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와 약속한 일요일이다. 1시까지 약속이니까 늘어지게 자도 상관이 없다. 그런데 아침 식전부터 마마가 호들갑을 떨면서 흔들어 깨운다.

“아침부터 왜 그래. 엄마. 잠 좀 자자.”

“지금 잠이 문제가 아냐. 빨랑 일어나.”

“뭐가 문젠데..”

“선보러 가야 하니까 빨리 일어나 준비해.”

“선?”

벌떡 일어나는 빳떼리다.

“선이라니. 느닷없이 웬 선이야.”

“청담동 이모한테 전화왔다. 11시까지 시간 잡아놨다고.”

“엄마. 나 선 안본다니까.”

“안보면 어쩔건데. 니 주변머리에 제대로 된 여자 하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제대로 된 여자가 뭔데?”

“오늘 선보는 여자가 제대로 된 여자야. 유명한 법조집안 딸이야. 아버지부터 오빠, 삼촌..전부 판검사야. 이건 절대 놓치면 안돼. 꽉 잡아야한다구.”

마마의 말에 한숨이 나온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래. 볼게. 봐. 하지만 오늘은 아냐. 약속 있어.”

“약속은 무슨 놈의 얼어 죽을 약속이야. 취소해. 죽은 네 할아버지하고 약속이라도 안돼.”

벼락 같이 소리치는 마마다.

“도대체 이런 경우가 어딨냐고. 무슨 벼락치기도 아니고 몇 시간 전에 연락해서 선을 보자니..”

“저쪽 여자가 미국유학생이야. 유학생. 이번에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잠깐 들어온 걸 네 이모가 사정사정해서 잡은 거라고.”

“개나 소나 다 가는 유학간 게 뭐 대수야.”

“개나 소나 다 가는 유학 너는 왜 안갔어. 미국에 고모, 작은아버지 있어서 생활걱정 없겠다. 집에서 용돈도 두둑이 주겠다는데 뭐가 아쉬워서 안갔어. 개나 소보다 못해서 안간 거야?”

내가 유학 안간 게 한이 맺힌 마마다. 마마는 내가 대학교 졸업하자 마자 유학을 입에 달고 살았다. 요즘 세상에 유학 한번 안갔다오면 사람 구실도 못한다는 것이다. 차를 사준다, 상계동 상가를 내 앞으로 명의이전 해준다,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 놓았지만 나는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다가 참이슬에 입사했다. 분통이 터진 마마는 화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까지 했었다.

어쨌든 지금 같은 상황에서 도토리를 만나러 가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선을 보러가지 않으면 하루종일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퍼부어댈 것이다.

“알았어. 어디야.”

“역삼동 리츠칼튼호텔 커피숍.”

우라지게 먼데다 잡았네. 어쨌든 11시에 대충 보고 서둘러오면 1시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11시까지니까 빨리 서둘러. 청담동 들려서 이모 모시고 가야하니까.”

“이모도 모시고가?”

“그럼 선보는데 니 혼자 갈래.”

“알았어.”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씻으러 나가는데 옷장을 뒤지는 마마의 말이 계속된다.

“양복은 뭐 입을 거야.”

“아무거나.”

“선보러 가는데 아무거나가 어딨어. 이거 입어. 작년에 외삼촌이 해준 거. 이게 색깔도 좋고 스타일도 좋네.”

“알았어.”

“차는 아빠 벤츠 가지고 가고.”

누가 자매 아니랄까봐 이모도 마마하고 똑같다. 아직 시간이 충분한데도 빨리 운전하라고 성화다. 리츠칼튼에 도착하자 10분 전이다. 속절없이 커피숍에서 10분을 죽인다. 정각이 되도 여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10분이 지난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이모는 당연하다는 표정이다. 좋은 보석을 얻기 위해서는 이 정도는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10분이 지나자 부글부글 끓는 속에 1시까지 도토리한테 가야한다는 초조감까지 겹쳤다. 더이상 앉아있을 수 없는 내가 벌떡 일어나자 이모가 화들짝 놀라서 소리친다.

“너 어디가.”

“그냥 가요.”

“너 미쳤어.”

“벌써 20분이 지났어요. 이런 여자하고 무슨 선이어요.”

“여자는 다 그래. 조금만 참아.”

“싫어요. 이모 안가시면 저 혼자 갑니다.”

“두식아.”

