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전.

1997년 4월.

아버지가 죽었다.

IMF. 흔히들 말하는 대한민국 외환 위기상황은 이미 그때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경제 상황이 속으로 곪아터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상황에 놓여진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버지는 우리나라 2위의 자동차회사 부품을 만드는 협력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조짐은 6개월 전부터였다. 어음결제가 6개월로 늘어났다. 아버지가 버틸 수 있는 방법은 흔히 말하는 어음깡을 해서 자금을 회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날부터 그 어음깡조차도 되지 않았다. 돈을 만지는 사채업자들은 나쁜 징후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후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납품하는 자동차 회사가 곧 부도가 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믿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2위인 회사인데 그렇게 쉽게 부도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사실 그들의 예측은 정확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6개월 후에 우리나라 2위인 자동차 회사는 IMF를 일으킨 원흉이란 손가락질을 받으며 다른 회사로 합병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버지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자동차 회사는 일방적으로 아버지와의 협력업체 관계를 끊어버렸다. 그때라도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2개월동안 발이 닳도록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협력업체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불가항력이었다.

더 이상 뛸 곳이 없다는 것을 느낀 아버지는 평생을 바친 텅 빈 공장에 자신의 목을 매다는 걸로 자신의 노력의 끝을 매듭지었다.

“자퇴를 한다고?”

교수는 돋보기 안경을 약간 밑으로 내리며 책상 앞에 앉아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약간 고개를 떨구고 있는 여자는 평소에도 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해 보였다.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건너 여자 쪽으로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자퇴를 한다면 뭔가 사연이 있겠지. 사연은 개인적인 사정이니까 묻지 않겠어. 하지만 말이야. 어떤 이유든 간에 신은서 같은 학생이 학업을 포기한다는 건 본인 자신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손실이야. 자넨 유능해. 내가 보기엔 뛰어난 재원이야.”

교수의 말이 잠깐 끊기는 듯 싶더니 교수의 손이 은서의 어깨를 잡았다. 본능적으로 은서의 어깨가 움찔해지는 걸 교수는 느꼈다.

“등록금 문제라면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은서의 어깨를 잡은 교수가 허리를 굽혀 자신의 얼굴을 은서의 뺨 가까이 들이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장학금이라는 게 있잖아. 내가 추천해줄 수 있어.”

은서는 입술을 깨물고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은 목소리를 입밖으로 끄집어냈다.

“돈을 벌어야 해요.”

“아..그렇군. 등록금 문제만이 아니군. 돈이 필요하군. 그것도 방법이 있지. 내 조교수가 되는 건 어때?”

은서의 어깨에서 손을 뗀 교수의 손이 미끄러지듯 밑으로 흘렀다. 검정 니트 위로 터질듯한 은서의 가슴 위에 교수의 손이 머물렀다. 교수의 손이 은서의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마치 빵빵하게 불은 풍선을 주무르는 느낌이었다. 이 가슴이 그동안 얼마나 교수의 애를 태우게 했던가. 강의 때마다 교수의 눈은 언제나 은서의 가슴에 머물렀다. 은서가 걸을 때 미세하게 흔들리는 가슴을 훔쳐보며 마른 침을 삼킨 게 얼마인지 모른다. 교수는 기회가 될 때마다 은서에게 말을 걸었지만 언제나 돌아오는 건 냉랭한 반응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자신의 꿈이 이뤄질 거라는 생각에 교수는 잔뜩 들떠 있었다. 교수는 은서의 귀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으며 헐떡이듯 말을 이었다.

“조교수 월급으로도 부족하다면 다른 방법도 있어. 업체를 소개해주지. 자료정리나 통계조사 같은 간단한 업무만으로도 한달에 이삼 백은 충분히 벌 수 있는 곳이야. 어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교수의 혀가 은서의 귀 안으로 헤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교수에게는 은서의 귀가 여자의 생식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은서의 손이 교수의 뺨을 후려치는 순간 교수는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야 했다.

학교 앞 선술집은 언제나처럼 손님들로 북새통이었다. 싸고 푸짐한 안주 덕분에 주머니 가벼운 학생들에게는 그야말로 오아시스 같은 가게였다. 이곳에서는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로 조용한 대화가 불가능했다. 그야말로 목청이 터지도록 말을 해야 겨우 대화가 될 정도였다. 그런 속에서 유독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야! 자퇴를 했다고!”

민우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면서 내뱉은 말이다. 그런 민우에게 은서는 눈을 하얗게 흘겼다.

“왜? 아예 광고를 하지 그래. 신은서 자퇴했다고..”

