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방을 나온 두용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내가 온갖 음식을 만들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어서 씻고 와. 아침 먹자.”

식탁은 두용을 위한 상으로 가득했다. 파프리카와 샐러드, 양파, 당근 등 녹황색 야채를 가볍게 드레싱한 야채샐러드와 케일과 적근대, 치커리, 쌈채 등 각종 쌈야채와 견과류로 만든 쌈장, 된장찌개에 현미밥. 모두 병원에서 지정해준 식단이었다. 이런 식단으로 아내가 상을 차린 건 처음이다.

“웬일이야. 당신.”
“웬일은 무슨 웬일. 병원에서 짜준 식단대로 차린 건데...”

아내는 살짝 눈웃음을 치며 눈을 흘겼다. 세상에 어떤 남자라도 녹일 듯한 눈웃음이다.

“당신한테는 지금 건강이야 건강.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그저 건강만 생각해. 당신이 만약 잘못되면 난 어떡해.”

아내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악어의 눈물.
그래도 그런 눈물에 조금은 감동한 듯한 연기가 필요하다.

“역시 당신뿐이야. 고마워.”
“고맙기는...”

아내는 다시 눈웃음을 치며 눈을 흘긴다.

아내는 밥을 먹는 두용을 보고 있자니 분통이 터질 지경이다. 그동안 나름대로 궁합이 잘맞은 박사장과 헤어진 게 못내 아쉬웠다. 더군다나 이런 아양까지 떨어야 한다니... 그러나 어쩌겠는가. 박사장하고 관계를 찍은 동영상까지 가지고 있으니 일단은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다. 어쨌든 두용의 행동으로 봐서 박사장 건은 여기서 일단락된 것 같아 그나마 안심이다.

밥을 다 먹은 두용은 쇼퍼에 깊숙하게 몸을 묻고 생각에 잠겼다.
며칠전 왕자갈비 박사장한테 저지른 테러. 그것은 평소의 두용으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못할 만큼 냉정하고 치밀했으며 파괴적이었다.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 박사장을 집으로 끌어들이는 과정, 그리고 박사장과 1대1로 맞섰을 때 전혀 두려움 없는 행동.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손가락을 부러트릴 때 두용은 냉혹, 그 자체였다.

두용은 생각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고...
문지훈의 기억이다.
이제 문지훈의 기억은 내 생활까지 거침없이 침범해온 것이다.

여자는 쇼퍼에 앉아 망연히 아파트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는 쏟아지는 햇살에 일렁이는 호수가 보였다. 호수 위에는 집같이 생긴 수상좌대들이 점점이 떠 있었다. 지금은 호수라고 부르지만 전에는 저수지였다. 여자의 시선은 어디에 머무는지 도저히 짐작이 되지 않았다. 호수를 본다기보다도 그저 세상을 등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20대로 보이는 여자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이것 좀 먹어라.”

여자가 돌아보자 50살쯤 돼 보이는 여자가 스파게티와 마늘빵을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생각없어.”
“이것아. 그렇게 안먹고 어떡하려고 그래.”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니 얼굴을 한번 봐. 그게 살아있는 사람 얼굴이니?”
“...”
“다비야. 우리 제발 살자. 이러다 너 죽고 나 죽는다. 벌써 3개월이 지났어.”
“3개월뿐이야. 엄마.”
“그래, 3개월뿐이라고 하자. 어쨌든 조금은 잊혀져야 하잖아. 3개월이면..”
“엄마..나는 말이야..”

여자가 처연하게 고개를 떨구자 긴 머리카락이 창백한 얼굴을 가렸다.
여자는 잠시 말을 끊다 이었다.

“아직도 그 소리가 귀에 쟁쟁해. 빗소리와 바퀴 마찰음..그리고 유리창이 박살나는 소리. 그리고..”

여자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지훈이가 유리창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모습. 그게 지금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이야. 그런데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지금 내 눈앞에서 그 모습이 보이는데..”

눈물이 여자의 턱을 따라 테이블로 떨어졌다.

