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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女子(Ⅲ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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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女子(Ⅲ 전투)
2009-05-28 조회 5061    프린트스크랩
▲ 영화 '여자, 정혜'에서

                

간밤의 열대야를 식히기라도 하려는 듯 새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비는 오후가 되자 마치 장마라도 시작된 듯이 폭우로 변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비였다.


강남의 씨네마플라자.

한 건물에 6개의 개봉관이 들어서 있고 패스트푸드점에 커피전문점 레코드샵 오락실 등, 한마디로 종합문화공간이었다. 평소에도 젊은이들이 많은 장소지만 오늘따라 비가 와 그런지 플라자의 로비는 젊은이들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매표소의 여직원은 하루종일 “매진입니다”라는 말로 목이 쉴 지경이었다. 시그널에 매진이라고 표시가 돼 있지만 사람들은 꼭 사람의 입으로 직접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잠시 숨을 돌리는 짬에 여직원은 한곳을 돌아보았다. 오늘 아침부터 본 남자였다. 남자는 애타게 엘리베이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남자는 오늘 첫손님이었다. 처음 오자마자 2회 상영표 제일 좋은 자리를 예약했다. 아마 애인하고 영화를 볼 생각인 모양이다.

그러나 남자가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남자는 벌써 5시간째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남자는 ‘님은 먼곳에’란 영화의 2회차 상영티켓을 끊었다. 아마 여자를 1시에 만나기로 했을 것이다. 그렇게 따져도 남자는 무려 3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요즘 세상에 3시간을 기다려주는 남자라니...


남자는 영민이었다.

영민은 물먹은 솜처럼 축 처져 있었다.


처음 몇 분은 차가 막혀서 늦을 거라고 위안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그건 걱정으로 바뀌었다. 혹시 약속장소를 착각한건 아닐까. 아니다, 여기가 분명해.


매표소 여직원에게 수십 번도 넘게 물어보았다. 

님은 먼곳에를 상영하는 곳은 여기뿐이다.

시간도 확실하다, 1시...


그럼 무슨일이지, 혹시...!

박회장이 또 무슨 짓이라도...

아니면, 나를 만나러 간다는 걸 눈치챈 건 아닐까.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럼 뭐지, 오다가 사고라도 생긴 걸까...

난 바보다, 어제 핸드폰 번호라도 물어보는 건데...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어쨌든 시계는 4시를 지나고 있었다. 영민은 마음속으로 다짐한 시간이 지나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온몸에 힘이 빠졌다. 저기 지금 올라오는 엘리베이터가 마지막이다. 저기에 유정이 타고 있지 않으면 포기하고 돌아갈 생각이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그러나 역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달랑 3쌍의 커플을 토해낼 뿐이었다.


영민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1층은 비를 피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건물 밖에는 한치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비가 쏟아졌다. 


도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차들은 빗속에 뒤엉켜 경적을 울어댔고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버스들...바람에 날리는 우산을 필사적으로 잡으면서 뛰다시피 걷는 사람들...


밤에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한 영민이다. 게다가 기다림에 지칠 대로 지친육체는 이미 그 한계를 넘어섰다. 모든 것이 마치 슬로우비디오를 보는 듯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소리는 마치 노이즈처럼 웅웅거렸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 뒤엉킨 혼돈상태였다.





자동차


사람들


한 여자가 택시에서 황급히 내렸다. 우산도 쓰지 않은 상태였다. 여자는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무척이나 급한 모양이었다. 영민에게는 그 여자가 그저 낯익은 여자로 보였다.


몽롱했다.

여자가 영민을 보더니 소리를 쳤다.

영민의 동공이 점점 커졌다.


“영민 씨!!”


비로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정이었다.

영민이 뭐라고 소리를 치려는 순간 유정이 쓰고 있던 챙이 큰 모자가 바람에 날라갔다. 영민은 득달같이 모자를 집으러 뛰쳐나갔다.

바람에 나뒹구는 모자를 10여 미터나 쫒아가 주웠다. 영민이 물에 빠진 꼴로 자랑스럽게 모자를 치켜들자 유정이 달려왔다. 금방이라도 영민을 끌어안을 기세였지만

영민의 앞에 멈춰서 그저 웃는 걸로 그만이었다. 영민은 그런 유정에게 모자를 씌워주었다. 두 사람의 활짝 핀 웃음이 닮은꼴이었다.


물에 흠뻑 젖은 두 사람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는 황급히 커다란 타월을 가져오며 룸으로 안내했다. 


“이 방은 좀 따뜻할 겁니다.”


“고마워요.”


유정은 앉으면서 타월로 머리를 문지르듯이 닦으며 얘기를 계속했다.


