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는 안절부절이었다. 소파에 앉았다 응접실을 서성이다 식탁에 앉았다 도무지 어디 엉덩이를 붙이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니. 응?”

지켜보다 못한 다비의 어머니가 걱정스레 묻는다.

“아무 일도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냐.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말을 해봐.”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다비의 말에 짜증이 섞였다.
어머니는 더 묻지 않았다. 다비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어머니다. 스스로 말하지 않으면 절대 말하지 않는 딸이다.

다비의 머리 속에는 오직 아저씨 생각이었다. 자신이 봉변을 당한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아저씨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했다. 구급대가 오고 아저씨의 입에 인공호흡기가 씌워졌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병원을 쫓아갈까 하다 그 무식하기 그지없는 여자를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전화도 문자도 할 수 없는 처지다.

다비는 시계를 보았다. 11시가 넘고 있었다. 다비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오로에 들어간다. 역시 하트는 없다. 12시가 지나도 하트는 들어오지 않았다. 1시가 지나도… 다비는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샌다.

두용은 10시가 넘어서야 잠에서 깼다. 그저께도 한숨 자지도 못했는데 어제 아내는 12시가 넘어서까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두용에게는 고문이었다.

물을 한잔 마시자 정신이 맑아진다. 두용의 머리에 문득 다비가 떠올랐다. 어떻게 됐는지 전화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핸드폰이 없다. 어제 쓰러질 때 백화점에서 흘린 건가.

두용은 황급히 창고로 내려갔다. 창고에서는 아내가 김군에게 뭔가 수작을 걸고 있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여보. 내 핸드폰 어디 있어.”

“핸드폰은 왜?”

“왜긴 뭐가 왜야. 전화하려고 그러지.”

“할 데 있으면 집전화로 해. 당신 핸드폰은 내가 압수 중이니까..”

“뭐야!”

“당신 제법이야. 그년 전번을 아주 꽁꽁 숨겨뒀던데. 핸드폰을 아무리 뒤져도 여자 이름이 없더라고.. 아마 남자 이름으로 저장 해뒀겠지. 그래서 찾는 것도 귀찮고 해서 내가 가지고 있어. 기다리면 그년한테 전화가 오겠지. 안그래?”

아내는 가끔 내 핸드폰을 훔쳐본다. 전화번호 등록과 통화기록, 문자 등. 여자 전화번호가 발견된 날에는 난리가 난다. 물론 여자가 사장인 거래처는 아내가 관리한다. 다비의 전번은 문지훈으로 저장해뒀다. 통화기록도 문자도 전부 지웠다.

“어제는 당신이 쓰러져서 그냥 넘어갔지만 난 아직 그년한테 볼일이 끝난 게 아냐. 아무래도 한번쯤 더 만나봐야 할 것 같아. 그러러면 통화를 해야 하지 않겠어?”

다비한테 전화가 오면 아내가 어떻게 할지 보지 않아도 뻔하다. 온갖 감언이설로 다비를 꾀어낼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가슴이 답답하다.

“당신 표정을 보니까 당장 그년한테 전화해서 핸드폰으로 전화하지 말라고 하고 싶은 것 같은데 그년 전번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네. 숫자에 약한 당신 머리로..”

나한테 숫자는 독약이다. 항상 계산을 잘못해서 손해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핸드폰 용도 중에 계산기 기능은 나한테 현대문명의 축복이었다. 내가 핸드폰 번호를 기억한다는 것은 원숭이가 구구셈을 외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내 머리 속에 기억된 전화 번호는 단 하나도 없다.

아내는 때려 죽인다고 해도 핸드폰을 내놓을 여자가 아니다.
두용의 마음은 급했다. 다비가 전화를 하기 전에 어떻게든 연락이 되어야 한다.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두용은 황급히 오로에 접속한다. 다비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쓰러진 걸 봤으니 나한테 큰 병이 생긴 줄 알 것이다. 내가 오로에 들어올 리 없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다비도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 들어온다고 해도 저녁 11시 넘어서다. 그때는 이미 늦는다.

이제 남은 건 한가지뿐이다. 다비의 전화번호를 기억해내는 것.
두용은 절망감에 허공을 바라보았다.

[다비의상황]
그 시간 다비는 다급하게 어딘가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 한참동안 신호음이 울리고 여자가 받는다.

