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제로 인한 위 손상이 있으니 앞으로 한달 동안은 절대 금주입니다.”
퇴원하는 대호에게 의사가 한 말이다. 대호는 그런 의사 말은 잊은 지 오래다. 12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대호와 창수는 인사동의 한 지짐집에서 소주를 앞에 놓고 대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3사람을 선정하는 데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대호는 그 중요인물 중 첫번째로 창수를 꼽았는데 창수는 그 의견에 적극 반론을 들고 나왔다.
“원장의 얘기를 잘 생각해 보라고. 여기서 중요성이란 친분감을 말한 게 아니잖아. 니 인생을 바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거잖아. 근데 난 니 인생을 바꿀 위치에 있는 게 아니야.”
“난 원장이 말한 세 사람을 개개인의 독립성으로 보지 않고 서로 연계를 갖는 연관성으로 봐. 즉 세 사람 중에 한명이 내 운명을 바꾸는 게 아니라 세 사람이 각자 연관을 갖고 내 운명을 바꾼다는 거지. 그렇게 따지면 지금 이 자리에서 너와 이런 의논을 한다는 자체가 내 인생에 니가 깊숙이 개입이 돼 있다는 거지.”
두 사람은 이미 원장의 얘기를 예지자의 예언으로 철석같이 믿고 얘기하고 있었다. 아마 누군가가 두 사람의 얘기를 듣는다면 미쳤거나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할지도 모른다.
“좋아, 난 그렇다 치고 나머지 두 사람은 누구지?”
“두 사람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사람은 알 것 같아.”
“누구야?”
창수가 궁금증에 상체를 내밀며 얼른 대답하라는 듯 대호의 대답을 재촉했다.
“날 여기까지 오게 한 직접적인 원인은 아파트 때문이지. 즉, 날 아파트 건설에 뛰어들게 한 사람.”
“널 아파트 건설에 뛰어들게 한 사람이라면...”
“성창의 박태환 사장!”
대호는 소주를 입안에 털어넣었다.
성창건설. 국내건설업계에 2군 업체이다. 성창은 아파트 건설로 시작하여 오직 일편단심 아파트만 건설하는 아파트건설 전문업체였다.
대명은 한때 그 성창건설의 하청일을 한 적이 있었다. 대명은 뛰어난 조직력과 관리시스템으로 공기(工期)를 무려 두 달이나 앞당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건의 하자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 업적(?)으로 대호는 성창의 박사장과 술자리를 갖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 대호는 성창의 문제점을 요목조목 지적하는 불손을 저지른다. 즉, 성창의 부실한 관리시스템으로 인하여 인건비와 자재비 등이 전체 공사비에서 3% 정도가 쓸데없이 손실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사장은 누구도 말해주지 않은 이 당돌한 지적에 즉각 비밀조사팀을 구성한다. 결과는 대호의 말이 맞았다. 결국 이 사건으로 당시 성창의 과장급이상 십여 명이 해고당하는 대수술이 단행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성창의 박사장과 대호는 아무때나 같이 점심 정도는 할 수 있는 사이가 된다. 그리고 박사장은 대호에게 아파트건설을 해보라고 종용한다. 빌라 같은 건 백날 지어봐야 코묻은 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파트건설이 어디 뚝딱 코딱지만한 빌라짓는 거하고 같은가. 당장 땅이 있어야하지 않는가.
그 문제를 성창의 박사장은 즉각 해결해주었다. 성창에서 응암동에 매입해놓은 자투리땅이 있으니 그걸 후납조건으로 대명에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분양해서 땅값을 지불하라는 거다. 그것이 대명이 처음 지은 아파트다.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첫걸음에 분양100%!
이것은 지금까지 아파트업계에 전무후무한 전설로 남는다. 물론 순전한 운은 아니다. 거기에는 대호의 뛰어난 기획력과 추진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창수는 현금지급기에서 토해낸 300만원을 대호에게 건네주면서 투덜댔다.
