따진다면 단 한치도 빠질 수 없는 얼굴이었다.

유정도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문득 영민은 유정이 떠올랐다. 영민이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 매력적인 여자였다.

매력적인, 아름다운...

이상했다. 영민이 갖고 있는 유정에 대한 기억은 그런 추상적인 것뿐이었다. 

눈은 어떤 모양인지, 코는, 입술은...

구체적인 모양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최면에 걸린 것 같았다.

영민은  기억을 다잡으려는 듯 머리를 도리질했다. 그 순간 미영이 고개를 뒤척이며 영민 쪽으로 돌렸다. 

영민의 바로 눈앞에 있는 미영의 얼굴. 금방 코라도 닿을 듯한 거리였다.

영민은 숨이 턱 막혔다. 

미영의 붉은 입술에 빨려들 것만 같았다.

영민은 운전석을 박차고 차 밖으로 나왔다.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울컥, 영민은 금방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았다.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가 한순간에 기억 속에서 사라질 수 있다니...

알 수 없는 설움 같은 게 가슴에 밀려들었다.

그런 영민을 현실로 돌아오게 한 건 차고 문이 열리는 기계음이었다. 영민이 돌아보자 축대의 차고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나왔다. 30대의 검은 양복을 입은 말끔한 남자였다. 김실장이다.

물론 영민으로서는 김실장이 초면은 아니다. 미영을 미행하면서 언제나 미영의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는 걸 수차례 보아왔던 터였다.

김실장은 일단 차안의 미영을 확인하고 영민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이 차를 운전하고 오신 분입니까?”

“그렇습니다만...”

“고영민씨죠?”

“저를 어떻게...”

“회장님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회장님?”

영민은 미영이 회장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민의 표정을 보고 김실장은 아차 하는 기분이었다. 미영이 자신을 영민에게 어디까지 얘기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영을 회장님이라고 호칭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제가 모시고 있는 회장님이십니다. 전 김산(金山)이라고 합니다. 고영민씨에 대한 얘기는 회장님한테 몇번 들었습니다. 기원을 운영하신다고...오늘은 저녁을 같이 하시겠다는 연락을 초저녁에 받았습니다만 그 후로 핸드폰이 꺼져 있어 내심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러셨군요.” 

“이렇게 모셔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깐만 기다리시지요. 회장님을 안으로 모시고 댁까지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전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그냥 보내드리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내일 회장님이 아시면 절 꾸중하실겁니다.”

“하하...그러시다면 우리 입을 맞추지요. 김산씨가 절 집까지 태워다 준 걸로...전 신경쓰시지 말고 미영씨, 아니 회장님이나 빨리 안으로 모시세요. 술을 많이 드셨습니다.”

“그럼 오늘은 신세진 걸로 하겠습니다.”

김실장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말투나 행동이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영민은 그 정중함 속에 칼날처럼 예리하게 빛나는 김실장의 눈을 얼핏 보았다.

미영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숙취에 잠에서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이렇게 아침에 숙취가 있도록 술을 마신 건 태어나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미영이 식당으로 내려오자 가정부가 미리 끓여놓은 북어국을 황급히 내놓았다. 말할 것도 없이 속풀이 해장국이다.

“북어국이네요.”

“네, 김실장님이 지시하셨어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미영은 억지로 북어국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북어국 몇 술이 들어가자 나름대로 속이 풀리는 듯했다. 술꾼들이 아침에 해장국을 먹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식사도 좀 하시죠.”

어느샌가 김실장이 옆에 서 있었다.

“별로 생각이 없어요. 근데 어제 제가 어떻게 왔죠?”

“고영민이란 분이 운전해서 오셨습니다만...”

“댁까지 모셔다 드리지 그랬어요.”

“그러려고 그랬는데 극구 사양하시는 바람에...”

“그럼 그냥 가신건가요? 여긴 택시타려면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데 택시라도 불러드리지 않고...”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말속에 핀잔이 섞여 있었다. 이런 미영의 핀잔은 처음이다.

완벽에 가까운 김실장이지만 인간이다 보니 가끔 실수도 있었다. 그럴 때도 그저 빙긋 웃는 걸로 끝내는 미영이었다. 김실장으로서는 저으기 당황스런 상황이었다.

“죄송합니다. 미처 그 생각은...”

“죄송할 것까지는 없어요.”

미영의 말투는 메말라 있었다.

