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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두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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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두는 여자
2009-06-16 조회 5476    프린트스크랩
 


벌써 30년도 훨씬 이전 얘기다. 서울 근교 남양주에 천마산이란 산이 있다. 지금은 스키장이 들어서 있고 심신수련장이 마련되어 엠티나 단체수련회로 많이 찾는 산이지만 30여년 전에는 산세가 험악해 서울의 등산객이나 가끔 찾는 그런 산이었다.


그 산 중턱에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이 있었는데 유리문에 빨간 페인트로 쓴 ‘막걸리’라는 글씨로 그곳이 주점이란 걸 겨우 알 수 있었다. 


주점 안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길게 담배연기를 뿜으며 공허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금방 눈이라도 뿌릴 듯한 하늘은 4시도 채 안됐는데 벌써 어두컴컴해지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될 모양이다. 겨울이 되면 사실 이 쥐꼬리만한 장사도 끝이다. 먹고살기 바쁜 세상에 누가 이 겨울에 이런 외진 산을 찾아오겠는가.


그래도 지난 몇 달 제법 벌어놓은 돈이 있어 여자는 먹고사는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다행이란 생각이다. 사실 지난 3개월 동안 여자는 100만 원에 가까운 많은 돈을 벌었다. 지금 돈가치로 따지면 5천만 원도 넘는 돈일 것이다.

그렇게 돈을 벌은 데는 서울에서 전당포를 한다는 박기술이란 작자가 단단히 한몫을 했다. 그저께도 여기서 20만 원이 넘는 돈을 내놓고 갔다. 실상 내놓고 갔다기보다도 뜯기고 간 것이다.


박기술을 처음본 건 늦더위가 기승을부리던 9월이었다. 등산복 차림으로 빼입은 박기술 일행은 한눈에 봐도 부티가 흘렀다. 특히 대머리가 까지고 기름이 번들거리는 박기술은 그야말로 탐욕스런 인간의 대표적 인상이었다.

 

박기술은 유독 큰소리로 막걸리를 시키며 부산을 떨었고 은근슬쩍 여자의 손을 만지거나 엉덩이를 툭툭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아마도 다 쓰러져가는 이런 주점에 와서 이렇게 막걸리라도 팔아주는 걸 고맙게 생각하고 몸 정도 만지는 건 서비스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박기술한테 문득 방안에 놓여진 바둑판이 눈에 들어왔다. 바둑을 두지 않는 사람이면 그저 바둑판이 있는 모양이다,라고 지나갈 텐데 박기술 이 인간은 바둑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인간이다. 그러니 당연히 한마디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어이, 주모, 저 바둑판은 웬 건가? 여기 바둑 두는 사람이 있나?”


“제꺼랍니다, 사장님.”


여자가 생글거리며 대답하자 박기술을 비롯한 일행들이 깜짝 놀랐다. 


“자네 거라니...그럼 자네가 바둑을 둘 줄 안다는 건가?”


“겨우 축 정도만 알 뿐이지요.”


허어... 박기술은 감탄이 나왔다. 이제까지 수십 년을 바둑을 뒀지만 여자하고는 단 한번도 바둑을 둬보지 못한 박기술이다. 아니, 여자가 바둑을 둔다는 얘기조차도 들어보지 못했다. 실 바둑 두는 남자들은 가끔 여자하고 일국할 상상을 가끔 한다. 그 얼마나 로맨틱하고 멋진 일인가. 그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헛되이 보낼 박기술이 아니었다.


“그래, 그럼 자네 나하고 한수하겠나?”


박기술의 제의에 여자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리고 많은 일행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방안에 즉석 대국실이 마련됐다. 박기술은 여자와의 대국이 꿈만 같아 입이 벌죽해졌다.


“그래, 몇 점을 깔겠나?”


“그냥 제가 흑으로 두지요.”


여자의 말에 박기술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서로의 실력을 모른다고 해도 여자주제에 남자하고 맞상대라니...박기술이 보기엔 여자의 행위가 방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남자란 무릇 여자가 도도하면 꺾고 싶은 본능이 있기 마련.


“그래, 좋네, 좋아. 근데 말야, 이 바둑이란 건 그냥 두는 것보다는 단돈 10원이라도 거는 게 더 묘미가 있는 건데 그건 아나? 더군다나 이렇게 구경꾼들도 있는데 말이지.”


