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용은 겨우 밥 두어 숟가락을 뜨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벌써 며칠째인지 모른다. 심장이 멎은 이후로 두용은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루종일 먼산을 바라보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게 일과였다. 마치 겨울잠을 자는 곰 같았다. 그런 두용의 모습을 보는 아내는 복창이 터질 일이다.

“도대체 왜그래? 그러다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아내의 쫑알대는 소리를 등뒤로 하고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두용이다.

“방귀뀐 놈이 성낸다고. 사람이 바람을 피웠으면 뭔가 미안해할 줄 알아야지. 뭘 잘했다고 대대하게 구는 거야.”

아내가 버럭 소리를 질러보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일 뿐이다.

“어휴..내 속이 썩는다. 썩어.”

알 수 없는 게 여자의 마음이라고 평생가야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남편한테 여자가 생기자 아내한테 묘한 마음이 일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내 것이라고 생각한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뺏긴다는 생각을 하니 분통이 터질 일이다. 그것도 딸같이 새파랗게 젊은년이지 않는가. 아내의 마음속에는 질투와 소유욕으로 가득 찼다. 그런 마음에 평생 생각도 못한 지극정성을 남편한테 쏟지만 남편의 마음은 온통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분명히 그년일 것이다.

아내는 어금니를 악물고 다짐한다.

-그래. 한번 걸리기만 해봐라. 요절을 내줄 테니까.

방에 들어온 두용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컴퓨터를 켜고 오로에 접속한다. 역시 다비는 없다. 무슨 이유인지 다비에게서 연락이 없다. 두용 자신도 다비에게 적극적으로 연락하지 못하고 있다. 서로의 어떤 알지 못하는 이유로 연락을 하지 못하는 두 사람. 그럴수록 두용은 더더욱 다비가 그리워졌다. 뜬눈으로 밤을 새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마음에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한 것이 몇번인지 모른다. 하지만 용기가 없다. 목소리를 들으면 보고 싶을 것이다. 지금 심정 같아서는 지구 끝이라도 단숨에 달려갈 두용이다.

그러나 다비를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다음이 두렵다. 다비를 만나고 난 후에 벌어질 일이.

그런 소심한 두용의 마음이 혹시나 하는 우연에 기대를 해본다. 만약 우연히 오로에서 만나게 된다면 어쩔 수 없는 운명일 것이다. 운명을 인간이 어떻게 피하겠는가. 바둑의 정석처럼 그런 수순으로 가야 한다. 그런 마음에 두용은 하루에도 수십 번 오로를 들락거린다. 그러나 역시 다비는 보이지 않는다.

두용에게 문자 하나 보내지 못하는 다비의 심정이 오로에 들어올 만큼 마음이 편할 리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두용이다. 다비가 오로에 들어올 가능성이 없음을 알고도 두용은 언제나처럼 하릴없이 기다려볼 생각에 아무 대국실이나 들어가 앉는다. 눈앞에 바둑판이 펼쳐져 있는데 바둑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바둑돌 놓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트린다. 그것도 잠시, 바둑돌 놓는 소리마저도 두용의 귀에서 사라졌다.

불현듯 두용의 눈앞에 다비가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두용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꿈인가, 생시인가. 아무래도 좋았다.

두용은 다비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다비의 몸은 불덩이 같았다. 너무 뜨거워서 타버릴 것 같았다.

그럴수록 두용은 다비를 더욱 억세게 끌어안았다.

다비도 행여 두용을 놓칠 새라 허리를 끌어안은 손을 깍지를 끼었다.

두 사람은 뜨겁게 타올랐다.

마치 거대하게 쌓아올린 장작더미가 타오르듯이.

불길은 두 사람을 휘감고 화려하게 타올라갔다.

두 사람은 하나가 된다.

하나의 불덩이가 되었다.

뜨겁고 화려한 불덩이.

불길이 절정에 이르자 다비가 길게 목을 빼 두용을 불렀다.

“아저씨”

그 소리가 두용을 몽환에서 깨운다.

컴퓨터 모니터에 쪽지가 떠있다. 다비다.

“다비야”

입에서 나온 소리가 쪽지로 전달될 리가 없다. 두용은 황급히 쪽지에 글을 쓴다.

-다비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럭저럭

글이란 이상하다. 마음은 불처럼 뜨거운데 글은 덤덤하다.

-몸은 어때요?