은서의 말에 민우는 비로소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한테 꽂혀있었다. 민우는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사람들한테 손을 흔들고 은서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미안, 미안.. 너무 뜻밖이라서 말이야. 그런데 자퇴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아직 학기도 남아있고..”

“너 그거 알아? 지식의 허기는 이성이지만 생체적 허기는 본능이라는 거..”

은서는 부침개를 크게 떼어내 입안 가득 밀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인간은 누구든 배고픈 건 못참아. 소크라테스든 뉴턴이든 가우스든.. 그런 사람들도 배고프면 수학이든 철학이든 물리학이든 다 때려치웠을 거야. 그래도 나로서는 일주일 굶고 결정한 거니까 나름대로 대단한 거 아니겠어?”

“일주일을 굶었다고?”

“물은 먹었어.”

마지막 남은 부침개를 입안에 집어넣고 우걱우걱 씹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말하는 은서를 보자 민우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런 은서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사실 은서의 사정을 알고 민우는 여러 가지 제의를 했었다. 돈을 빌려주겠다. 방을 얻어주겠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버럭 화를 내는 은서였다. 절교까지 선언했었다. 그후로 민우는 은서에게 그런 말을 입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민우는 신경질적으로 소주 한잔을 입에 털어넣고 서빙하는 여자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모!! 여기 통닭 한 마리 주세요.”

“통닭도 사주려고?”

은서가 활짝 웃었다.

“야! 신은서 자퇴했다는데 통닭이 문제야? 뭐든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내가 오늘은 홀딱 벗고 쏠 테니까.”

“김민우, 오늘 제법 쓸만한데..”

“오늘만이야? 난 항상 쓸만한 놈이야. 이거 왜이래.”

민우의 말에 은서가 목젖이 보이도록 깔깔대며 웃었다. 오랜만에 웃어보는 웃음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잔에 소주를 따르던 민우가 뜬금없이 말을 뱉는다.

“엄마?”

“응. 어머니는 뭐하셔?”

민우는 알고 싶었다. 은서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두달이 지났다. 그런데 은서가 일주일을 굶을 정도로 수입이 없다면 도대체 은서 어머니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을 묻고 싶은 것이다.

“몰라. 매일 어딜 나가는 것 같기는 한데..”

“돈은..벌지 않고?”

“우리 엄마 잘 알잖아. 어디 가서 돈 벌 사람이 아니라는 거..”

“하지만..”

“그만해. 엄마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바뀌지 않아. 가족 같은 건 몰라. 오직 자신뿐이지. 세상을 편하게 사는 거야. 때로는 그런 엄마 성격이 부럽기도 해.”

말을 끝낸 은서는 소주 한잔을 입에 털어넣고 젓가락으로 안주를 찾았다. 하지만 이미 부침개 안주는 바닥이 났고 마지막 남은 단무지 하나를 입안에 넣고 우적우적 씹는 은서다. 은서가 단무지를 먹는 걸 처음 보는 민우다. 환경은 사람을 이렇게 변하게 하는 모양이다.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돈을 벌어야지. 자리 알아놨어.”

“취직을 했다고?”

“글쎄.. 그걸 취직했다고 해야 하나. 음식집에서 일하기로 했어.”

“음식집.”

민우는 눈이 튀어나올 듯이 물었다.

“음식집에서 일한다고?”

“응. 고깃집이야.”

“왜 그런 데서 일해? 회사에 취직할 수도 있잖아.”

“회사는 안돼. 아버지 때문에 나도 신용불량자로 돼 있어. 취직도 힘들지만 취직이 된다고 해도 벌은 돈 전부 빚 갚는데 들어갈 거야.”

“은서야. 그러지 말고 우리 아빠 회사에..”

민우의 말을 은서가 끊는다.

“더군다나 음식점에서는 최소한 세 끼 밥먹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거면 충분해.”

“은서야..”

“통닭 나왔습니다.”

민우가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종업원이 주문한 통닭을 테이블에 놓는다. 막 튀겨진 통닭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며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통닭이 놓이자마자 닭다리 하나를 들고서 입에 가져가는 은서다. 그것을 본 민우는 더이상 해야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둠에 묻힌 동네는 인기척 하나 없었다. 두 사람이 지나가면 어깨가 부딪칠 만큼 좁은 골목길 양옆으로는 지은 지 수십 년은 된 듯한 낡은 판자집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민우야. 넌 정말 좋은 녀석이야. 꽤 괜찮아.”

민우에게 부축을 받으면서 비틀비틀 걷는 은서는 혀가 꼬이고 있었다. 오늘 소주 두 병은 족히 마신 은서다. 평소 소주 반 병도 마시지 못한 주량에 두 병이면 혀가 꼬부라지고도 남을 양이었다.

