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괜히 주는 것 없이 미운 놈이 있다.

저기 바둑을 두고 있는 놈이 그런 놈이다.

이형(李兄).
그렇게 부르지만 본명은 이태수란 놈이다.

미운놈이 이 기원에 나타난 건 대략 3개월 전쯤이다. 나이는 내 또래에 바짝 마른 몸매에 허여멀건 얼굴. 

이 외모부터 난 딱 맘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소갈머리 없이 시도때도없이 싱글거리는 웃음. 져도 허허...웃고 이기면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히죽 웃고...도대체 남자로서 속이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술을 마시기를 하나 담배를 피기를 하나 심지어는 커피도 안 마신다. 내기바둑을 둘라치면 내기할만한 게 없으니 기껏해야 기료내기에 지하에 있는 약속다방에서 커피내기 정도이다. 그것도 자신은 커피를 마시지도 않고 식혀 보내기 일쑤다. 그러니 무슨 재미인가.

그래도 기우들에게 인기는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래도 이 기원에서 상수에 속하는 놈이 두점이고 석점이고 치수를 가리지 않고 하수들한테 지도대국을 조건 없이 둬준다. 거기에 복기는 서비스다. 그러니 바둑 한수 지도 받으려고 눈에 불을 켜는 하수들이 놈한테 열광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참, 최형, 내일 중국 간다고 그랬지?”

바둑 두는 걸 관전하다 원장이 문득 생각난 듯 묻는다.

“네...한 보름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에그...고생이 많겠구먼...그 먼 객지에서...”

“고생이야 뭐있습니까. 그저 기원 오지 못하는 게 좀 섭섭하죠.”

“하긴...최형 안 오면 우리 기원도 타격이야. 그래도 최형이 우리 기원 얼굴마담인데 말이지...손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니까.”

“하여간 엄살은...저기 이형 있잖아요.”

“이형은 문화가 없잖아, 문화가...아, 가끔 술도 한잔하고 분위기 타면 노래방도 가고...그게 우리들 문화잖아. 근데 이형은 그게 없잖아. 어제도 정육점 박사장이 지도대국 해줬다고 술 한잔 거하게 쏜다고 그렇게 꼬셔도 그냥 가더라구. 그러니 판이 그냥 깨져버렸지.”

은근히 미운놈을 핀잔하는 듯한 원장의 말투가 기분 나쁘진 않다. 그때 대국을 끝낸 미운놈이 웃음을 띄우며 인사를 한다.

“오셨어요, 최형.”

“아...네.”

하여간 비위도 좋은 놈이다. 내가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언제나 먼저 웃으면서 인사한다.

“두 사람 한번 둬봐, 오늘 빅매치로...”

원장이 미운놈하고 날 붙인다.

“시간 괜찮으면 한수 하시지요, 최형.”

“뭐...그러죠.”

난 마지못한 척 미운놈 앞에 앉았다. 사실 기원에 미운놈 아니면 둘 놈도 없다. 바둑의 상대는 뭐니뭐니해도 호선이 최고다. 그런데 이 기원에 나하고 맞는 호선은 기껏해야 서너 명. 그것도 시간이 맞지 않아 상대를 만날 수 있는 건 일주일에 많아야 두어 번이다. 그런데 이 미운놈은 매일 상주해 있다. 더군다나 호선도 그냥 호선이 아니고 그야말로 난형난제, 용호상박. 두판을 두면 거의 1대1 승부다. 그것도 한집반이나 두집반 승부. 미운놈하고 바둑은 그야말로 무릉도원이요 무아지경이다.

“내기는 뭐로 할까요.”

돌을 가리며 내가 물었다.

“뭐...대충...”

“기료하고 커피내기 합시다. 여기 인원수대로...”

“그러죠 뭐...”

“원장님! 약속다방에 커피 좀 시켜줘요, 여기 인원수대로...”

“오케바리~~”

내가 큰소리로 말하자 원장은 말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돌린다.

내가 백이다. 초반은 도발은 피하고 탐색전이다. 기원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우리 주위에 몰려와 빅매치를 숨소리도 안 내고 지켜본다.

바둑 착점소리만 들리는 기원 안. 난 이 순간이 좋다. 많은 관중, 팽팽한 긴장감...

언제나 그렇듯이 이 긴장감은 포석이 끝날 때쯤 등장하는 약속다방 민양 때문에 조금은 릴렉스해진다.

“커피왔습니다.”

똥꼬치마를 입은 민양이 커피를 한보따리 싸들고 기원으로 들어서면 남자들은 늑대눈빛으로 진한 농담을 한마디씩 건넨다.

“오늘도 오빠 둘이 붙었나봐.”

“민양아, 빨리 선수들부터 커피 드려.”

민양이 원장의 채근에 잽싸게 나와 미운놈 앞에 뜨거운 커피를 진상한다. 뜨거운 커피를 한모금 입안에 머금자 엔돌핀이 팍팍 생성된다. 기원은 이 맛에 온다.

