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동의 소문은 광속이다. 그날 해가 중천에 뜨기도 전에 다움이와 백구두의 얘기는 오로동에 세 살 먹은 아이까지 알 정도였다.
독왕은 일손을 놓은 채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도무지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다움이의 얘기를 듣고 왜 화가 치미는지...
다움이의 헤어샵은 독왕의 양복점 건너편이다. 문만 열면 빤히 보인다. 그래서인지 다움이와는 평소 오빠 동생으로 지내왔다. 정말 아무 감정 없이 오빠이고 동생이었다. 전혀 여자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연정이나 흠모 따위는 아예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다움이가 그 사기바둑을 두는 노인네하고 그런 사이란 걸 듣는 순간 묘한 마음이 속을 뒤집었다. 마치 애인을 뺏기는 그런 기분이었다.
사실 독왕은 여자를 돌로 봤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자를 증오했다.
젊은날 독왕은 꽤 잘나가는 재단사였다. 한달 벌이가 웬만한 월급쟁이 서너 배는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잘 벌면 뭐하는가. 밑빠진 독이었다. 버는 대로 술집이나 도박판에 퍼다 주었다. 오늘 쓰고 내일 또 벌면 되지, 이게 독왕의 생각이었다. 그러니 서른이 넘도록 방 한칸 없이 떠돌았다.
그러다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났다. 미싱사인 여자는 독왕보다 10살이나 어렸다.
여자를 만나고 독왕은 마음을 다잡았다. 집이라도 하나 사서 결혼할 각오였다. 그런데 그 돈이란 게 또 묘했다. 펑펑 쓸 때는 그렇게 잘 벌리던 돈이 좀 모으려니까 도무지 벌리지가 않았다. 그러던 판에 여자가 덜컥 임신을 했다.
불러오는 여자의 배를 보고 독왕은 집이고 뭐고 코딱지만한 단칸방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딸을 낳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었다. 3년, 독왕으로서는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딸이 3살 되던 해 우연히 딸아이의 혈액형을 알게 되었다.
B형.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O형인 자신과 A형인 아내 사이에 절대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이었다.
독왕은 딸의 혈액형을 다시 검사했다. 역시 B형이었다.
독왕은 아내를 족쳤다.
딸아이의 아빠는 독왕의 친구였다. 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친구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친구였다.
독왕은 눈이 뒤집혔다. 눈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두 년놈을 죽일 생각에 칼을 들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여자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친구이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딸이 옆에서 울고 있었다.
독왕은 그 길로 집을 나와 술독에 빠졌다. 3일을 주구장창 술을 마셨다. 아무리 취해도 머릿속에는 아내와 딸 생각이었다.
결론은 용서였다.
그래, 잊자, 내 머리를 망치로 때려서라도 잊어버리자.
독왕은 3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내는 없었다. 딸도 없다. 아내는 그렇게 사라졌다. 친구도 사라졌다.
독왕은 증오했다.
이 세상에 여자를 창조한 신(神)을...
그리고 피조물인 여자를...
벌써 8년전이다.
이제는 그 증오가 조금은 흐릿해졌지만 독왕은 여전히 여자를 기피했다. 그런데 다움이가 그 노인네하고 그런 사이란 게 뭔 상관인가. 왜 질투심이 나는가 말이다.
독왕은 알 수 없는 자신의 감정에 화가 났다.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 끄고 재단가위를 들었다. 이럴 땐 아무 생각 없이 일하는 것이 최선이다.
막 일을 하려는 순간 입구가 시끄럽다. 독왕이 돌아보자 다움이다. 양복점 문을 열고 다움이와 백구두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글쎄, 들어오라니까...”
“다움아, 난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들어와.”
다움은 기어코 백구두를 끌고 양복점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어, 오빠 우리 이 사람...”
“어? 어제 기원에서 본 친구구먼. 양복점을 하는구먼.”
다움이의 말을 끊고 백구두가 먼저 나섰다.
“네...”
독왕의 대답은 왠지 퉁명스러웠다.
“두 사람 아는 사이야?”
“어제 기원에서 봤었지.”
“구면이면 잘됐네. 오빠 우리 이 사람 양복 하나 맞추려고...”
“글쎄, 난 필요없다니까.”
“자긴 가만히 있어. 머리는 내가 양보했으니까 옷은 자기가 양보해.”
자기...거참, 아버지뻘로 보이는데 자기라니...
독왕은 속으로 기가 찼다.