“집이 어디야.”

“다 왔어. 저어기.. 외등 켜진 데 보이지? 거기 옆이야. 울 아빠가 남겨준 유일한 유산이야. 달랑 방 한칸. 화장실은 세들어 사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해. 아침이면 줄을 서야 한다구. 어때. 꽤 낭만적이지.”

은서는 자신의 말이 우스운지 깔깔대며 웃었다.

“그래도 말이야. 난 이 집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거야. 내가 10년후에 어디 살든, 20년후에 뭐가 돼 있든 난 잊지 않을 거야. 다시는 이런 집에서 살지 않겠다고.. 나에게는 자극제이며 멘토 같은 거지.”

은서는 집 앞 외등에 등을 기댔다.

“앞으로 내가 보고 싶으면 여기 와서 저 창문에 대고 나를 불러. 로미오처럼 말이야. 줄리엣, 창문을 열어주오. 달빛에 비친 당신의 얼굴만으로도 난 이 밤을 온갖 꽃이 만발하는 아름답고 향기가 가득한 화원처럼 꾸밀 수 있답니다.”

마치 연극배우처럼 양팔을 벌리며 대사를 외는 은서 눈앞에 민우의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

“은서야. 난..”

“그만둬.”

은서의 얼굴은 금방까지와 달리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같은 일을 하루 두번씩이나 겪기 싫으니까.”

“키스 정도는 괜찮잖아.”

“키스 정도라고 말하지마. 그게 시작이야.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잖아. 하지만 지금 내 심정은 그런 것에 신경쓸 만큼 한가하지 않아. 기다려. 언젠가는 네 뜻대로 될 테니까.”

“그게 언젠데.”

민우의 볼멘 말에 은서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거 알아? 남자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어린애 같다는 거. 이제 집에 갈 시간이야. 착한 아이가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늦었잖아.”

“젠장.”

민우는 한숨을 토해내며 낮게 욕을 뱉었다. 항상 이런 식이다. 민우로서는 도저히 은서라는 여자를 이길 수가 없었다.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 민우다. 민우가 막 몸을 돌리려는 순간 어디선가 명랑한 여자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게 누구야.”

막 집앞으로 걸어오는 여자가 있었다.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한눈에 봐도 상당한 미인으로 보였다. 여자의 눈은 취기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 잘생긴 왕자님은..”

“김민우입니다. 어머니.”

“그래. 기억났어. 김민우. 우리 은서 남친이지?”

“네..”

은서와 은서 어머니는 한눈에 봐도 모녀지간이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닮았다. 그만큼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여자였다. 거기다 40대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젊어 보였다. 기껏해야 30대 초반으로 보일 정도였다.

“오늘 은서 에스코트하고 온 거야?”

“네. 은서가 술을 한잔해서..”

“웬일이야. 우리 은서가 술을 다 마시고. 술이라면 코를 막고 인상을 찡그리는 애가..”

“그럴 일이..”

“왜? 무슨 일인데.. 둘이 싸웠어?”

“그게 아니고..”

민우의 말에 은서가 끼어든다.

“나, 자퇴했어.”

“자퇴했다고?”학교를?“

은서는 대답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퇴..그거 잘했다. 학교에서 비싼 등록금주고 배우면 뭐하니. 그게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

민우의 말에 힐책이 묻어있었다. 은서 어머니는 민우의 힐책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이 담배 한대를 입에 물고 말을 이었다.

“생각해봐. 4년동안 수천만 원 들여서 공부해서 남는 게 뭐야. 취직도 잘 안되는 세상에 대학 졸업장 따위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거야. 이 세상은 돈이야. 돈이 모든 것의 바로미터가 된다 이거야. 대학 안나와도 돈 많은 놈이 승리자고 돈 많은 놈이 존경받는 거야.”

“그래서 돈 벌려고.”

“그래, 역시 니 아빠의 죽음이 결코 헛된 건 아니었어. 덕분에 니가 이렇게 인생을 알게 됐잖니. 니 나이에 인생을 안다는 것은 굉장히 빠른 거야. 내가 장담할게. 넌 승리자가 될 거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승리자 말이야.”

“그래. 엄마 말처럼 꼭 승리자가 될 거야. 기다려줘. 내가 승리자가 될 때까지. 그리고 내가 엄마한테 어떻게 할 건지 그것도 기대하고.”

은서의 말에 은서 어머니는 동네가 떠나갈 듯이 웃었다. 웃음의 뜻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공허하게 들릴 뿐이었다.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