“너무 정신이 없었어요, 그런 사고는 처음이었거든요. 어쨌든 보험회사에서 나오고 사후처리는 잘됐어요. 그래도 혹시나 해서 부랴부랴온 건데 지금까지 기다릴 줄은 몰랐어요.”


“다친 데는 없나요?”


“보다시피요...”


유정은 씩씩하게 양손을 으쓱해 보였다.

그런 유정의 모습에 영민은 활짝 웃어보였다.


“자, 좀 닦으세요.”


유정에게 받아든 타월로 영민이 젖은 몸을 닦았다. 타월에서 그녀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했다.


“어떡하죠, 영화를 못봐서...”


“괜찮아요, 대신 음악을 들으면 되죠.”


[마리안느 페이스풀]의 [vien vien vien]이 흐느끼 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긴 자주 왔나봐요.”


“아녀요, 전에 딱 한번...”


“누구? 애인하고?”


“아...아녀요.”


당황한 영민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하하하...아니면 아니지 그렇게 당황하긴...”


유정이 남자처럼 크게 웃었다.


사실 이곳은 영민에게 아픈 추억이 있는 곳이었다. 2년 전에 사귀던 여자와 헤어진 곳이다. 그것도 이 방에서...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아이러니한 일이다. 영민은 행여 그게 유정에게 들킬 새라 조마조마하던 참이다.


“하긴, 연인끼리 오기 좋은 곳이네요. 음악도 좋고...”


“그...그렇죠.”


그때 웨이터가 주문한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유정은 와인을 주문했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영민은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와인으로 괜찮겠어요? 요기가...”


“와인이 이래봬도 칼로리가 높아요. 그리고 와인하고 먹는 치즈나 견과류가 고칼로리잖아요.”


“네...”


영민은 술을 마시지 못하는 자신이 한탄스러웠다. 이럴 때 술을 한잔 할 수 있어야하는데...이게 뭔가, 스파게티나 먹고 있으니...

영민은 스파게티를 먹는 둥 마는 둥 포크로 돌돌 말기만 할 뿐이었다.


갑자기 두사람 사이에 대화가 끊겼다. 특별히 공통적으로 할 얘기가 없었다.
뭔가를 말해야 하는데...
영민은 이 침묵이 부담스러웠다. 침묵을 어떻게든 털어내려 하는데 마땅한 말이 없었다. 유정이 그 침묵을 깨트려 주었다.


“이 노래 참 오랜만에 듣네요.”


“네?”


영민은 처음 듣는 곡이었다.


“다미타 조의  A time to love란 노래죠. 회장님 만나기 전에 참 좋아했던 노랜데...그러고 보니 그동안 음악도 잊고 살았군요.”


회한이 섞인 말투였다.


“회장님이...사모님을 무척 사랑했던 모양이어요. 1년씩이나 쫒아다녔다고 들었는데...”


영민은 조심스럽게 박회장과 유정의 관계를 건드렸다.


“사랑?”


유정은 시니컬한 미소를 짓더니 남아있는 와인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벌써 두 잔째였다.


“사랑이 아니라 집념이죠.”


유정은 와인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회장님은 집념이 강한 남자예요. 갖고 싶은 건 어떻게든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어요.”


비에 맞은 데다 와인이 들어가자 유정은 약간 풀린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음악마저 무장해제를 시키기 아주 좋은 고즈넉한 음악이었다.


“난 소유된 거죠.”


“소유라니요...”


“회장님은 아직도 본부인을 사랑하고 있어요. 비록 죽었지만...그래서 아직까지 결혼도 안하고 있는 거죠.”


영민은 깜짝 놀랐다.


“결혼도 안하다니요...지금 사모님하고...”


"사모님이요...내가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무슨 뜻이신지..."


유정은 피식 웃더니 와인을 한숨에 마셨다.

벌써 석 잔째다.

유정의 혀는 꼬이고 있었다.


"영민 씨, 내가 제일 듣기 싫은 말이 뭔지 아세요? 사모님이어요, 사모님...사모님도 아닌 주제에 사모님이라니...우습지 않나요...?"


영민은 황당했다.

유정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손을 이마에 짚었다.

긴 유정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감췄다.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부부...? 그건 그냥 그렇게 보일 뿐이어요. 박회장하고 난 남남이어요. 적어도 법적으로는요...박회장은 날 소유하고 싶었죠. 섹스파트너로 혹은...자신의 가짜 부인으로...사업하는 데 홀아비보다는 아무래도 부인이 있어야 좋겠죠. 난 그렇게 부인으로 고용된 거죠. 그래서 아이도 없었던 거구요..."


유정의 어깨가 들썩였다.