“오빠, 하얀색으로 옷감 제일 좋은 걸로...오빠 실력 좀 발휘해서 잘 뽑아줘.”
“그러지.”
독왕의 말투는 심드렁했다.
“언제까지 되는데.”
“일주일은 걸려.”
“어휴, 뭐가 그렇게 오래 걸려. 좀 빨리 해줘.”
“일이 밀려 있어서...”
“오빠, 다움이가 부탁하는데두 안돼? 응?”
다움이는 독왕의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렸다.
“아무리 빨리해도 4일은 걸려.”
“그래, 4일이면 내가 봐줬다. 대신 최고로 뽑아줘.”
“알았어.”
“그럼 치수재야지. 당신 치수재고 샵으로 와. 나 샵에서 일 보고 있을게...오빠, 부탁해. 알았지?”
다움이는 백구두를 남겨둔 채 휑하니 나갔다.
“거참, 여자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똑같군. 하고 싶은 건 언제나 저렇게 막무가내니...”
“치수나 재시죠.”
자신의 말에 딴청인 독왕의 말투에 백구두는 뻘쭘해졌다. 몸을 재면서도 독왕은 침묵이었다. 원래 치수를 잴 때는 손님에게 이런저런 얘기로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 예의다. 그래야 몸이 릴렉스 하게 되면서 제대로 된 치수가 나온다. 그런데 지금 심정에 독왕의 입이 열릴 리가 없다. 그저 속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젠장, 키는 난쟁이 똥자루만해가지고...남들 클 때 대체 뭐한 거야. 육이오 때 대포소리에 놀라 쪼그라들었나. 그래도 가슴은 제법 두툼하군. 가슴 두툼하면 뭐해. 남자는 뭐니뭐니해도 하체가 튼튼해야지. 엉덩이는 처진 데다가 이 숏다리는 뭐야. 백설공주에 나오는 난쟁이도 이것보다는 낫겠다.
“양복일은 언제부터 했소?”
백구두의 느닷없는 질문에 독왕은 마치 속마음이라도 들킨 듯이 깜짝 놀랐다.
“오래 됏습니다만 그건 왜 묻는겁니까?”
역시 퉁명스런 말투다.
“허허...뭐 별뜻은 없어요. 왠지 자질하는 손이 긴장된 것 같아서 말이오.”
“긴장이라니요.”
백구두의 말에 독왕이 발끈한다.
“내가 사람을 잘못봤나. 냉정한 줄 알았더니...”
백구두의 말에 독왕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평상시의 자신이 아니다. 스스로 이성을 잃은듯했다. 이런 보잘것없는 노인한테 이런 모습이라니...
독왕은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다. 그런 부끄러움이 자신을 도발시켰다.
“어제 한 말씀 아직도 유효합니까?”
“어제 한 말이라니...”
“바둑 말입니다.”
“아...바둑. 물론 나야 좋지.”
“오늘밤 어떻습니까?”
“그래, 내 기원에서 기다리지.”
어느새 백구두의 말투는 하대로 바뀌어 있었다. 독왕이 힐끗 백구두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백구두의 눈빛은 여전히 그윽했다.
10시가 넘은 늦은 시간인데도 기원에는 몇몇 사람들이 바둑을 두거나 관전을 하고 있었다. 바둑을 두는 사람이나 관전을 하는 사람이나 건성이었다. 그들은 오직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문쪽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독왕이었다.
독왕과 백구두와의 일전. 그걸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독왕이 속시원하게 백구두를 박살내는 걸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은 백구두에게 한번쯤 돈을 잃은 피해자들이었다.
처음에 백구두가 독왕과 일전을 벌인다는 말을 듣고 입에 거품을 물고 광분했다. 백구두가 사기꾼이라는 것이다. 독왕이라면 오로동 최고수인데 그런 독왕과 호선이라면 6급이 말이 되는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없게 생겼다. 어차피 이미 독왕도 6급이라고 말해놨으니 더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더군다나 백구두가 다움이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데 어떻게 막 대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울며겨자먹기로 분을 삭혔다. 단지 자기들 대신 독왕이 복수를 해주길 바랄 수밖에...
드디어 기원 문이 열렸다.
독왕이다.
사람들은 일제히 독왕한테 시선을 꽂았다. 우당탕은 마치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신 듯이 반겼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일 때문에...”
독왕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한곳에 시선을 박았다. 저만치 창가에 앉아있는 백구두였다. 백구두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명상에 잠긴 듯이 앉아있었다.
독왕은 잠깐 심호흡을 하고 백구두 쪽으로 걸어갔다.