“젠장, 다음달 마누라가 카드 고지서를 보고 기절할지도 모르겠다. 이게 웬 현금써비스냐고...혹시 여자가 생긴 거 아니냐고...”
“걱정마, 내가 아니라고 증인서 줄 테니까...”
“새꺄, 그럼 기절이 아니라 혀를 깨물고 죽을지도 몰라.”
창수의 대답에 대호는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암튼 너한테 면목이 없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니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죽을 땐 죽더라도 원은 없어야지.”
“그래, 고맙다.”
대호를 뒤로하고 창수는 집에 오는 택시에 몸을 묻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혼자가 되니 생각이 냉철해진다.
과연 인간에게 운명이란 있는 것인가. 혹시 있다면 그 운명을 인간이 바꿀 수 있는 건가. 기원 원장의 말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하는 건가.
30년 만에 나타난 어떤 미친놈이 자신의 운명을 바꾼다고 아무 말이라도 해달라고 떼를 쓴다. 원장은 귀찮으니까 그냥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세 사람을 만나라...
그래, 곰곰이 생각해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다. 그걸 무슨 전지전능한 예지자의 예언처럼 떠받들고 실행한다. 설령 결과가 좋게 나온다 하더라도 원장의 예지능력이나 그런 거라고 믿을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생각할수록 깊은 늪에 빠져드는 기분이다.
“이게 누구야, 오사장?”
성창의 박사장은 사장실로 들어선 대호를 반갑게 맞았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사장님!”
“이야...이거 상상 밖인데...꽤재재하게 노숙자꼴인 줄 알았는데 아주 젠틀하잖아.”
대호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무려 5시간을 자신을 코디하는데 투자했다. 싸우나에가서 거지같은 몰골을 털어내고 백화점으로 달려가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을 바꿨다.
검정색 와이셔츠에 연보라 바탕에 큐빅 문양 타이, 짙은 회색 스트라이프 양복. 구두는 검정색이다. 전체적으로 도회적이며 시크한 느낌이다.
비서가 커피를 놓고 나가자 박사장이 음흉하게 한마디한다.
“어때, 괜찮지?”
“지난번 비서는...?”
“짤랐지. 그거 진상이야, 진상. 아파트 하나 챙겨줬으면 됐지 웬 바라는 게 그렇게
많은지...몇번 자고 아예 팔자를 고치겠다는 작정인지 뭔지...”
“하여간...사장님 그거는 못 말립니다.”
“이 사람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여자가 여자로 안보이면 남자 인생은 끝난 거야. 사업도 다 뿌리 힘에서 생기는 거라고... 힘없으면 뭐든 못해.”
대호는 박사장의 여자론에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고 커피를 마셨다.
“그래, 자네 소식은 줄곧 듣고 있었네만 앞으로 어쩔 작정인가?”
“아직까지 특별한 계획은 없습니다.”
“쯧쯧...그렇게 넋놓고 있어서야 되나. 이 건설업이란 건 됫박 같은 거야. 금방 뒤집혀졌다 다시 또 뒤집어지는 거라고...나도 젊었을 때 수십 번을 엎어먹고 다시 시작하고 그랬지.”
“그래서 이렇게 사장님한테 조언이라도 들을까 하고 찿아왔습니다만...”
“그래, 잘왔어. 내 그렇지 않아도 자네한테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도무지 연락할 길이 있어야 말이지. 그래도 사업하던 사람인데 핸드폰이라도 살려놓지 그랬나.”
“연락이라면...무슨 일로...”
“이거 말을 꺼내기가 좀 뭐한데 말이지...”
“말씀하십시요.”
“딴뜻으로는 듣지 말게. 자네 특별한 계획 없으면 내 일 좀 도와주지 않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이번에 내가 중국 상하이에 아파트를 지어볼까 하는데 말이야. 어디 믿을만한 놈이 있어야 말이지. 자네가 좀 맡아줄 수 없겠나?”