박기술의 말에 옆에 도란도란 모여서 구경하던 일행들이 일제히 박기술을 거들었다.


“그럼, 그럼 바둑이나 당구는 뭔가를 걸어야 재미지.”


“암, 내기 아니면 의미가 없어. 뭐든 걸어보라구.”


박기술은 일행의 응원에 힘입어 두툼한 지갑을 내려놓았다.

 

“난 이 지갑에 있는 돈을 다 걸겠네만...자넨 뭘 걸 건가?”


“글쎄요...제가 뭘 걸어야 사장님 지갑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요?”


여자는 자못 난감하다는 듯 되물었다.


“허어...여기서 자네가 걸만한 게 뭐가 있나...여기 술이야 다 마신다고 하더라도 몇 푼 되지 않을 테고...”


그러면서 박기술은 힐끔 여자를 보았다. 30대쯤으로 보이는 여자는 모진 세월에 잔주름은 있지만 찬찬히 뜯어보니 그리 미운 얼굴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한쪽 세운 무릎 밑으로 흘러내린 월남치마 사이로 살짝 보이는 우유빛의 허벅지가 박기술의 회를 잔뜩 동하게 했다. 


“그럼 이러면 어떤가? 자네가 지면 나하고 하룻밤 운우의 정을 나누세. 자네 몸값이 내 지갑만한 가치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정도면 내가 후하게 쳐주는 걸세.”


“그렇게 하지요.”


의외로 여자는 선선히 대답을 했다. 여자의 대답에 주변 일행들은 환호성을 터트렸고 박기술은 마치 커다란 월척이라도 낚은 듯이 심장이 뛰었다.


“100수 안에 끝내고 이 방에 원앙금침을 깔리라.”


박기술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바둑돌을 잡았다.


박기술의 예상은 적중했다. 100수 안에 바둑은 끝났다. 단지 박기술의 생각과는 달리 승자와 패자가 바뀌었을 뿐...


100수도 미처 안돼 박기술은 좌상귀의 돌 30여 개를 무참하게 흑한테 안겨줬다. 그걸로 바둑은 끝났다. 박기술을 비롯한 일행은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에 할말을 잃고 바둑판만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유유히 박기술의 지갑에서 돈을 꺼내갔다.


“사장님이 오늘 운이 없는 모양이어요.”


여자는 박기술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생글거렸다.


박기술은 오기가 생겼다. 한달 동안 박기술은 두 번이나 더 여자를 찾았다. 그러나 박기술은 여자의 손목 한번 만져보지 못하고 돈만 날렸다. 이제는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좋네, 다음번에는 나대신 대리인을 데려오지. 그래도 딴말 없겠지?”


박기술은 여자한테 으름장을 놓고 그저께 장안에서 바둑으로 이름 석자를 날린다는 선수를 데려왔다. 그러나 그 작자도 200수가 안돼 돌을 던져야했다. 아마도 여자는 내기바둑이 본업인 듯했다.


상대는 전부 남자였고 남자들은 적지 않은 돈을 걸었다. 물론 여자는 몸을 걸었다.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여자는 진다고 해도 특별히 손해볼 게 없는 장사다. 지면 눈 한번 질끈 감고 남자의 품에 안겨주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 그 여자를 안은 남자는 한명도 없었다.




어둠이 내리자 여자는 막걸리 한주전자를 가져다놓고 청승맞게 노래를 불러댔다. 여자의 노래는 세월의 시름을 잊으려는 울음처럼 들렸다. 여자가 두 주전자째 막걸리를 비울 때쯤 주점에 한 남자가 들어섰다. 초췌한 표정의 남자는 주점에 들어서자 난롯가에 앉으며 대뜸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켰다.


기이한 남자였다. 이 늦은 시간에 이런 산에 온 것도 그렇고 산행하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양복차림은 무슨 사연을 갖고 있는 듯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막걸리를 서너 사발 자작하여 마셨다.


“저도 한잔 주세요. 혼자 마시는 거 건강에 안 좋아요.”


여자가 남자의 맞은편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비로소 남자는 여자를 보았다. 주점에 들어와 여자와 눈 한번 안 마주치고 줄곧 비통한 표정으로 바닥만 바라보던 남자였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여자에게 막걸리를 한사발 따라주자 여자는 한숨에 들이키고 남자에게 사발을 권했다.