이모가 부르는 소리를 뒤로하고 걸어가는데 앞에 한 여자가 걸어온다. 빨간색 짧은 자켓에 역시 빨간색 초미니 스커트. 하얀색 핸드백. 한눈에 봐도 세련되기 그지없는 여자였다. 여자는 빳데리와 잠깐 눈을 마주치더니 이모에게 인사를 한다.

“청담동 수미어머니시죠? 유리아입니다.”

“아..유검사님 동생?”

“네. 제가 좀 늦었지요. 죄송해요.”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요. 앉아요.”

여자가 앉자 이모는 빳떼리한테 교양 있게 말한다.

“화장실 간다고 그러지 않았니? 어서 다녀와.”

“됐습니다.”

다시 자리에 앉는 빳데리다.

이모는 여자에게 한참을 수다를 떨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모 때문에 다시 20분을 까먹는다. 이제 도토리와 약속은 겨우 1시간 20분뿐이 남지 않았다.

이모가 가자 여자는 질문을 퍼붓는다. 아버지 사업부터, 어머니의 사회적 활동영역. 집안 친지들의 상황. 내 얘기에 들어와서는 질문이 더욱 끝없이 이어진다. 태어날 때부터 대학교, 친구, 현재 직업, 취미사항..

선을 보러온 것이 아니라 취직면접을 보러온 것 같다. 아니, 취직면접 때보다 더 많은 질문을 받는다. 빳떼리가 여자의 말을 끊는다.

“제가 아가씨한테 할해할 수 있는 시간은 여기까지입니다. 1시간을 예상했는데 아가씨가 늦는 바람에 20분을 까먹었죠. 부득불 아가씨의 질문은 여기까지 들어야할 것 같습니다. 이건 아가씨를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만 혹시 다음에 다른 사람과 선을 볼 기회가 있다면 이렇게 서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차라리 메일로 서류전형을 보는 것이 좋겠군요. 그럼 이만..”

빳떼리가 일어나자 여자는 황망한 표정이다.

이제 1시간 만에 분당까지 가야한다. 길은 여러가지다. 고속도로. 일요일이라 막힐 수도 있다. 판교수지간도로. 구길이라 신호등이 있어서 변수가 있다. 빳떼리는 최근에 뚫린 용인강남고속도로를 선택한다. 헌릉까지 가는 길이 좀 복잡하지만 고속도로로 올라타면 서분당까지 15분이면 도착한다.

예상대로다. 고속도로로 올라타자 탁 트인 도로에 벤츠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더군다나 무인속도 카메라도 비교적 적은 편이다. 이런 상태라면 1시 이전에도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도로는 믿을 게 못된다. 서판교IC를 지나자마자 도로는 차들로 꽉 막혀있었다. 서행이 아니라 아예 서있다. 스마트폰으로 잽싸게 도로상황을 확인한다. 서판교IC 하행 1.5Km 지점에서 4중추돌사고, 사고지점에서 800미터까지 차량 정체. 분당을 눈앞에 두고 날벼락이다. 시계를 보자 20분 남았다. 죽었다 깨나도 20분 안에는 못간다. 도토리한테 전화를 건다.

“난데..집안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좀 늦을 것 같아.”

“많이 늦으면 그냥 갈게.”

“아냐. 아냐. 한 30분 정도..”

“알았어.”

30분은 벌었다. ㅡ.ㅡ;;

사고수습은 생각보다 더뎠다. 차들은 여전히 정체다.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초조함에 시원한 에어컨에도 몸은 땀으로 젖었다. 1시40분이 지나서야 차들이 서서히 움직였다. 이미 벌어놓은 30분마저도 까먹은 상태다. 다시 전화를 할까 하다가 그만둔다. 이제 차가 빠지니 금방 갈 것이다. 공연히 전화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없다. 서분당IC로 빠지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오늘따라 도로가 온통 차로 막혀있다. 바로 엎드리면 코닿을 거리가 30분이 걸린다.

불법주차를 하는 순간 득달같이 견인차량이 끌고가는 커피숍 앞 도로에 겁도 없이-지금 그런걸 생각할 겨를도 없지만-주차를 하고 허겁지겁 커피숍으로 뛰어들어간다. 1시간30분이 늦었다.

이미 가버린 줄 알았던 도토리가 창가에 다소곳이 앉아있다.

“미안해.”

자리에 앉자마자 헐떡이는 목소리로 말하는 빳떼리다.