“그리고 한가지 드릴 말씀이...”

“뭔가요?”

“어제 제가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고영민씨한테 제가 무심코 회장님을 호칭했습니다만...”

“알았어요. 오늘 스케줄은 전부 취소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미영은 숟가락을 놓았다.

“미영씨...”

지도대국실에서 복기를 하고 있던 영민은 생각지도 않게 기원을 방문한 미영을 반갑게 맞았다.

“속은 좀 어때요?”

“죽을 것 같아요.”

“하하...어쩐지 오버페이스 하는 것 같더라니...”

“이거 미필적고의 아녀요?”

“네?”

“여자가 그렇게 술을 마시면 남자가 좀 말려야지...”

미영이 곱게 눈을 흘기자 영민이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암튼 나가요. 제가 복어국 사드릴게요. 복어국이 해장에 좋다고 하던데...”

“아녀요, 커피나 한잔 주세요.”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미영이지만 이곳 커피만은 제법 입에 맞았다. 블루마운틴과 콜롬비아를 1대2로 믹싱한 커피는 진한 맛에 향이 강했다. 영민이 직접 만든 커피다.

영민이 커피 두 잔을 가져오자 좁은 대국실안에 커피향이 가득했다. 미영이 커피 한모금을 머금자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김실장한테 얘기 들었어요. 절 태워주고 그냥 갔다구요. 참 김실장 어제 만나셨죠?”

“네, 김산이라고 하더군요.”

“절 여러모로 도와주는 사람이어요. 사실 제가 여러가지 하는 일이 많아요. 주제넘게 회장 직함을 갖고 있죠.”

미영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그 동네 택시 타기도 힘든데 고생하신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말 하려고 온 거여요.”

“고지식한 친구군요. 김실장 그 사람 말여요. 날 집에까지 태워다 준 걸로 입을 맞추자고 그랬는데 고지식하게 미영씨한테 말했나봐요.”

“그런 사람이어요. 서쪽을 보고 있으라고 하면 죽을 때까지 서쪽만 쳐다보고 있을 사람이죠.”

“그나저나 그 말하려고 오다니...전화를 해도 되는 걸...참, 그러고 보니 우리 전번도 모르고 있었네요. 핸드폰 줘 봐요. 제 번호 찍어줄게요.”

“영민씨 걸 줘요. 내가 찍어줄게.”

여자는 묘하게 자신의 물건을 남자에게 맡기는 걸 꺼린다. 특히 핸드폰은 더욱 그렇다. 미영이 영민의 핸드폰에 자신의 번호를 찍자 미영의 핸드폰이 울어댔다.

“무슨 번호가 이렇게 어려워.”

영민의 번호를 확인한 미영이 비명을 질렀다.

“8574에 2631...”

“1번부터 8번까지 전부 다른 숫자로 조합했어요. 잊어버리기 전에 주소록에 입력해요.”

“하고 있어.”

미영은 서툰 손동작으로 버튼을 눌러 이름을 입력하고 있었다. 마치 초등학생이 한글을 처음 쓰는 것 같이 끙끙대는 모습이었다.

“뭐라고 했는데요.”

“뭐겠어, 고영민이지.”

이름을 입력하는 게 당연하다는 미영의 말투다.

“영민씨는 이름으로 입력 안해?”

“요즘 이름으로 입력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애칭을 입력하죠.”

“애칭? 뭐라고 입력했는데, 어디 봐.”

미영이 잽싸게 영민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술고래

미영의 전번에 입력된 이름이다. 그걸 본 미영이 비명을 질러댔다.

“캭~ 술고래가 뭐야, 안돼, 바꿔!”

“싫어요.”

“이리 내놔, 빨리 지워.”

미영이 핸드폰을 뺏으려 하자 영민은 안 뺏기려고 핸드폰을 들은 손을 높이 치켜세웠다. 뺏으려는 사람과 안 뺏기려는 사람, 두 사람이 하나로 엉켰다. 미영이 영민의 손을 잡은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놓였다.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이 비쳤다.

서로의 체취가 느껴졌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렸다.

누가 먼저였을까, 알 수 없지만 서로는 하나가 되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하나로 포개졌다.

하나가 된 두 사람.

그 두 사람 위로 초겨울의 따뜻한 햇살이 포근하게 드리워졌다.  <5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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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2  본 내용은 작가의 순수 창작물이므로 무단복제나 도용, 표절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