“제가 한잔 따를 게요.”


그렇게 사발이 몇 순배 돌았다. 남자의 얼굴이 취기에 붉게 달아오를 때쯤 여자가 물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어요? 설마 자살이라도 하려는 건 아닐 테고요.”


자살이란 말에 남자는 움찔했다. 마치 속마음이라도 들킨 듯했다. 남자는 대답대신 막걸리 한사발을 쉬지 않고 들이켰다. 그런 남자를 보며 여자가 생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옷차림이 그래요. 양복차림에 여기까지 올라오는 사람은 없거든요.”


“자살하는 사람 봤소?”


남자가 사발을 놓으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많이는 아니지만 몇번 봤죠, 작년 이맘때도 젊은 총각이 여기서 막걸리 한 주전자를 마시고 자살했어요. 여기서 30분쯤 올라가면 절벽마루에 소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게 자살나무로 유명해요. 거기서 목을 맸어요.”


남자는 자살이란 말을 쉽게 하는 여자를 희한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젊은이는 왜 자살을 했소?”


남자가 자작을 하며 지나가듯 물었다.


“아마...여자 때문이었을 거여요. 결혼할 여자가 변심했다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무슨 일로...설마 그 연세에 여자 때문은 아니겠죠?”


아무렇지도 않게 자살을 기정사실화하는 여자의 말에 남자가 발끈했다. 


“도대체 뭘 안다고 그렇게 나서는 거요. 난 자살 같은 건 하지 않아!”


“네...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단지 그런 분위기라는 거지요.”


기묘한 여자였다. 자살이란 무거운 얘기를 꺼내놓고 그걸 가볍게 만들어 상대로 하여금 속마음을 털어놓게 하는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자살은 아니더라도 뭐 마음 상한 게 있는 모양이어요. 툭 털어놓고 얘기해 봐요.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에 묻고 있는 것보다는 누군가한테 털어놓는 게 훨씬 편해요.”


남자는 막걸리를 두어 사발 더 입에 퍼붓고 말을 꺼냈다. 


“난 파산했소.”


“왜요?”


“믿었던 친구가 배신했지. 개새끼...”


당시 월남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남자는 파병용사들이 월남에서 가지고 들어온 티비나 라디오 등 전자제품을 사들여 되파는 방법으로 엄청난 이득을 남겼고 그걸 기반으로 서울에서 전자제품상회와 옷가게 등 다방면으로 사업을 벌였다. 그런데 그와 같이 동업하던 친구가 계획적으로 엄청난 부도수표를 발행하고 행방을 감춘 것이다. 그는 엄청난 부채를 떠안게 됐고 견디다 못해 죽음을 생각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래도 아직까지 부자시네요. 이것저것 정리해도 충분히 먹고 살만큼은 되잖아요.”


남자는 자신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희희낙락 얘기하는 여자가 괘씸하기 짝이 없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여자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어릴 적 고아원에서 그렇게 맞고 자라고 배가 고파 쓰레기통을 뒤지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런 거에 비하면 지금은 임금님이나 다름 없지 않은가. .


그래...사업은 또 일으켜 세우면 된다.


남자는 마음속으로 자살을 포기하고 재기를 다짐했다.


“혹시 바둑둘 줄 아세요?”


뜬금없는 여자의 물음에 남자는 깊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술도 적당히 마신것 같고 이 길고긴 밤을 그냥 보내기도 뭐한데 바둑두실 줄 알면 한수 두실래요?”


“바둑을 두시오?”


“네...조금은요...”


취기에 불그스레한 얼굴로 여자가 생글거리며 답한다.  


허어...바둑두는 여자라...여느 남자처럼 남자는 여자가 신기롭다는 표정이다.


“나도 조금은 두오만...하도 돌을 잡은 지 오래전이라...”


여러 말할 것 없이 여자와 남자는 방안에 바둑판을 앞에 두고 자리를 잡았다. 여자가 흑을 잡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우리 그냥 두기엔 심심하니까 내기를 하지요.”


여자는 역시 남자의 지갑을 털어낼 속셈이다.


“내기라고...? 무슨 내기 말이오?”