“왔나.”
눈을 감고 있던 백구두는 독왕이 가까이가자 귀신같이 알아맞혔다.
여우같은 노인네...
독왕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독왕이 자리에 앉자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상관없네. 어차피 인생 자체가 기다림 아닌가. 각설하고 어떻게 둘까?”
“말씀하시죠.”
“가난한 사람이 큰돈 있겠나. 10만에 2만으로 하지. 불계는 50만.”
주변에 구경하는 사람들이 입을 쩍 벌린다.
기본 10만에 방당 2만원짜리 바둑이다. 당시로는 엄청나게 큰 판이었다.
“적당하군요.”
바둑을 두기 전부터 두 사람의 기세가 부딪친다.
돌을 가리자 독왕이 백이다.
이미 서로가 선수임을 아는 이상 이것저것 눈치볼 것 없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수가 동원된다.
실제 바둑 외에 비열한 암수도 등장한다.
계가 때 은근슬쩍 돌을 밀어 한두 집을 늘리는 건 기본이고 이미 놓여진 바둑돌을 슬쩍 건드리거나 들어내서 죽은 돌을 살리기도 하고 멀쩡히 살아있는 돌을 죽이기도 한다. 상대방이 알면 바둑둘 때 흔히 할 수 있는 실수로 넘긴다. 모르면 당한다. 그래서 선수들끼리의 바둑은 피를 말린다. 바둑 두는 것 외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한다.
그 피말리는 대국은 다음날, 또 다음날까지 계속됐다. 하루하루 지나자 구경꾼들도 늘었다.
삼일째 되던 날은 오로동의 모든 남자들이 다 온 듯했다. 새벽인 데도 기원은 발디딜틈 없이 꽉 찼다. 우당탕은 뜻하지 않은 수확에 또 입이 찢어졌다.
두 사람의 바둑은 일진일퇴, 치열하게 승패를 주고받는다.
승패로 따지면 거의 비슷했다. 그러나 실제 손익에서는 독왕이 많은 손실을 입었다. 3일째까지 200만원 넘는 돈을 잃었다.
“오빠.”
다움이가 백구두의 손을 끌고 양복점으로 들어왔다.
“양복 다 됐지?”
재단을 하던 독왕은 대답대신 한쪽 벽면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벽에는 눈처럼 하얀 양복이 걸려있었다.
양복을 만져보며 다움이가 감탄을 했다.
“옷감 진짜 좋은데, 자기야 한번 입어봐.”
“집에 가서 입지 뭐.”
“어휴...여기서 입어봐야 잘못된 거 있으면 고치지.”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암튼 한번 입어보세요.”
“그럼, 입어볼까.”
양복으로 갈아입은 백구두는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백구두는 묘하게 하얀 양복이 잘 어울렸다. 그걸 본 다움이가 감탄을 한다.
“당신, 정말 멋있어.”
“허허...솜씨가 좋군. 지금까지 입어본 양복 중에서 최고인 것 같아.”
“당신도 그렇지? 내가 봐도 최고인 것 같아. 역시 오빠가 최고야.”
사실 독왕은 지금까지 만든 양복 중에서 가장 정성을 들인 작품이었다. 재단에서부터 단추 하나까지 온 신경을 집중했다. 흠을 잡히고 싶지 않았다. 저 꽤재재한 노인에게 최고를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은 죽을 때까지 이런 양복은 입어보지 못할 것이란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은 지고 싶지 않은 승부였다.
양복 값을 지불한 다움이가 문득 생각난 듯 한마디를 한다.
“참, 그리고 오빠하고 당신, 바둑 좀 적당히 둘 수 없어? 요즘 오로동 여자들 난리야. 두 사람 바둑 때문에 전부 과부되게 생겼다고. 오로동 남자들 밤만 되면 기원 가서 새벽 늦게 들어온대. 두 사람 바둑두는 거 구경하느라고...무슨 원수졌어? 뭘 그렇게 죽자살자 두는데...당신, 바둑두는 거 오늘이 마지막이야. 오빠도 알았지?”
“허허...이거 무서워서 원...독왕, 어떤가? 이 사람이 이러는데 말이지.”
“어차피 나로서도 오래할 수 없는 승부입니다. 벌써 사흘째 한숨 못 잤습니다. 오늘 한판으로 끝내지요?”
“단판승부라...언제 들어도 가슴 설레는 말이지. 좋아, 그러지.”
“그럼 이따 뵙지요.”