“다비야.”

엄마는 여자를 끌어안으며 통곡을 했다.
앞으로 자신의 딸이 어떻게 될지 그 걱정이 엄마의 가슴을 가득 메웠다.

박사장 사건 이후 두용은 바둑을 멀리했다. 바둑TV도 보지 않았다. 바둑을 가까이 할수록 문지훈의 기억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두용은 자신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면서도 바둑에 가까이 가고 싶어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깜짝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계속 바둑TV를 켰다 껐다를 했다. 켜는 것은 문지훈이고 끄는 것은 두용이다. 인터넷을 보다가도 바둑이란 단어만 나오면 눈길이 갔다.

그러다 두용은 우연히 인터넷으로도 바둑을 둘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로 사이트였다.

사이트에 들어간 두용은 그 신기함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많은 대국실과 시간과 관계없이 바둑을 둘 수 있다는 사실.
그 신기한 감동이 드디어 두용을 바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다.

두용은 닥치는 대로 바둑을 두었다. 50판을 둘 때까지 단 한판도 이기지 못하는 두용이었다. 50판을 넘게 두자 비로소 두용에게 포석이란 게 보였다. 70판을 넘어서 두용은 비로소 첫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두용은 그때서야 의사의 경고가 생각났다. 바둑을 두되 하루에 50판씩만 두기로 규칙을 정한다. 심장에 무리를 주지 않을 정도이다. 500판을 넘을 즈음 두용은 바둑의 행마를 알게 된다.

그리고 1000판을 넘을 때 전투의 요령을 터득했다. 1000판이 넘어서자 문지훈의 기억이 비로소 도움이 되었다. 그 이후로는 그야말로 일취월장. 날고 긴다는 고수들이 두용의 칼날 아래 쓰러져 나갔다. 정확히 1627판째 두용은 왕별이 된다. 바둑을 정식으로 두기 시작한 이후 40일 만이다.

대국만 하던 두용은 이젠 바둑 기사(소식)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바둑계에는 이것저것 흥미 있는 일들이 많았다. 한달 전만해도 연구생이니 LG배 같은 게 뭔지 알지도 못했던 두용이다. 두용은 문득 문지훈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문지훈에 대한 기사는 기자가 말한 그대로였다. 이창호를 잇는 천재기사라고 기사마다 온통 칭송이 가득했다. 기사를 보던 두용의 눈이 한곳에 머물렀다.

문지훈9단 장지는 광주공원묘지로..

나이가 어려서 화장을 한 줄 알았더니 분묘를 했나.

두용은 황급히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와 승용차에 올라탔다. 광주로 차를 몰았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꼭 한번 가봐야 할 것 같았다.

광주공원묘지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40분을 달리자 이정표가 보였다.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을 해서 500미터쯤 달리자 공원묘지 주차장이 보였다.

공원묘지는 큰 도로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경사진 언덕에 가지런하게 묘지가 자리잡고 있었고 5개의 묘지마다 가운데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오르면 양 옆으로 5개의 묘지가 도열해 있는 구조다. 평일인데도 몇몇 사람들이 묘지를 찾아 헌화를 하고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공원사무실에서 문지훈의 묘지를 확인한 두용은 계단을 올랐다.

“이쯤인데..”

두용은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저만치 묘지 앞에 한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마치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서있기라도 한 듯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 여자 있는 곳이 문지훈 묘지인 것 같은데..”

두용은 여자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때 심장이 두근거렸다.
두근..
두용이 여자 쪽으로 발길을 옮길수록 심장은 더욱 두근거렸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여자가 10미터쯤 거리에 들어 왔을 때 비로소 알았다. 여자가 누구인지..
그때 여자가 고개를 두용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윤다비.

쿵쿵쿵쿵쿵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여자의 긴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두용은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조화(弔花)를 떨어트렸다.
국화가 떨어지면서 하얀색 잎이 바람에 흩어졌다.

“누구세요.”