-괜찮아

-괜찮으시다면 우리 한번 만나요

두용이 생각한 그대로다. 연락이 되면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두용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 그러지. 어디서 만날까.

-저희 집으로 초대할게요

-다비 집으로?

두용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

-네. 아저씨한테 제가 지은 밥 한번 대접하고 싶어요

다비의 말에 두용은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너무 뜻밖인 상황이다.

두용에게 대답이 없자 다비가 재촉을 한다.

-아저씨. 왜 대답이 없어요? 싫으세요?

-아니야. 괜찮아.

-그럼 내일 5시로 약속해요. 우리 아파트는 아실 테고 호수는 1502호여요.

-그래. 5시까지 갈게

-그럼 내일 뵐께요 ^^

다비가 오로에서 나간 이후로도 두용은 한참을 그대로 망연히 앉아있었다. 여자가 남자를 집으로 초대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건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각별하고도 각별하다는 뜻이다. 남자가 여자한테 집으로 초대 받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라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러나 마냥 기뻐할 일만도 아니다. 그 기쁨 뒤에 엄청난 불행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두용은 이미 알고 있다.

두용은 손으로 심장을 어루만졌다. 심장은 마치 갓난아기가 잠들 듯이 평안하게 뛰고 있었다.

문지훈.

어쩌면 내일이 나한테는 이세상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르겠네. 그렇다고 원망하지 않아. 자네가 날 죽인다고 해도 말이야. 난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이야. 날 살려준 자네한테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여자를 뺏는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겠나. 짧지만 그동안 자네 덕분에 행복했네. 그리고..

미안하네.



아내는 가재눈을 하고 남편을 째려보았다. 오늘은 아무리 보아도 이상하다. 며칠동안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밥도 안먹고 뒹굴 대던 남편이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목욕을 다녀오고 이발을 하고 부산을 떤다.

“어디 가려고?”

“...”

아내의 물음에 남편은 대답 없이 이 옷 저 옷 갈아 입는데 여념이 없었다. 아예 아내란 존재 자체를 무시하고 있었다. 남자가 여자한테 눈이 멀면 보이는 게 없는 법이다. 남편은 드러내놓고 그년을 만나러 가는 걸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아내는 이번에 아예 끝장을 낼 각오다. 우선 남편이 그년을 만나는 현장을 덮쳐야 한다. 그렇다고 섣불리 미행하다가는 만사를 그르칠 수도 있다. 그래서 미리 준비한 것이 있었다.

아내는 가게로 내려와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떨어지고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럭키 용역 박실장입니다.”

“기억하시겠어요? 며칠 전에 상담했던..”

“아..예. 사모님. 남편분이 움직이십니까?”

“네. 아마 오늘 그년을 만날 모양이어요.”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제가 그쪽으로 가지요.”



밝은 감색 양복을 입은 두용은 지금까지의 어눌함을 벗어 던지고 몰라 볼 정도로 스마트해 보였다. 얼굴도 생기가 넘쳐 보였다. 두용은 소나타의 시동을 걸고 집 현관을 힐끗 돌아보았다. 아내가 집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온 두용이다. 미행할 염려는 없다. 두용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소나타를 출발시켰다. 소나타가 출발하자 가게 맞은편에 서있던 검정색 그랜저가 미끄러지듯 소나타를 쫓았다. 그 모습을 창밖으로 내려다 보고 있던 아내는 입술을 깨물었다.



소나타의 목적지는 의외로 가까운 곳이었다. 집을 떠난 지 20분쯤 후에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고 좌회전을 받은 소나타는 한 아파트 앞에 차를 주차시켰다. 두용은 한아름 되는 장미바구니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오던 길에 꽃집에서 산 장미였다. 두용이 아파트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탄 것을 확인한 남자는 그제야 느릿느릿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가 멈춘 층수를 확인했다. 15층이다. 한 층에 두 가구가 있는 구조인 아파트이니 1호 아니면 2호다. 남자는 우편함을 뒤졌다. 1501호와 1502호. 목표물이 어디로 갔는지 확인하는 건 10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1501호에는 여러 사람의 우편물이 있었다. 최소한 네명 이상의 가족이 살고 있는 가구다. 1502호에는 윤다비란 이름의 우편물만이 있었다. 남자는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가기가 무섭게 여자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박실장입니다.”

“어떻게 됐어요.”

“남편분께서 여자 아파트로 갔습니다.”

“아파트!”

여자의 목소리가 마치 발정난 암고양이처럼 찢어졌다.