뜻밖의 제안이었다.
“거기서 한 2,3년 일하고 오면 여기서 다시 재기할 발판이 만들어지지 않겠어?”
달콤한 제안이다. 하지만 난 건설업계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 나이에 어느 회사에 소속이 되면 앞으로 독립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박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난 성창의 소장 정도로 인생을 끝마칠 것이다. 물론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그것이 과연 내 운명인가...
머리가 혼란스럽다.
난 비서에게 물을 한잔 주문했다. 비서가 물을 가져오자 박사장은 내가 있든 말든 비서의 엉덩이를 두들긴다. 비서가 요염하게 웃는다. 이미 둘은 한 이불을 덮은 사이인가. 그렇지 않더라도 당장 오늘 이불을 같이 덮고도 남을 것이다. 젠장, 박사장의 제안을 고민하는 나한테 저런 하찮은 것이 눈에 들어오다니...어쩌면 난 잠재의식 속에서 이미 박사장에 대한 답을 결정했는지도 모른다.
“사장님 말씀은 고맙습니다만...조금 더 제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음...그래, 그럴 줄 알았네. 그래서 내가 선뜻 오사장한테 제안을 못한 거야. 오사장은 내 밑에서 일을 하기엔 너무 그릇이 커.”
“감사합니다, 사장님.”
대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사장, 이따 같이 저녁이라도 할까?”
“글쎄요...뭐라 약속은 못하겠습니다. 제가 시간이 어떻게 될지...”
시간은 무슨 개떡 같은 시간인가. 단지 공연히 박사장하고 어색한 저녁자리가 될 것 같아 거부하는 대호다.
“그럼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하자 박사장이 문득 대호를 부른다.
“오사장...”
“예.”
“잠깐 들어와 앉아 보게.”
대호가 자리에 다시 앉자 박사장은 담배를 피워 문다. 잔뜩 뜸을 들이는 게 뭔가 중요한 얘기인 듯싶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오사장, 자네 말이야...혹시 누구한테 원한 산 일 없나?”
“예? 원한이라고요?”
“그렇다고 사소한 그런 거 말고...계획적으로 자네 회사를 말아먹으려는 정도의 원한 말일세.”
대번에 낯빛이 굳어지는 대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럼 대명이 무너진 게 누군가에 의해서 계획적으로 이뤄진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이런 얘기는 쉽게 하는 얘기가 아닌데 말이야. 내 오사장을 아끼는 마음에 하는 걸세...”
대호는 박사장 입에서 무슨 얘기가 나올지 마른침을 삼키며 뚫어지게 쳐다봤다.
“대명의 사채 말일세. 그 대부분이 사실은 한 사람한테 나온 걸세.”
“예?”
박사장은 담배를 비벼 끄며 말을 이었다.
“전주(錢主)가 한 사람이라는 거지.”
“그.,.그게 누굽니까?”
“나도 본명은 몰라. 그냥 이 바닥에서는 평창동큰집이라고만 불리지. 5년 전에 죽은 현찰왕 고복태의 미망인일세.”
“여...여자란 말입니까?”
“사실 이것도 떠도는 풍문에 불과해. 사실 그 여자를 본 사람도 거의 없고...”
대호는 아연실색했다. 너무나 뜻밖인 얘기다.
대명이 누군가에게 계획적인 의도로 무너졌다니...그것도 여자한테...
도무지 추측이 되지 않았다.
“혹시 짚히는 데 없나?”
“전...전혀 없습니다. 혹시 사장님께서 잘못 아신 건...”