"난 말이죠, 월급도 받아요. 한달에 500만 원씩...왜 월급을 주는지 아세요? 혹시라도 내가 사실혼 관계를 따질까봐 미리 날 피고용인으로 만들어 놓은 거죠...재미있지 않나요, 직업이 대리부인이라는 거...?"


욱욱욱...소리 없는 울음이었다.

눈물이 와인잔에 넘치도록 떨어지고 있었다.


영민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유정은 마치 상처 입은 작은새 같았다.

너무 작아서 안으면 부스러질 것 같아 영민은 들썩이는 유정의 어깨를 가만히 보듬었다.


유정이 고개를 들었다.

유정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유정과 영민의 눈이 마주쳤다.


스피커에서는 레드 제플린의 Since I've been loving you가 지미 페이지의 애잔한 기타연주에 실려나오고 있었다.


누가 먼저였을까.

두 사람의 입술이 하나로 포개졌다.


로버트 프랜트가 절규하고 있었다.



I've been working from seven to eleven every night


I said it kind makes my life a drag


Lord that ain't right


Since I've been loving you


I'm about to lose my worried mind



숨이 막혀왔다.

머릿속이 하얗게 포말처럼 부서져가고 있었다. 영민의 모든 세포는 마치 파라볼라 안테나처럼 일제히 융기돼 있었다.


영민의 손이 유정의 가슴을 더듬었다.

그순간!


“안돼!”


유정이 날카롭게 외치며 영민을 밀쳐냈다.

지미 페이지의 기타는 마지막을 향해 숨가쁘게 치닫고 있었다.




유정은 고개를 돌리고 옷매무새를 바로했다.

영민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당황스러웠다.

그런 영민에 앞서 유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일은 잊어요.”


유정은 모자를 집어들고 다급하게 일어났다.
유정이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영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럴 순 없어요!!”


유정이 멈칫했다.


“난 유정 씨를 사랑해요. 처음 본 순간부터...박회장하고 정식부부관계도 아니라면 문제될 게 없잖아요. 월급쟁이라고 했잖아요! 그까짓 월급쟁이 때려치우면 되잖아요!!”


“세상이란...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어요.”


유정은 마치 학생을 타이르는 선생 같은 표정이었다.

영민은 고집스러웠다.


“뭐가 그렇게 복잡하죠? 간단하게 생각하면 안되요?”


유정은 잠시 영민을 바라보았다. 마치 철없는 아이를 바라보는 그런 표정이었다.


“나 먼저 갈게요.”


유정은 룸을 나갔다.


영민은 마치 세상을 가진 듯했다.

유정이 자신을 싫다고 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더군다나 유정의 느낌이 아직 자신의 입술에 살아있었다.


영민은 와인 한잔을 따라 한숨에 들이켰다.

이상하다, 와인 한잔이면 잔뜩 취기가 올라와야 하는데 멀쩡했다.

영민은 마치 자신이 비로소 남자가 된 듯해 호탕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진유정은 이 고영민이 것이다. 와하하하하하...”


그런데...

그날 이후 영민에게는 고문의 나날이었다. 영민의 집요한 노력에도 유정은 영민을 만나주지 않았다. 유정을 만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박회장 개인교습 때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고도 말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고통은 차라리 죽음보다 더 괴로웠다. 영민이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유정의 곁을 지나며 체취를 느끼거나 과일 따위를 가져올 때 실수인 듯 유정의 손을 스치듯 만지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영민을 더더욱 미치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영민은 모닥불처럼 타들어갔다. 이대로라면 얼마안가 하얗게 재만 남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지도대국을 두던 박회장이 밑도끝도없이 말을 던졌다. 

영민이 무슨 뜻인가 되물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유정이, 우리 와이프하고 자네 관계 말이야.”


...쨍그렁...


깜짝 놀란 영민이 바둑돌을 떨어트린 것과 유정이 냉커피를 만들다 글라스를 떨어트린 것은 동시였다.


“회...회장님...”


“왜? 아니라고 할 텐가?”


영민은 당혹스러웠다.

박회장의 이 밑도끝도없는 말...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


관계라니...? 무슨 관계 말인가...

그렇다면 유정을 좋아하는 마음을 털어놓으라는 건가.


“이봐, 고사범. 나는 말이지, 세상을 남다르게 살아왔어. 뭐냐면 말이야, 남이 보지 못하는 걸 보는 재주가 있단 말이야. 요즘 자네 눈이 말하고 있어. 우리 와이프를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다 이 말이야. 우리 와이프도 그렇고...말해보게.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믿어주겠네만...”


“저...저는...”


“뭔가?”


침묵이 흘렀다.

땀방울 하나가 영민의 턱을 따라 바닥에 떨어졌다.

영민은 목구멍에서 쥐어짜듯이 말을 토해냈다.