두 사람의 대화에 다움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무지 남자는 이해할 수 없는 동물이다.
기원을 가득 매운 사람들은 두 대국자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 사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얗고 한 사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맣다. 하얀 양복을 입은 백구두와 검은 양복을 입은 독왕이다. 백구두는 독왕의 옷차림에 자못 뜻밖이란 표정이었다.
“단판입니다.”
“그러지.”
독왕은 돈다발을 꺼내놓았다.
“500입니다. 어르신이 가지고 있는 돈이 이 정도일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허허...역시 선수는 다르군.”
백구두도 돈다발을 꺼내 놓았다. 500이었다.
돈다발을 본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1000만짜리 바둑.
선수인 독왕과 백구두도 이런 큰판은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데 일반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꿈에도 볼 수 없는 판이다. 사람들의 침 삼키는 소리가 합창처럼 들렸다.
돌을 가리자 옷색깔과 같다.
독왕이 흑, 백구두가 백이다.
바둑은 처음부터 난전이었다. 독왕이 곳곳에서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싸움마다 독왕은 실속이 없었다. 백구두는 교묘하게 살면서 집을 챙기고 독왕은 껍데기만 남았다.
희망을 걸 곳은 좌변뿐이다. 좌변의 백 8점을 잡는다면 역전이다. 8점을 살리느냐 잡느냐 공방은 둘러싸고 있는 돌을 서로 끊고 끊긴다. 한수만 삐끗해도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신은 백의 편이었다. 끊어서 양쪽으로 갈라진 흑의 돌들은 백이 한수 가일수하면 축이었다. 흑선이지만 한수로 두개의 돌이 축으로 몰리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길게 절망의 탄식을 했다.
백구두의 표정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둘 중 하나만 잡으면 8점은 자동으로 산다.
백의 승리는 부동이다.
그때 백구두는 한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독왕을 보았다.
무얼 저렇게 보는가. 아무리 봐야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은가.
백구두는 다시 한번 판을 보았다.
순간 백구두의 눈에 확 들어오는 곳!
현재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곳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어느 지점. 그곳을 발견한 백구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치 우주처럼 광활한 허공에 있는 한곳. 그 허공의 한곳이 양축을 예방하는 축머리였다.
진신두(鎭神頭).
바둑인들이 전설처럼 말하는 진신두였다.
한참을 바둑판을 응시하던 독왕이 고개를 들어 백구두를 보았다.
독왕의 눈은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이봐, 영감. 이 세상은 넓지. 넓은 만큼 알 수 없는 고수들이 널려 있다구.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목숨은 끝난 거야. 지금까지 즐거움은 나의 배려라고 생각해. 끝은 고통 없이 보내주지.
백구두는 절망했다. 그리고 절망은 비굴로 바뀌었다. 애원을 하고 있었다.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독왕은 백구두의 눈을 차갑게 외면하고 돌을 집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떠올랐다.
독왕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누군가를 머릿속에서 지우려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누군가는 더욱 또렸해졌다.
독왕은 고개를 들어 백구두를 보았다.
거의 울듯이 애원하는 얼굴.
다움이었다.
독왕은 가만히 1의1에 돌을 놓았다.
다음날 독왕은 정신없이 바빴다. 그동안 밀린 일을 하느라 점심조차 거르면서 손을 놀렸다.
“바쁘구먼.”
해질 무렵 뜻밖의 방문객이 있었다.
백구두였다.
“웬일입니까?”
독왕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일을 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제 고마웠네.”
“고마울 것 없습니다. 당신 때문은 아니니까.”
“허허...알아, 내가 아네.”
안다고? 당신이 뭘 알아.
독왕은 속으로 투덜댔다.
“그렇다고 날 너무 미워하지 말게. 짧은 인연이지만 떠나면 생각날 테니까.”
떠나다니...
독왕은 비로소 일손을 멈추고 백구두를 돌아보았다.
“떠나다니요? 어디 가십니까?”
“자네도 알 텐데...나같은 인간, 한곳에 머무를 수 없다는 거...”
“다움이는...? 다움이도 알고 있습니까?”
“허허...어떻게 말하겠나. 말하면 가게 놔두겠나.”
순간 독왕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백구두의 멱살을 잡았다.
“이 나쁜새끼!! 다움이 가슴에 한번 못질을 하면 됐지 또 못질을 하겠다는 거야! 어딜 간다고! 어딜 떠난다는 거야! 당신 못가! 죽어도 여기서 죽어!”
