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향의 동생들은 일주일 동안 난리법석을 피우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동생들이 있는 일주일 동안 요란스럽고, 귀찮고, 짜증스럽기도 했지만 어쩌면 처음으로 사람 사는 집 같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덕분인지 미향의 상태가 상당히 좋아졌다. 무덤덤한 얼굴에 조금이나마 감정도 살아났고 말수도 부쩍 많아졌다.

무엇보다도 미향이 치매란 걸 알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씩씩하게 이기려는 것이 준석에게는 큰 힘이었다. 아마 미향의 어머니가 치매였기 때문에 치매에 대한 공포가 보통사람보다는 덜한 것 같았다.

그런 미향 때문인지 요 며칠 준석은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닭장 청소를 하면서도 연신 콧노래가 나왔다. 닭똥냄새도 이 세상 어느 향수보다도 더 향기로웠다. 아마 태어나서 이렇게 좋은 기분은 처음이지 싶다. 

준석은 모든 것에 감사했다. 헌신적으로 미향의 수발을 들어주는 정숙이, 일주일에 한번씩 병원 일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까지 직접 와서 미향을 진찰해주는 의사, 그리고 치매에 좋다고 영지버섯, 호두, 잣 등을 바리바리 싸서 가져다주는 동네사람들...

그러고 보니 준석은 혼자가 아니었다. 어느 순간 준석의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같이 아파하고 같이 미향을 보살피고 있었다. 감사해야할 사람들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복인가. 그들에게 죽을 때까지 빚을 갚을 생각이다.

“형부! 형부!”

준석의 흥얼거림이 멈춘 건 헐레벌떡 양계장으로 뛰어들어온 정숙 때문이었다. 준석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또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언니가...”

정숙은 가쁜 숨에 말을 끊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언니가 왜? 무슨 일이야!”

“피서, 피서를 가고 싶대요. 계곡이요, 계곡.”

“계곡, 계곡을 가고 싶다고...? 그...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미향이가...”

“네...그렇다니까요. 티브이에서 계곡이 나오니까 자기도 가고 싶다고 그러잖아요.”

계곡...미향이가 계곡이 가고 싶다고...

뭘 하고 싶다, 어딜 가고 싶다, 이런 말을 들어본 게 얼마만인가. 기억조차 할 수 없다. 

준석의 입은 더 이상 찢어질 수 없을 만큼 찢어지고 있었다.

“가야지. 미향이가 가고 싶다면 가야지. 암, 가고 말고. 가자고...”

“지금요?”

“그럼 지금 가야지. 미향이 마음이 언제 바뀔지 모르잖아. 당장 준비하자고...아니, 준비할 것도 없어. 먹을 건 가서 사먹으면 되니까. 정숙씬 언니 옷하고 물건만 챙겨.”

“알았어요, 형부.”

두 사람은 신이 났다. 신바람에 두 사람은 번갯불에 콩볶아 먹듯이 채비를 하고 미향과 함께 계곡으로 떠났다.

그렇게 준비하고 계곡에 도착하는 데는 불과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피서철이 지난 계곡은 한적했다. 미향은 계곡에 오자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준석과 정숙도 미향이와 같이 어린아이가 되었다.

세 어린아이는 계곡물에 뛰어들어 물장난에 신이 났다. 그들이 튀긴 물방울은 늦여름 햇살에 보석처럼 빛났고 그들의 웃음소리는 텅 빈 계곡에 쇼팽의 피아노연주처럼 울려퍼졌다.

기쁨

평화

행복

그런 것들은 왜 그렇게 짧은 건지...행복은 순간이었다. 잠깐이었다. 준석과 정숙이 서로 물을 튀기며 목젖이 보이도록 웃은 것은...1분도 채 되지 않은 아주 짧은 순간 미향에게 그들의 모습은 아주 긴 시간으로 보였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두 사람이 즐거워 하는 걸로 보였다. 두 사람은 연인이었다. 미향의 눈에는...

준석이 정숙이 뿌린 물에 얼굴을 돌리고 눈을 부비는 순간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준석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느 순간 달려든 미향이 아귀처럼 정숙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챘다.

“아아아악...언니, 언니 왜 그래!!”

“여보!!”

“이 나쁜년!! 이 개같은 년!! 니년이 감히 우리 남편을 꼬셔!! 죽어!! 죽어!! 너같은 창녀는 죽어도 싸!”

“여보!! 미향아! 오해야!”

준석이 간신히 미향을 정숙에게서 떼어냈지만 미향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온갖 악담을 정숙에게 퍼부어댔다.

“내가 진즉부터 알아봤어!! 니년이 남편죽고 우리 신랑한테 눈독 들이는 거...!! 이 더러운 년 어디서 암내를 풍겨!! 당장 꺼져!!”

“언니, 오해야, 진짜 오해야.”

“오해고 뭐고 당장 꺼져!! 어디가서 뒈져버리란 말이야!!”

준석은 참담한 표정이었다. 

깜빡 잊고 있었다. 미향은 변명할 상대가 아니다. 

정숙은 울음을 삼키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준석은 가장 큰 조력자 한명을 잃었다. 마치 한쪽 날개가 꺾이는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망연자실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이제부터 정숙의 몫은 준석이 맡아야했다.