“감사합니다. 서울대병원 안내 이은영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뭐..좀 물어볼까 하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어제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 상태를 알고 싶은데요.”

“환자 성함이 뭐지요?”

여자의 말에 다비는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 이름을 모른다. 다비가 묻지도 않았고 묻지 않으니 당연히 아저씨도 말해주지 않았다. 아는 건 오로 대명 하트다. 병원에서 그게 무슨 소용인가.

“이름은 모르고..어제 신세계 백화점에서 실려간 환자여요. 낮 2시 반쯤에..”

“잠깐 확인해 볼게요.”

전화 속 여자는 뭔가 확인하는 듯 뜸을 들였다. 그 잠깐의 시간이 다비한테는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아. 확인됐네요. 전두용 환자님 말이죠.”

- 이름이 전두용이구나.

“네. 어떻게 됐나요? 회복됐나요?”

“어제 응급실에 들어오셔서 2시간 만에 퇴원하셨습니다.”

“그 분 왜 그러신 거여요? 무슨 병이라도..”

“그건 개인정보 비밀사항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른 궁금한 점 있으신가요?”

“아니요. 감사합니다.”

다비는 전화를 끊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저씨는 무사하다.

밤을 꼬박 샌 다비는 아침에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119에 전화를 하면 아저씨가 어느 병원으로 갔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비의 생각대로 119에서 아저씨가 실려간 병원을 알려준 것이다.

이제 다른 궁금증이 다비의 머리를 채운다. 어제 2시간 만에 퇴원을 했다면 왜 저녁에 오로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지금까지 전화 한통 없을까. 다비는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두용의상황]
9.
두용이 머리를 쥐어짜서 생각해낸 숫자다. 다비의 전번은 010- 그리고 그 다음숫자는 자신의 전번하고 앞자리가 같았다. 전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숫자 하나를 기억해 낸 것이다. 두용은 뛸 듯이 기뻤다.

그래, 불가능은 없다.
두용은 다시 머리를 쥐어짠다. 다비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다시 기억을 해본다.

두용이 다비한테 전번을 찍으라고 자신의 핸드폰을 내줬고 다비는 전번을 찍어 돌려줬다. 두용은 다비의 전번을 확인하고 문지훈이라는 이름으로 등록을 한다. 그리고 다비의 전번을 본 것은 처음 오로에 들어오라고 했을 때.. 두번째는 세번째 대국 때 다비가 불계패 당했을 때, 세번째는 다비한테 만나자고 문자가 왔을 때. 그 장면 하나하나를 현재 상황처럼 상기하고 또 상기시킨다.

[아내의상황]
아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두용의 핸드폰에 문자 하나가 뜬 것이다.

“그래, 올 줄 알았어.”

아내는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그리고 문자를 확인한다.

- 최고의 조건 1000만원을 한달 33만원으로 무담보 융자 가능합니다. 전화주세요.

“이런 육실할..”

문자를 본 아내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폴더를 닫은 아내는 마치 앞에 있는 사람한테 말을 하듯이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봐야 오래 못갈 거야. 3시 안에 그년이 문자를 안하면 내 성을 갈지.”

[다비의 상황]
다비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왜 아저씨는 전화를 할 수 없는 걸까. 어제 그 우악스런 여자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여자가 아저씨 옆에 붙어서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자 하나 할 틈도 없는 걸까. 다비의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두용의 상황]
두용은 믿을 수가 없었다. 1시간 만에 다비의 전번 숫자 4개를 더 기억해낸다.

010-9732-5

모세가 바다를 가른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듣고 결코 기적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전번은 기억해낼 것이다. 문제는 전번을 기억해내기 전에 다비가 전화를 걸지 않기를 기도한다.

[다비의 상황]
시계는 3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다비는 핸드폰에 문자를 썼다. 문자를 다 쓴 다비는 확인을 누른다. 수신자는 아저씨다.

[두용의 상황]
두용은 다시 두개의 숫자를 기억해낸다. 이제 남은 건 하나.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아내의상황]
아내는 짜증이 날 대로 나있었다. 연신 두용의 핸드폰이 울어댔다. 하지만 기다리는 ‘년’ 한테는 안오고 거래처니 친구니 인터넷에 가입하라느니 대출을 받으라는 전화나 문자뿐이었다.
또다시 핸드폰이 울어댄다. 문자다. 아내가 폴더를 열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