“글쎄요...선생님은 뭘 거실 수 있나요?”


“허허...나야 걸 게 뭐 있나...돈이라면 조금 있지만...”


남자가 지갑을 꺼내놓았다.


“선생님이 돈을 걸면 전 뭘 걸까요...전 돈도 없고...그렇다고 이 쥐꼬리만한 주점을 걸 수도  없고요...제 몸이라면 어떻겠어요?”


여자의 뜻밖의 제안에 남자는 파안대소했다.


“핫하하하하...”


“왜 그러세요? 제 몸이 바둑 한판에 걸만한 가치도 없다는 건가요?”


여자가 샐쭉하며 말했다.


“하하...그...그런 뜻은 아니오. 너무 뜻밖이라서 말이오...좋소, 어떻게 되든 한번 둬봅시다.”

 



길고 연약한 여자의 손에서 흑돌이 떨어지면서 바둑은 시작됐다.
10년쯤인가...남자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좋아하던 바둑을 그만뒀다. 하도 오랜만에 만지는 돌이라 처음엔 판이 생소했다. 남자의 돌이 낯선 판을 헤맬 때 여자의 돌은 판위에서 화려하게 춤을 췄다.


여자는 100수 안에 남자 손을 들게 하고 지갑에 든 돈을 거머쥘 욕심에 들떠있었다. 그런데 희한했다. 어수룩한 남자의 행마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하면서도 길게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중반에 들어서자 남자의 돌들이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뜻밖의 곳에서 붙이고 멀리 있는 듯한 돌들이 교묘하게 응원을 하고...곳곳에서 남자의 돌들은 힘차게 융기했다.

 

여자는 당황했다. 이런 상대는 처음이었다. 급기야 중앙의 전투에서 여자의 돌들이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잡히면 끝장이다, 여자는 필사적으로 도망했다. 남자는 서서히 여자를 쫒는다. 도무지 급할 게 없다는 추적이다. 왜일까...여자가 도망을 가면서도 남자의 느슨함에 의문을 갖는다. 마침내 여자의 의문이 풀린다.


초반에 잡아놓았던 우변쪽의 12개의 돌이 서서히 숨을 쉰다. 내가 잡히느냐 남자의 돌을 살려주느냐...둘 중에 하나였다.

문제는...

이래도 지고 저래도 진다.

여자는 남자의 품안에서 자폭을 한다. 대마가 죽었다.

“졌...습니다.”


“아주 잘 두시네요. 대단해요...남자 실력이라고 해도 대단한데 여자가 이런 실력이라니...”


남자의 칭찬에도 여자는 아무 말 없이 판을 챙겼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여자가 방을 나갔다.


30분쯤 후...여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들어왔다. 목욕을 하고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모습은 마치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로 변신한 듯했다. 남자는 감탄을 했다.

“오오...”


“아무리 미천한 여자라도 약속은 지켜야지요...”


하얀 만월이 방안을 훤히 비췄고 두 사람은 한몸이 되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남자는 자살하려고 왔다가 만난 이 여자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어둠 속에 누워 남자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구려...도대체 어디서 바둑을 배운 거요?”


“오래전에...아버지한테 배웠답니다.”


“아버지요?”


“네...하도 오래전이라 잘은 기억이 안 나지만 아버지는 서울에서 유명한 내기바둑꾼이었답니다. 주변 사람들은 아버지를 천재라고 했지요...전 말을 배울 때부터 아버지한테 바둑을 배웠답니다. 제 나이 5살 때 이미 주변에 제 상대가 없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아...유일한 제 상대가 있었지요. 저하고 같이 아버지한테 바둑을 배운 오빠가 있었어요. 오빠는 저보다 더 대단했어요, 겨우 7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능가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전쟁이 터졌어요. 우린 피난을 가다 폭격을 당했는데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 제 눈앞에서 말이죠.”


여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나 끔찍한 악몽에 남들한테 얘기조차 하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

남자가 어둠 속에서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오빠는...어떻게 됐소?”


“아마...죽었을 거여요...폭격으로 온통 아수라장이었으니까요.”


창밖에 눈이 오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하얀 눈에 파묻혔다.