“오사장,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난 자넬 아끼는 사람일세. 자네가 그렇게 되고 난 후에 여러 루트로 알아봤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이상한 걸 발견한 거야. 자네가 사채에 담보 잡힌 물건이 하나도 시장에 나오지 않았단 말이야. 즉, 사채업자가 쥐고 있다는 거지. 대부분 그렇게 담보로 잡힌 물건은 회사가 무너지면 두 달 안에 시장에 나오게 돼 있어. 얼른 현찰화해야 또 돈장사를 할 거 아닌가. 더군다나 대명 물건은 대부분 알토란이지 않나. 대지나 건물이나...그런데 단 한 건도 안 나오고 그대로 잡혀 있다는 거지. 대명을 무너트리려는 계획적 의도가 아니면 그럴 리가 없다는 거야.”
“말씀 감사합니다. 사장님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대호가 일어나 나가려하자 박사장이 한마디를 덧붙인다.
“자네, 행여 처신 함부로 하지 말게.”
“예?”
“혹시라도 원한 쪽이라면 대명이 문제가 아니야.”
목숨도 부지할 수 없다는 뜻이다.
“충고 감사합니다.”
대호는 성창에서 나와 담배부터 한 갑 샀다. 끊은 지 4년째지만 당장 한 대 피워야 머리가 맑아질 것 같았다.
공원 벤치에 앉아 줄담배를 피워댔다. 12개비째를 필 때 결론이 나왔다.
“그래, 부디쳐 보자. 어차피 덤으로 사는 목숨...더이상 두려울 것도 없다. 누군지 얼굴부터 보자.”
일주일.
일주일 만에 평창동큰집을 알아냈다.
평창동의 부동산이란 부동산은 전부 다녔다.
부동산업자는 평창동큰집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거나 아예 몰랐다. 그러다 한 허름한 복덕방에서 한 노인한테 어렴풋이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노인은 술이 한잔 들어가자 자기도 들은 얘기라면서 큰집에 대해서 늘어놨다. 그걸 근거로 다시 두어 군데 부동산에서 확인을 받았다. 알고서 물어보는데 악착 같이 잡아뗄 리가 없잖은가.
세검정 계곡을 끼고 자리 잡은 큰집은 무슨 성(城) 같았다. 3층 높이의 축대 위는 나무에 둘려싸여 집은 보이지도 않고 CCTV 카메라만 빼꼼하게 집 밖을 감시하고 있었다. 축대 가운데는 차고인 듯 철문이 굳게 내려져 있고 축대 옆으로는 사람이 오르는 옥자갈 계단이 마치 천국의 계단처럼 성문까지 이어져 있었다.
대호는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고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인터폰에서 40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 대명의 오대호라고 합니다. 이 집 주인을 뵙고 싶어 찾아왔습니다만...”
“지금 안계십니다.”
용건도 안 묻고 그냥 끊는다.
다시 벨을 눌렀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 응답이 없다.
“그래, 누가 이기나 보자.”
대호는 응답이 있든 없든 계속 벨을 눌러댔다.
한참 후 육중한 성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나왔다. 검은색 양복을 입은 곱상하게 생긴 30대 남자였다.
“무슨 일입니까?”
생긴 거와는 달리 강한 포스가 느껴지는 남자였다.
“여기 주인을 뵈러왔습니다만...”
대호는 남자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을 했다.
“안계십니다.”
“언제 오면 만날 수 있는 겁니까?”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지요.”
“조용히 돌아가시지요. 아니면 다치십니다.”
남자가 속삭이듯이 아주 나지막이 말했다.
“그 말 뜻은 뭐야, 안 돌아가면 한 대 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대호는 이죽거리며 말을 했다. 분란을 일으켜볼 생각이다. 분란이 생기면 어떻게든 여자를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좋아, 한번 쳐보시지. 쳐보라구...어?”
마치 떼를 쓰듯 머리를 들이미는 대호의 모습은 마치 시장에서 앵벌이를 하는 시정잡배 같았다.
순간, 대호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남자의 검지와 중지가 대호의 귀밑 혈에 깊숙이 꽂혔다.