“좋아...합니다.”


“좋아한다...난 그런 애매한 말 따위는 좋아하지 않아. 어디까지야, 그걸 말해.”


영민은 어금니를 지끈 악물었다.

그래, 여기서 뼈를 묻자.


“잤...잤습니다...”


“잤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순간 유정이 주방에서 튀어나오며 소리쳤다.


“자다니...우리가 언제...”


“보름쯤 전에...사모님이 사고난 날입니다...”


“그래, 보름쯤 전...그날 유정이 사고가 났다고 했지. 비가 많이 온 날이었어.”


유정은 얼굴이 납처럼 굳어졌다.


박회장은 휠췌어를 움직였다.


“그럼 사실은 확인이 됐고...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


“뭔가 대책이 있을 것 아닌가. 같이 도망을 간다든가..,그런 구체적인 구상 같은 거 말이야.”


“여보...”


“여보라고 부르지 마!!”


박회장의 목소리가 거실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더이상 넌 내 여자가 아냐.”


박회장은 씹듯이 말을 뱉었다.

흡사 야수와 같은 표정이었다. 영민은 저런 표정의 인간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고사범 자네한테 그냥 넘길 수는 없어. 이 수컷이란 짐승은 말이야, 무슨일이 있어도 자기 암컷을 절대 딴놈에게 주질않는 법이야. 그냥 물어 죽이는 한이 있어도 말이지...”


“그냥이라고 하신다면...조건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이해가 빠르군. 내기를 하지. 자네나 나나 두 사람 다 할 수 있는 걸로...이거 말이야.”


박회장은 바둑돌 두 개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딱딱 소리를 냈다.


“치수는 석 점으로 하지.”


“석 점...”


다섯 점으로도 영민을 한번도 이기지 못한 박회장이다. 그런데 석 점이라니...


“난 말이야, 내기를 하면 뭐든지 달라지거든...지금까지 내기를 해서 난 져본 적이 없어. 어쨌든 자네가 이기면 유정을 주지. 대신 자넨 뭘 걸겠나? 자네가 유정이를 좋아하는 만큼 베팅을 해봐, 뭔가?”


영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유정이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다.

하지만 진짜 목숨을 걸 수는 없지 않은가.

영민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내...내 오른손을 걸겠습니다.”


“핫하하하하...오른손을 건다고...이봐, 고사범. 자네도 너무 영화를 많이 봤구먼. 어? 이봐, 그까짓 자네 오른손이 나한테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남자한테 가장 가치 있는 걸 걸어. 어때? 자네가 지면 내 꼴이 되는 거야. 가운데 걸 걸라구?”


영민의 얼굴이 납처럼 굳어졌다.

영민이 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겨우 석 점에...

하지만 어쨌든 남자의 심벌을 걸라는 건 섬뜩한 일이었다.


“왜? 자신이 없나?”


“하...하겠습니다.”


“와하하...좋아, 좋아.”


“제발 그만둬요!! 이게 무슨 미친 짓이어요!! 영민 씨, 그만둬요 제발...”


유정은 절규했다.


“걱정마세요. 제가 이길 겁니다.”


“눈물 없이는 못보겠군. 안타까워서 말이지. 하지만 마지막으로 말해두지. 난 지금까지 내기를 해서 져본 적이 없어.”




두 사람은 바둑판을 가운데 두고 자리했다. 

흑돌 석 점이 깔렸다.


영민이 돌통에 손을 넣어 조심스럽게 한 점을 집었다.

...따악... 첫점이 우상귀에 놓여졌다.


박회장이 좌하귀에 날일자로 굳힌다.

순간, 영민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지금까지의 박회장이 아니었다. 착점 소리가 달랐다. 둔탁한 소리가 아니라 마치 송곳으로 찌르듯이 예리했다.


물론 내기가 아니라면 이런 건 그저 지나칠 수도 있는 사사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내기엔 먼지 하나에도 예민해진다.


영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봐야 상대는 기껏해야 2단 정도 수준이다.

상대가 안된다, 이긴다.


이!긴!다!


영민은 백돌을 힘차게 착점했다.

기가 들어간 한수였다.

그러든 말든 박회장의 착점은 날렵했다.


...딱딱딱딱딱...


적막한 집안에 울려퍼지는 착점 소리.

유정은 방안에 쭈그리고 앉아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듯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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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2  본 내용은 작가의 순수 창작물이므로 무단복제나 도용, 표절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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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돼지 |  2009-05-28 오전 4:54:07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잘 보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tndo~ |  2009-05-31 오전 1:48:52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얼릉 4편올려주세요....글 잘보고갑니다....^^*  
금마 |  2009-06-02 오후 3:48:17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박쥐님 수준이......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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