“거기 어디여요!”



다비는 두용이 내미는 장미바구니를 받아들고 비명을 질렀다.

“정말 예뻐요.”

“여자 집에 초대받는 건 처음이라 뭘 사올지 몰라서..”

“처음치고는 센스가 있으신데요. 어서 들어오세요.”

다비는 현관 앞에 쭈삣거리고 서있는 두용의 팔을 끌었다.

거실로 들어선 두용은 집안을 두리번거렸다. 거실 밖으로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아늑한 분위기의 집이었다. 집안을 두리번거리던 두용의 눈에 거실장 위에 놓여진 스탠드형 액자가 보였다. 다비와 한 남자, 그리고 나이 지긋한 여자가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이었다.

“작년에 엄마하고 찍은 거여요. 같이 찍은 남자는 누군지 알죠?”

다비의 말에 두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지훈이다.

“엄마한테는 아들 같았고 나한테는 목숨 같은 남자였어요. 지훈이가 죽기 전까지는요. 겨우 8개월 전이죠. 엄마는 한달 만에 지훈이란 존재를 잊었어요. 제 걱정뿐이었죠. 제가 지훈이를 따라 죽을까봐 언제나 노심초사였어요. 그때는 숨을 쉬고 산다는 것이 고통이었어요. 지훈이가 없는 이 세상은 저한테 아무 의미가 없었어요. 매일 잠을 들면서 기도를 했어요. 지훈이 꿈을 꾸면서 영원히 눈을 뜨지 않기를.. 그런 저였어요. 불과 반년 전까지..”

다비는 말을 끊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호수 위 하늘은 온통 피빛 노을로 물들고 있었다. 다비의 얼굴도 붉게 물들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지만 두용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침묵을 다비가 깨트린다.

“노래 한곡 들으실래요?”

다비가 오디오 버튼을 누르자 스피커에서 경쾌한 음악이 나왔다. 팝송이었다. 두용이 처음 들어보는 노래인데 무척 귀에 익었다.

“이 노래 들은 적 있어요?”

“아니, 처음이야.”

“어때요?”

“좋군.”

“그럼 듣고 있군요.”

“무슨 말이야?”

“지훈이가 말이어요.”

다비가 지훈이한테 들려주는 노래였다.

“듣고 있지. 지훈아. 퍼프대디(Puff Daddy)의 아일비미싱유(I’ll be missing you). 네가 좋아하는 노래잖아.”

두용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비는 마치 그 심장소리를 들으려는 듯 가슴에 귀를 대고 가만히 두용을 안았다.

“하지만 말이야. 이게 마지막이야. 이제 잊어야 돼. 퍼프대디도 비틀즈도 바둑도 램브란트도 무라카미류도.. 다 잊어야 돼. 잊지 않을수록 너만 힘들어져. 다 진 바둑을 계속 붙들고 있는 고통이 어떤 건지 너도 알잖아. 일류는 돌을 던질 곳을 잘 알아. 이제 던져. 넌 언제나 내 가슴속에 있을 거야. 그렇다고 내가 너만 생각하고 살수는 없어. 그렇게 산다면 아마 1년도 안돼 난 미쳐버리고 말 거야. 난 새로운 사랑을 찾았어. 너만큼은 아니지만 그 사람을 좋아해. 너도 잘 아는 사람이야. 너 때문에 만난 사람이니까.”

두용의 가슴에서 얼굴을 뗀 다비가 두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야.”

두용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지훈이의 감정인지 두용의 감정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두용의 눈에는 오직 다비만이 보였다. 지금 이순간 두용에게는 오직 다비만이 존재했다. 다비의 눈과 두용의 눈이 점점 가까워졌다. 다비의 눈에 두용이 비치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다비의 입술이 두용의 입술에 살포시 내려 앉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두용의 입술이 열리고 다비를 받아들였다. 마치 로얄젤리처럼 매끄럽고 달콤한 살점이 두용의 입안에서 춤을 추었다. 두용은 머릿속이 하얗게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터질 것 같았다.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 죽어도 좋았다. 이게 인생의 라스트 포인트라고 하더라도 후회는 없다. 두 사람의 뜨거운 키스는 영원처럼 계속될 것 같았다. 그때 그 뜨거움을 깨트리는 소리가 있었다.

“이게 뭣들 하는 짓거리야!”