 


여자는 깊은 잠에 빠졌다. 남자는 잠이든 여자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마치 몇 겁의 시간처럼 오랫동안...다시는 볼 수 없는 얼굴...그 얼굴을 보고 또 보고...자신의 눈 속에 집어넣었다. 한방울의 눈물이 여자의 얼굴에 떨어졌다.


여자는 미명에 눈을 떴다. 옆자리에 남자가 없는 걸 알고 여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혹시!"


여자는 맨발로 주점 밖으로 뛰쳐나갔다. 밤새 맘이 변해 남자가 자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주점 밖에는 온통 하얗게 눈이 싸여있었고 남자의 발자국만이 행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행적은 산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여자는 안도를 했다. 그리고 남자를 기다렸다. 하지만 남자는 오지 않았다. 그날도...그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남자가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자 여자는 몇날며칠일을 가슴앓이를 했다. 그리고 바둑판을 꺼내 돌을 하나하나 놓아보았다. 남자와의 바둑이다. 여자의 가슴속에 차있는 남자에 대한 그리움을 그렇게 복기로 메웠다.


한판...두 판...열 판...스무 판...


서른 판쯤 뒀을 때 여자는 비로소 남자가 그렇게 말없이 떠나간 이유를 알았다.


"아...!"


남자의 바둑에서 어릴 적 오빠와 두었던 바둑이 배어나왔다.

가슴이 떨려왔다. 그리고 통곡을 했다. 울고 또 울고...여자는 피눈물이 날 때까지 울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곳에서 여자를 본 사람은 없었다.




"그래...그러고 보니 벌써 30년도 더 지났군. 엊그제 일 같은 데 말이지..."


긴 얘기를 끝낸 노 여승은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 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혹시..그후로 오라버님은 보시지 못했나요?"


"글쎄...눈이 이 모양이니 바로 앞에 있다한들 어떻게 보겠나..."


노 여승은 초점이 없는 눈으로 작가를 바라보았다.


"모르지...그분이 내 수소문을 해서 멀찌감치서 봤을지도..."


"죄송한 질문입니다만...스님의 눈은..."


처음부터 묻고 싶은 질문을 차마 못하다가 마지막에 물었다.


"약초를 먹었지. 모진 목숨 끊지는 못하고 두 눈만 저 세상으로 보냈어. 차라리 안보이니까 맘이 편해지더군..."


노 여승은 잔잔한 미소를 짓더니 먼산을 바라보았다.

산사의 처마에 매달린 풍경이 잔바람에 수줍게 울어댔다.


<끝>

 

2009-01-08 본 내용은 작가의 순수 창작물이므로 무단복제나 도용, 표절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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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샤쿠류 |  2009-06-19 오전 12:04:0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역쉬 박쥐님의 글은 흡입력이 대단대단...잘읽고 갑니다...  
베일속얼굴 |  2009-06-19 오전 12:13:37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어엉....이런 단편에서 만감이 교차하네요 박쥐님 잘보고 갑니다...^^  
당근돼지 |  2009-06-20 오전 2:23:5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잘 보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시골하수 |  2009-06-21 오전 10:36:43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작고하신 이청준님의 남도기행이 생각나네요!!  
김생원 |  2009-06-22 오후 1:28:1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제목을 보고는 싼샤의 바둑 두는 여자를 상상했는데, 서편제와 베스트셀러 극장을 접목한 느낌이네요. 눈 앞에서 보는 듯, 뛰어난 표현력 부럽습니다.  
대마후절 |  2009-06-22 오후 5:51:36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간만에 재밌는 이야기를 만나서 좋았습니다. / 바둑의 소재 안에서 일관되게 여러 작품을 계속 써내는 일을 해낸다는 건 작가에게 있어서 발전적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영구형 |  2009-06-23 오후 4:52:31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박쥐님 훌륭한 글솜씨를 지니셨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꾸벅  
무당취산 |  2012-04-08 오후 9:07:07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이제까지 박쥐님의 글 몇편을 읽고 느낀점은 그냥 이런 싸이트에서 단편이나 꽁뜨같은 글이나 쓰고 있을 작가는 아니라는 느낌입니다. 치열한 정통적인 작가 수업을 하였으나 불행이도 동인문학상같은 데선 아슬아슬하게 낙선하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어쩔수없이 이런 단편들을 휘갈기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잔인하게들리실진 모르지만 좀더 정진하여 대성하여주십시오. 마음깊이 후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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