뭔가 사람 사는 것 같지 않은가. 바둑은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둘 수 있지만 사람의 체취는 느낄 수가 없다.

기원 안 기우들은 공짜 커피를 마시면서 얘기꽃을 피운다. 그러든 말든 이 미운놈은 커피는 입에 대지도 않고 바둑에 골몰하고 있다. 

우상귀와 변쪽이 흑과 백이 서로 얽혀 사활을 다툰다. 물론 서로 죽을 말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전투 상황에 따라 중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미운놈이 2선에 젖혀져 있는 백돌을 막는다. 변쪽의 흑 다섯 점의 생사와도 관계있지만 우상귀의 삶을 강요한 수다. 백이 호구를 치면 귀에서 살 수 있다. 하지만 흑이 우상귀에서 귀쪽에서 먼저 젖혀잇는 게 너무 아프다. 그건 눈뜨고는 못 당한다. 난 우상귀에서 2선으로 빠진다. 흑이 막으면 선수로 젖혀잇고 아까 흑이 막은 한점을 호구쳐 살 생각이다.

흑도 기세상 막은 한점의 체면을 살리고자 우변쪽 한점을 단수친다. 일단 나도 되단수를 친다. 그때 흑이 백을 따지를 않고 1선에 빠진다.

...딱...

돌을 놓고 손이 떨어지는 순간 미운놈이 아차했는지 빠진 돌을 다시 들어 한점을 따내려한다. 0.1초의 순간이다.

“이형, 매너가 왜 그래! 일수불퇴, 낙장불입 몰라! 바둑 그 정도 뒀으면 그 정도 매너는 알아야지!”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이 일제히 돌아본다.
미운놈이 고개를 푹 숙인다. 결국 따내지 않은 그 한점이 화근이 돼서 우변 다섯점은 이십점이 넘는 돌로 키워 죽였다.

“잘 뒀습니다.”

미운놈이 돌을 챙기고 힘없이 인사를 하고 일어난다. 평상시 같으면 져도 히죽 웃으며 “제가 좀 부족하네요...” 이런 놈이었다.

한판만 두고 힘없이 기원을 나서는 미운놈을 보며 내가 좀 심했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뭐 기원에서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보름 후...

중국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마누라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기원으로 달려갔다.

“어이, 최형!”

기원을 들어서자 원장이 반갑게 맞는다. 바둑을 두던 기우들도 일제히 인사말을 한다.

“이거 얼굴이 핼쓱해졌는데...”

“이놈의 손맛을 못 봐서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해 손맛이 아니라 중국 꾸냥하고 밤이 짧다고 지낸 거 아냐?”

원장이 음흉한 눈초리로 농을 건넨다.

“아이구...원장님, 내 팔자가 그 정도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아...최형 팔자가 어때서? 얼굴 미남이지 몸매는 에이치라인이지...”

“아냐, 혹시 몰라. 밑에는 우리가 못 봤으니까...”

기우들이 한마디씩 거들며 기원 안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된다.

어? 근데 이상하다, 뭔가 허전한데...뭐지?

아...그러고 보니 그놈이 안 보인다. 미운놈...

“원장님, 이형은 오늘 안 왔습니까?”

내말에 원장이 무슨 비밀얘기라도 하려는 듯 내 소매를 끌어 구석진 데로 간다.

“왜 그러세요, 원장님.”

원장이 담배를 하나 빼물고 한숨을 토하듯 말을 꺼낸다.

“이형,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예에...?”

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죽었어. 며칠 전에...”

“왜...왜요?”

“그 사람, 위암 말기였다더구만. 항암치료를 하다가 차도도 없고 해서 포기하고 좋아하는 바둑이라도 원없이 둔다고 매일같이 기원을 나왔다는 거야. 그 집 안사람은 기원가면 공기도 안 좋고 스트레스도 받는다고 반대했지만 그래도 그 사람 마지막 낙이 그거라 할 수 없이 내버려뒀다는 거야. 그래서 술도 커피도 못 마셨던거지... 우린 그것도 모르고...”

난 목이 메어왔다.

원장이 담뱃불을 비벼 끄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 죽기 전날도 기원에 왔었어. 최형을 찾더구만...최형 언제 오느냐고. 내가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같이 소주라도 한잔 할 생각인데 마실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그러더군. 그게 마지막이었어.”

난 기원을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터벅터벅 걷다보니 지하 약속다방이다.

“어머! 옵빠, 여긴 웬일이세요, 중국은 잘 다녀오셨어요?”

민양이 오만 호들갑을 다 떤다. 난 주저앉듯이 자리에 앉았다.

“커피 두 잔...”

“나두 사주는 거야?”

“가져와.”

내 분위기가 워낙에 무거웠던지 민양이 얼른 커피를 가져다놓고 간다.

적막한 다방 안에 앉아있는 혼자.

그러나 커피 잔은 두 개다.

한잔은 비어 있는데

또 한잔은 싸늘하게 식은 커피.

빈잔에 가득...

고독이 담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