본능적으로 떨어진 두 사람이 소리나는 곳을 돌아보았다. 아내가 현관을 박차고 들어와 있었다. 순간 두용은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 잠깐의 순간에 아내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다비의 뺨을 후려친 건 순직간이었다.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뺨을 맞은 다비는 나가 떨어지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람이 그렇게 빠를 수 있다는 걸 두용은 처음 보았다. 두용이 어떻게 할 사이도 없이 아내는 이미 쓰러진 다비를 깔아뭉개고 머리카락을 쥐 뜯으며 아귀처럼 소리를 쳤다.

“이 창녀 같은 년아. 뭐라고?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그런 사이가 아닌 년이 유부남을 집으로 끌어들여 이 딴 짓거리야!!”

“그만둬!”

두용이 필사적으로 아내를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어디서 힘이 나오는지 아내의 저항도 만만치가 않았다.

“이것 놓고 말해!!”

“이 마당에 무슨 말이 필요해. 이런 더러운 년은 죽어야 해.”

세 사람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남편의 불륜을 목격한 아내는 이미 눈이 뒤집혀져 있었고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다비는 정신을 놓고 있었다. 그런 다비를 구하려는 두용의 눈에도 보이는 건 없었다.

“그만두란 말이야!!”

두용은 아내를 잡아 거칠게 뿌리쳤다. 두용의 완력에 내동댕이쳐진 아내는 거실 바닥에 세차게 머리를 부딪치며 잠깐 정신을 잃었다. 그 잠깐 사이, 정신을 차린 순간 아내는 숨이 턱 막혔다. 두용이 자신을 깔아뭉개고 목을 조르고 있었다.

“진짜 죽어야 할 인간은 네년이야! 너같이 더러운 년은 진즉 죽었어야 해. 죽어버려.”

“컥컥컥..”

아내는 버둥대면서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두용의 손을 풀려고 안간힘이었다. 그러나 여자의 힘으로 남자의 완력을 당해낼 재간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두용은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본 다비가 두용을 떼어 놓으려고 필사적이었다.

“아저씨! 안돼요!! 그만둬요!!”

“죽어!! 죽어버려!!”

“컥컥컥..”

절규와 발악, 그리고 숨 넘어가는 소리.

그 뒤로 보헤미안 랩소디의 절정 부위를 격렬하게 부르는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Mama mia, mama mia, mama mia

Let me go

Beelzebub has a devil put aside for me, for me, for me

So you think you can stone me

And spit in my eye

So you think you can love me and leave me to die

Oh baby, can't do this to me baby

Just gotta get out

Just gotta get right outta here

마치 저주처럼 격정적으로 퍼붓던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가 아름다운 미성으로 마지막을 갈무리했다. 노래가 끝나고 집안에 정적만이 흘렀다. 밖은 이미 어둠에 묻혀있었다. 어둠에 묻힌 거실에 세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축 늘어진 여자. 그 여자 위에 올라타 망연자실 고개를 떨구고 있는 남자. 마치 이 믿기지 않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거실바닥에 머리를 박고 양손으로 감싸고 있는 여자. 세 사람의 그림자는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먼저 움직임을 깬 것은 다비였다. 다비가 눈물 범벅인 얼굴을 들었다.

“아저씨, 어떡해요.”

“자수해야지.”

두 사람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거실 밖으로 붉은 달이 떠있었다.



두용이 자수한 이후로 다비는 동분서주였다. 다비는 먼저 두용과 자신이 내연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심장의 기억을 설명해야 했다. 두용을 수술한 의사가 의학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 짐을 지었다. 두용의 지인들은 평소 아내의 부도덕한 행동과 불성실한 가정생활에 대해 증언했다. 판사 앞에서 변호사는 열변을 토했다.

다른 여자의 집에서 아내를 살해한 남편의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소 부도덕한 소행을 일삼던 아내가 자신의 관점에서 남편을 보고 원인을 제공하여 우발적으로 벌어진 범행이므로 현명하신 판사님께서 이 점 참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변호사의 말처럼 판사는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

피고 전두용 징역 7년에 처한다.



3개월 후.

어제 내린 눈으로 교도소는 온통 하얗게 덮여있었다.

머리를 빡빡 깎은 두용은 교도관의 인도로 면회소 문을 열고 들어섰다.

8명이 동시에 면회를 할 수 있는 면회소 안은 8개의 의자가 놓여 있고 수감자와 면회자 사이에는 두꺼운 유리벽이 가로막혀 있었다. 수감자와 면회자는 유리벽에 점점이 원형으로 뚫려있는 구멍으로 상대방의 말소리를 전달할 수 있었다. 면회소 안에는 이미 몇 명의 수감자들이 면회자와 함께 대화를 하고 있었다.