다비가 물었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두용은 대답대신 손으로 가슴을 쓰다듬었다.

- 진정해 문지훈 -

쿵 쿵 쿵 쿵 쿵 쿵..

“누구신지..”
“문지훈 9단의 팬입니다.”
“아네..”
“실례지만 바둑TV 진행자 윤다비 씨 아니신지..”
“네.”

다비의 대답은 들릴락말락 낮았다.

“요즘은 진행을 안하시던데..”
“...”

다비는 대답이 없었다. 공연한 질문을 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투두둑..
그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우왕좌왕이었다.
두용은 황급히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다비에게 씌워줬다.

“이거라도..”
“아니어요.”
“이러나 저러나 옷 젖는 건 같아요. 그냥 뒤집어 쓰세요.”

다비는 잠시 두용을 보다가 조금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어서 가요. 비 다 맞겠어요.”

점퍼를 뒤집어 쓴 여자나 그렇지 않은 남자나 젖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공원 식당에서 마주 앉았다. 설렁탕을 앞에 두고 있었지만 두 사람 다 설렁탕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전 문지훈 9단 때문에 바둑을 두게 된 사람입니다.”
“어떻게..”

사실 이 자리가 귀찮은 다비다. 비만 그치면 갈 생각이다. 말없이 그냥 있기도 뭐해서 건성으로 대답만 할 뿐이었다. 두용의 말은 지훈이 팬이 그저 통상적으로 하는 얘기로 들렸다.

“저한테 바둑을 가르쳐 줬죠.”

두용의 말에 다비는 번뜩 고개를 들었다. 지훈이 누구한테 바둑을 가르쳐 줬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지훈이..아니 문9단한테 바둑을 배웠다고요?”
“네.”
“그럴 리가 없어요. 문9단은 누구한테 바둑을 사사한 적이 없어요.”
“그건 맞습니다만..”
“그런데요.”
“지금은 말로 설명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비는 울컥 짜증이 났다. 나이깨나 먹은 사람이 웬 헛소리인지..
창밖을 보자 여전히 빗줄기는 굵었다.
창밖을 보고 있는 다비한테 남자의 말이 들렸다.

“그 목걸이 아직도 하고 있군요.”

다비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 두용을 보았다.

“3년전 농심배 2라운드 때 상하이에서 문9단이 사온 거죠.”

다비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저씨가 그걸 어떻게..”
“다비 씨 앞에 놓여져 있는 그 지갑.”

다비의 앞에는 샤넬 로고가 각인된 빨간색의 길쭉한 지갑이 놓여져 있었다.

“그건 작년 춘란배 대회 때 중국에서 사온 것이고요.. 지갑 안에는 아직도 부적이 들어 있겠죠? 후지쯔배 때 일본 하라주쿠에서 사온 사랑의 부적, 그 부적을 가지고 있으면 사랑이 이뤄진다죠.”
“아저씨 누구여요!”

다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두용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서야 좀 살아있는 사람 같군요. 좀전까지만해도 핏기 하나 없는 것이 이미 삼도천을 건넌 사람 같았는데..”
“엉뚱한 소리하지 말고 말해요. 아저씨, 정체가 뭐여요.”
“나도 나를 알기까지 4개월이 걸렸어요. 다비 씨한테도 적어도 그 정도 시간이 필요할 거요.”

다비는 눈앞에 앉아서 도무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주절대는 남자를 뚫어지게 쏘아봤다. 그때 두용이 다비 앞에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아마 앞으로 자주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비 씨 전번을 찍으시죠.”

다비는 핸드폰과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작업을 거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 같지 않았다. 더군다나 목걸이부터 지갑, 부적까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남자. 지훈이 죽고 난 후 마치 죽음 같은 시간을 보낸 다비에게 갑자기 나타난 이 알 수 없는 남자가 돌을 던진다. 그 돌은 다비에게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다비는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남자를 노려보았다.
두용은 그런 다비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6편에 계속)

본 내용은 작가의 순수 창작물이므로 무단복제나 도용, 표절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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