준석은 양계장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하루종일 미향에게 매달렸다. 할일이 태산이다. 밥을 차리고 약을 먹이고 옷갈아 입히기, 목욕, 운동은 기본이다. 그 외에도 책을 읽어주고 대화하기, 음악과 영화감상, 손을 움직일 수 있는 놀이, 사진을 보고 추억 회상하기...심지어는 섹스도 간병의 하나였다. 섹스시 분비되는 엔돌핀을 얻기 위해서였다. 

엔돌핀은 우울증 치유효과와 면역성항체를 갖고 있는 내뇌분비물이다. 치매환자와 섹스를 한다는 건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었다. 만약 신이 준석의 정성을 보았다면 신도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은 없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미향의 상태는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말수도 부쩍 줄어들고 딴사람이 되는 시간이 늘어났다. 심지어는 밥을 삼키는 걸 잊어버려 입안에서 우물거리고만 있었다. 밥을 씹지 못하거나 삼키지 못하는 건 치매환자의 말기증상이다.

“난...얼마나 살 수 있을까...”

티브이를 보던 미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에 준석이 흠칫 미향을 보았다.

“올해를 넘길 수 있을까...”

“무슨 말이야, 그게.”

“나 알아, 이제 말기란 거...엄마가 치매였는데 모르겠어.”

“...”

“죽는다는 거...그런 건 두렵지 않아. 억울하다는 생각도 없어. 단지...당신한테 미안해. 괜히 나같은 여자 만나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준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준석이 소리를 지르든 말든 미향은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나 성격도 안 좋고 고집도 세고 잘난 척도 잘하고...무엇보다 당신한테 애를 낳아주지 못한게 미안해. 당신 닮은 사내라도 낳아줬으면...”

미향은 불임이었다. 나팔관이 문제였다.
준석은 미어지는 마음에 앉아있을 수가 없어 벌떡 일어났다. 물이라도 한잔 마셔야 속이 뚫릴 것 같았다. 냉장고로 걸어가는 준석의 등 뒤로 메마른 미향의 말소리가 들렸다.

“우리 바둑 두자.”

그 말에 멈칫하고 준석은 미향을 돌아보았다.

“바둑...”

“응, 바둑 두자.”

그러고 보니 바둑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준석과 미향은 바둑광이었다.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티브이는 언제나 바둑티브이에 고정돼 있었고 대화의 절반은 바둑얘기였고 밤을 새도록 바둑 둔 것이 부지기수였다.

그 사건은 작년 11월에 있었던 엘지배 준결승이었다. 

이창호와 구리.

준석에게 이창호는 영웅이었고 신이었다. 반대로 미향은 절대적인 구리 팬이었다. 당연히 두 사람의 응원은 뜨거웠다. 일을 하다가도 들어와 대국상황을 보고 목이 터져라 응원을 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그 모습을 봤더라면 미쳤다고 혀를 찼을 것이다. 바둑을 보면서 스포츠 응원을 하듯이 하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 준석과 미향 두 사람뿐일 것이다.

어쨌든 결과는 백을 쥔 구리의 한집반승. 준석은 입이 댓발이나 튀어나왔고 미향은 의기양양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미향의 말이 문제였다.

“이제 이창호도 갔어.”

그 말에 준석의 뚜껑이 열렸다.

“뭐야! 이창호도 갔어? 가다니, 가긴 어딜 가! 그리고 이창호 사범님이 뉘집 강아지 이름이야!! 이창호가 뭐야!! 이창호가!!”

“왜 큰소리를 쳐. 당신도 구리라고 그러잖아. 그런데 이창호를 이창호라고 부르면 안된다는 법 있어!”

당연히 미향도 지지 않는다.

“구리하고 이창호 사범님하고 비교가 돼!! 구리는 이창호 사범님 발바닥에 때만도 못해. 알어?”

“뭐야! 발바닥에 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당신!”

“이 여자가 엇따대고 삿대질이야. 교양없이!”

“야!! 그래! 넌 교양 많아서 사람한테 발바닥에 때라고 그러냐! 이 코딱지만도 못한 인간아!”

“뭐야!!”

결국 두 사람은 주먹다짐에 집안 살림이란 살림은 전부 부수는 엄청난 전투를 벌였다. 아마 결혼한 이후로 가장 크게 싸운 싸움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한테 바둑은 없었다. 바둑티브이는 끊고 바둑판은 창고에 처박아 버렸다. 물론 바둑에 바자도 두 사람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런데 미향이 바둑을 두자고 한다.

준석은 조금 전까지 찢어지는 가슴은 까마득하게 잊고 득달같이 창고에서 바둑판을 꺼내왔다.

준석과 미향이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이 얼마만인가. 준석은 마치 첫 데이트에 나온 사람처럼 설레었다.

“어떻게 둘 거야?”

“호선.”

“정선, 호선으로는 한번도 못 이겼잖아.”

“호선.”

미향과 준석은 거의 두 점 치수 바둑이다. 정선으로도 열판 중 여섯 판은 준석이 이겼다. 그런데도 미향은 부득부득 호선을 우겼다. 호선으로 한번도 준석을 이겨본 적이 없는 미향이다. 그러나 고집만은 미향을 이길 수가 없다. 돌을 가리자 미향이 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