“3번이다.”

교도관이 무미건조하게 두용에게 말했다.

3번, 왼쪽 세번째 칸이다. 두용이 세번째 칸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유리벽 밖으로 다비가 앉아있었다.

“아저씨.”

두용을 본 다비가 반가움에 목소리를 한 옥타브 올렸다. 다비의 표정과 달리 두용은 무심한 얼굴이다.

“왜 또 왔어. 이제 그만 오라니까.”

“그런 말이 어딨어요. 먼길 온 사람한테..”

“이제 충분해. 그만 와도 돼.”

“전 충분하지 않아요. 아저씨 나올 때까지 올 거여요.”

“7년이야. 긴 세월이야.”

“6년9개월이어요. 정확히 2442일 남았어요.”

“다비도 알고 있잖아. 사람의 감정은 변하게 돼 있어. 다비가 지훈이를 잊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6개월뿐이 걸리지 않았어. 그런데 7년동안 같은 감정을 가질 수는 없어. 결국 우린 상처를 받을 거야.”

“만약 지훈이가 살아있다면 전 7년이 아니라 70년이라도 기다릴 거여요. 하지만 지훈이는 죽었어요. 죽었기 때문에 포기한 거여요.”

두용은 고집불통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우리..”

다비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결혼해요. 아저씨 출감하면..”

“결혼?”

두용의 눈이 커졌다.

“내가 출감하면 몇 살인지 알아?”

“50살이죠. 그 나이에 저 아니면 누가 결혼하자고 그러겠어요.”

다비는 자신의 말이 우스웠는지 깔깔거렸다. 그런 다비를 본 두용은 어처구니가 없어 할말을 잃었다.

“그나저나 괜찮아요? 심장 말이어요. 제가 아저씨한테 프로포즈한 걸 들었다면 지훈이가 벌써 화를 냈을 텐데요.”

그러고 보니 심장은 평안했다.

“아마 지훈이는 떠난 것 같아.”

“떠나요?”

“언제부터인지 지훈이의 기억이 나한테 끊어진 것 같아. 다시 계산력도 약해지고 바둑도 초보나 다름없어.”

“그래요?”

그날 다비가 한 말을 지훈이가 듣고 이 세상과의 마지막 끈을 스스로 끊은 것이다. 그런 생각에 다비는 잠시 숙연해졌다. 다비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밝은 표정으로 두용에게 말했다.

“참, 저 다시 일해요. 바둑방송에 진행자 말이어요.”

“그래? 잘됐군.”

“저 이제 씩씩하게 살 거여요. 아저씨 출감을 기다리면서요. 그러니까 아저씨도 출감할때까지 식사 잘 챙겨 드시고 건강해야 해요. 저를 위해서라도요. 아셨죠?”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두용은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저씨, 손.”

다비가 유리벽에 손바닥을 대었다. 두용도 다비가 댄 유리벽에 손바닥을 대었다. 두 사람의 손바닥이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두 사람은 느꼈다. 유리벽이 아니라 강철벽이라도 두 사람의 감정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사랑이었다.



면회가 끝난 두용은 교도관의 인도로 수감실로 가는 긴 회랑을 걸었다. 두용은 다비의 말을 생각했다.

-우리 결혼해요.

그 말은 사실 두용이 다비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기다려줘. 출감하면 우리 결혼해.

그러나 어떻게 그 말을 다비한테 할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는 너무 뻔뻔했다. 그런데 다비가 먼저 말을 했다. 그래. 7년, 아니 6년9개월. 2442일 후면 출감한다. 그리고 다비와 결혼한다. 두용은 어린아이처럼 기뻤다.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이 세상이 모두 자신의 것 같았다. 두용은 자신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때!

두용의 심장이 이상했다. 심장은 자신의 의지와 달리 뛰었다. 두용은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눈알이 쏟아질 것 같았다. 두용의 눈앞에 다비가 보였다.
쏟아지는 빛 속에 다비는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두용이 태어나 지금까지 본 모든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두용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다비가 활짝 웃는 얼굴로 두용을 불렀다. 두용이 대답하려는 순간 다비는 마치 유리처럼 산산이 부숴져 버렸다. 두용은 처절하게 절규했다.

"다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두용에게 모든 빛이 사라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