대호가 눈을 뜨자 주변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아마 정신을 잃은 모양이다. 큰집은 온통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개새끼, 사람을 이렇게 내팽개치다니...”
대호는 큰집 앞 도로에 널부러져 있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떻게 됐나요?”
여자는 응접실의 스툴바에서 칵테일을 만들며 물었다.
“아직 집 앞에 있습니다. 아마 밤을 샐 모양입니다.”
페퍼민트의 에메랄드색이 보석처럼 빛났다.
“알았어요. 오늘은 그만 쉬세요.”
“그럼...”
남자는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응접실을 나갔다.
여자는 스툴에 엉덩이를 걸쳤다. 페퍼민트를 한 모금 음미하자 민트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오늘따라 페퍼민트가 달콤했다.
벌써 3일째다.
대호는 큰집 앞에서 아예 숙식을 했다. 사과 박스를 깔고 포터블렌지로 라면을 끓여 배를 채웠다. 씻는 건 몇 발짝만 내려가면 계곡이니 거기서 씻었다. 몰골은 며칠전 노숙자 꼴로 다시 돌아갔다. 머리고 양복이고 온통 거지나 다름 없었다.
기다림이다, 이창호의 바둑처럼...
누군가가 나올 것이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그러나 3일 동안 큰집에는 들어가는 사람도 나오는 사람도 없었다.
“젠장, 도대체 저놈 집구석은 오는 사람도 없나.”
대호는 제대로 익지도 않은 라면을 우걱우걱 입에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배가 고파 먹긴 먹지만 도무지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다. 그냥 뭔가가 식도로 넘어가는 느낌이다. 그때 절대 열릴 것 같지 않은 육중한 차고문이 조용한 기계음을 내며 열렸다. 움찔하는 순간 차 한 대가 기어나온다. 은색 벤틀리콘티넨탈이다.
대호가 득달같이 몸을 일으키려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워낙 앉아있던 터라 무릎이 푹 꺾인다.
“이봐! 기다려!! 기다리라고!! 거기서!!!”
간신히 몸을 일으켜 차를 따라가 보지만 이미 차는 저만치 사라진 뒤다. 차고문도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다.
젠장! 갑자기 기습공격을 받은 기분이다. 그래도 이제 희망이 보인다. 나갔으니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하지만 차는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이미 어둠이 내린 지 오래다. 5월이지만 계곡의 밤공기는 차가웠다. 졸음이 밀려온다. 자면 안돼...하지만 눈은 자꾸 감긴다... 꿈과 현실이 오락가락한다.
어디선가 벌이 날아온다...우우우웅...벌을 쫓으려고 손을 허우적 댄다. 점점 벌소리가 커진다.
...우우우우우웅...
벌소리가 아니다. 눈을 번쩍 떴다. 차소리다. 저만치 차의 헤드라이트가 보인다. 대호는 벌떡 일어나 차를 가로 막아선다.
...끼익...벤틀리는 신경질적인 마찰음을 내며 급정거했다. 검은 양복의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린다.
“이거 뭐하는 짓입니까?”
낮지만 위압적인 목소리다.
“비켜, 난 차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야겠어.”
“차안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검은 양복의 남자가 대호를 가로막았다.
“비켜! 새꺄!!”
대호가 남자의 안면에 주먹을 날렸다. 분명히 남자의 안면을 쳤다고 생각하는 순간 대호는 허공에 떠 있었다. ...콰당... 대호는 저만치 나자빠졌다.
“허어...유도도 하나?”
대호는 이죽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만 돌아가 주시지요. 계속 이러시면 안전은 보장 못합니다.”
“그래, 날 죽여, 죽이기 전에는 못가. 난 저 차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야겠어.”
“그럼 할 수 없군요.”
남자가 대호 쪽으로 성큼 걸어왔다. 남자의 눈이 칼날처럼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 차안에서 매끄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일 11시까지 오시라고 해요.”