“이봐, 다움이 하고 내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나하고 다움이는 생각하는 것도 사는 방식도 달라. 난 정상적으로 살 수 없는 인간일세. 지금이야 그리움과 반가움에 죽고 못살지. 모르지만 일년, 아니 한달만 지나보게. 날 벌레보듯 쳐다볼 걸세. 그땐 서로에게 상처만 줄 뿐이야. 차라리 지금 조금 아픈게 나아. 지금 떠나면 그래도 추억이라도 남지 않겠나. 그리고 사실 여자하고 20살 차이면 나도 자신 없고 말일세.”
마지막 말에 백구두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백구두의 멱살을 잡았던 독왕의 손에 힘이 풀렸다.
“자네 다움이 좋아하지?”
“뭐요! 좋아하긴 누가 좋아한다는 거요!”
백구두의 말에 독왕이 속마음이라도 들킨 듯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허허...아무래도 좋네. 단지 부탁 하나 하려고 말일세.”
백구두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한눈에 봐도 반지 케이스임을 알 수 있었다. 케이스는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이거 반지일세. 몇년전 명동의 유명한 쥬얼리샵에 진열되있던 거네. 다움이가 이 반지를 무척 갖고 싶어 했는데 나한테 그럴 기회가 없었다네. 어제 자네가 도와줘서 목돈이 생긴 김에 혹시나 하고 가봤더니 아직까지 안 팔리고 있더구먼. 아마 다움이 반지가 될 운명인 모양일세. 이거 자네가 다움이 손가락에 끼워주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왜...”
“난 꼭 이 반지를 다움이에게 주고 싶지만 그럴 입장이 아니니 자네한테 부탁하는 걸세. 자네 아니면 누구한테 부탁하겠나.”
“전 싫습니다.”
“싫으면 쓰레기통에 버리게나. 여기 두고 갈 테니.”
백구두는 반지 케이스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양복점을 나섰다.
독왕은 백구두를 따라 황급히 나갔다. 그러나 더이상 부르지도 잡지도 못했다. 잡는다고 떠남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다.
백구두는 뒤도 안돌아보고 마치 아무 상관없이 지나가는 사람처럼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그 등뒤로 길게 이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날 너무 미워하지 말게. 떠나면 그리워질 테니까...
백구두의 말이 메아리처럼 독왕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짧은 만남이지만 진한 아픔이 몰려왔다.
11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지만 다움이의 헤어샵은 훤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아마 백구두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독왕은 몇번을 망설이다 양복점 문을 닫고 헤어샵으로 갔다.
“오빠.”
턱을 괴고 망연히 있던 다움이가 독왕의 뜻밖의 방문에 놀랐다.
“웬일이야, 이 시간에...”
“아직까지 문을 안 닫고 있어서...”
“어, 그 사람 기다리고 있는데 안 오네. 연락도 없고...”
“저기...”
“왜?”
“...”
독왕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 사람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기다리지 마.”
독왕의 말에 다움이는 화들짝 놀랐다.
“무슨 말이야? 기다리지 말라니...”
“떠났어.”
“떠나? 누가?”
누가 떠났다는 건지 안다. 알면서도 다움은 묻는다.
떠났다는 걸 부정하고 싶다. 부정해도 아닌 걸 알면서 묻는다.
“이거...”
독왕은 반지 케이스를 내밀었다.
“이걸 전해달라고...그리고...떠났어.”
다움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반지 케이스를 받아 뚜껑을 열었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화려한 반지였다.
몇년전 자신이 무척 가지고 싶어 하던 반지였다.
반지만 있으면 뭐하는가
끼워줄 사람이 없는데
반지는 끼워주는 사람이 주인이다
영원히 당신을 사랑하겠어요
라는 언약의 상징이다
이미 주인을 잃은 반지
이게 무슨 소용인가.
다움이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오열을 했다.
독왕은 조용히 헤어샵에서 나왔다.
담배를 입에 문다.
나는 또 뭔가.
왜 사랑은 이렇게 안개처럼 다가와 가슴을 아프게 하는가.
환한 쇼윈도우 안에서 오열하는 여자와 어두운 밖에서 아파하는 남자.
그렇게 누군가에게 아픈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주인 잃은 반지’ 편 끝>
(주인잃은 반지 1편부터 보기) <== 여기클릭!!
('88오로다방 처음부터 보기) <== 여기클릭!!
2009-09-05 본 내용은 작가의 순수 창작물이므로 무단복제나 도용, 표절을 금합니다..gif){kind=lo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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