대호는 흠칫 놀랐다.
“내일 11시까지 오십시요.”
남자는 두말 없이 운전석으로 올라타 차를 몰았다. 대호는 스쳐 지나가는 차 윈도우를 보았다. 새까만 썬팅 안으로 뒷좌석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는 여자의 실루엣이 얼핏 지나갔다.
찜질방은 오만사람들로 바글거렸다.
대호의 얘기가 끝나자 창수는 목이 타는지 캔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도대체 이걸 믿어야하는 건지...정말 저놈 말처럼 운명이란 건 존재하는 건가.
군계란 하나를 입안 가득 집어넣고 우걱우걱 씹으며 대호가 말을 이었다.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어. 필연적이야. 운명이라고...성창의 박사장을 통해서 평창동큰집을 듣게 된 과정만 봐도 확실하잖아.”
“좋아, 일단 그렇다고 치자. 근데 넌 그 여자가 누군지 짐작이 안가?”
“전혀 모르겠어. 나를 파멸시킬 정도로 여자한테 원한 산 일도 없고...그리고 평창동큰집 그런 여자를 내가 언제 만날 수나 있었겠어? 뭔가 오해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유일 수도 있겠지. 어쨌든 상관없어. 난 내 운명을 어떤 식으로든 뒤집어엎을 거니까...난 무슨짓이든 해. 그 여자가 기라면 기고 발가락을 핥으라면 핥겠어.”
찜질방은 참으로 편리한 논스톱 시스템 공간이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전신마사지를 받은 후 페이스케어를 받았다. 어제 저녁에 맡긴 급 드라이크리닝된 양복을 입고 깨끗이 닦여진 구두를 신으니 다시 말쑥한 모습이다.
아침밥은 안 먹는 게 좋다. 짐승이든 인간이든 배가 고파야 도전적이 된다. 오늘은 내 인생을 건 한판 승부를 해야한다. 지면 평창동에서 살아 돌아오지 않으리라...굳은 각오를 하고 평창동으로 향했다.
평창동큰집 벨을 누르자 절대 열릴 것 같지 않은 성문이 철커덕...둔탁한 쇠음을 내며 열렸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정원은 잔디가 깔려 있었고 바위와 함께 조경수가 그림 같은 조화를 이뤘다. 그 뒤로 산자락을 배경으로 유럽풍의 하얀색 2층 저택이 웅장하게 서 있었다.
남자가 현관에서 대호를 맞이한다.
“들어가시지요.”
세번째 만나지만 말투나 행동이 전혀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친구다.
응접실로 들어서자 남자는 대호를 소파로 안내하고 돌아나갔다.
대호는 주인 없는 응접실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체적으로 절제된 화려함으로 고급스러움을 풍기는 집이었다. 한쪽에 호마이카 풍의 클래식한 스툴바가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옆으로 대형 수족관이 벽 전체를 차지했다. 전면으로는 벽화가 부조된 자연석 화강암이 웅장하게 자리 잡고 옆으로 2층으로 연결된 계단이 있었다.
문득 2층에서 내려오는 여자가 보였다.
대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여자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상당한 미인인 여자는 얼핏 나이가 짐작이 되지 않았다. 30대인가...40대인가...
여자가 대호한테 걸어와 목례를 하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대호도 엉겁결에 허리를 접으며 인사를 한다.
“아...예...처음 뵙겠습니다...”
고개를 들은 여자가 살짝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머금었다.
순간, 대호는 머릿속으로 번개가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아! 이 여자...!!
이름이...강...강...
강...미영...
그래, 강미영...
창백해진 대호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오랜만이군요, 오대호씨...”
과연 오대호는 자신의 운명을 완벽하게 복기했을까...?
운명뒤집기 한판 승부의 결말은...
3편에서 밝혀집니다. ^^
2008-09-21 본 내용은 작가의 순수 창작물이므로 무단복제나 도용, 표절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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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선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