“괜찮아.”

“영화는..”

“그건 상관없는데 차 저기다 세우면 안되잖아.”

“상관없어. 신경 쓰지마.”

“집안에 무슨 일이야? 근사한 양복까지 입고..”

“그..그냥.”

도토리는 잠시 빳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선봤어?”

“선!”

선이란 말에 화들짝 놀란 빳떼리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왜 그렇게 놀래?”

“아..아니 그게 아니고..”

“괜찮아. 볼 나이도 됐지.”

“아니라니까..이모가 억지로..”

“그나저나 저것봐. 자기 차 끌고 간다. 괜찮아?”

“차?”

화들짝 놀란 빳떼리가 창밖을 보자 견인차가 벤츠를 견인하고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면서 저만치 가고 있다.

“으악! 안돼!”

벌떡 일어나 달려가려던 빳떼리가 도토리를 돌아본다. 같이 가자는 말도 기다리라는 말도 못하는 입장이다.

그런 맘을 아는지 도토리가 빙긋 웃으며 말한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가봐.”

빳떼리는 울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선본 걸 알고도 도토리는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전혀 변한 것 없는 도토리에게서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색함을 느낀다. 사실 자격지심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또다른 보이지 않는 벽 하나가 생긴 것 같다.

이젠 제법 아침저녁으로 선선하다. 그 뜨거웠던 여름은 언제 간다는 말도 없이 가고 가을이 성큼 찾아온다. 곧 추석이라고 분주하다. 사실 맘만 분주하지 별로 할일도 없다. 예전엔 추석이 큰 성수기인데 요즘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치기도 뭐해서 그저 선물꾸러미 몇개 준비하고 행사한다. 이래저래 도토리와 만나는 것이 뜸해진다.

추석을 하루 앞두고 도토리를 생각하니 맘이 미어진다. 혼자 추석을 지내면 얼마나 외롭겠는가. 하긴 항상 그래왔으니 이력이 났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오늘 저녁에 위로주라도 한잔 할 겸 전화를 하는데 도무지 통화가 안된다. 사무실에 매장 점검한다는 핑계를 대고 마트마다 돌아다니며 처음처럼 매장을 기웃거려 보지만 역시 도토리는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D마트에오니 허대리가 있다. 처음처럼 매장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가 말을 걸어본다.

“손님 좀 있어?”

“있긴 개뿔이 있어.”

“하긴..요즘 명절에 과자 선물하는 사람이 있겠어.”

“이거 없어지든가 해야지 괜히 사람만 귀찮게..”

빳떼리는 매장을 휘둘러보면 지나가는 말로 말한다.

“그나저나 요즘 도대리가 안보이네.”

“지방갔어.”

“지방? 왜? 무슨일 있어?”

“아침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대. 우리도 조문을 가야하는데 추석이라..”

빳떼리의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이다.

전화 속에서 봉다리가 악을 쓰고 있었다.

“야, 새꺄, 너 미쳤어. 근무중에 어딜간다는 거야!!”

“급한 일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그리고 회사차를 가지고 가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너 당장 사무실로 들어와!”

“죄송합니다.”

봉다리가 뭐라고 더이상 말하기 전에 전화를 끊는다.

차가 고속도로로 올라탔다. 고속도로는 차로 미어터질 지경이다. 그러고 보니 추석 전이란 걸 깜빡했다. 마음은 급한데 차들의 움직임은 거북이다.

친척도 형제도 없는 도토리가 혼자 초상을 치를걸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렸다.

대낮에 출발한 차가 시커먼 밤이 되도 아직 고속도로 위다.
전화벨이 울린다. 이번엔 마마다. 회사에서 아무리 전화를 해도 내가 받지 않으니 집으로 전화를 한 모양이다. 받자마자 마마의 소프라노가 들려온다.

“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회사차를 가지고 어딜 가는 거야.”

“지방에 다녀올게.”

“지방엘 왜 가. 내일이 추석인데.”

“내일 집에 못들어가.”

“내일 추석인데 오늘도 아니고 내일도 못들어 온다고! 너 미쳤니? 미쳤어?”

“운전중이야. 끊을게.”

전화를 끊자마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어댄다. 전원을 끈다.

마마 말처럼 미쳤다. 미친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오직 한 여자만 보이고 한 여자만 생각하고 가슴 하나 가득 한 여자만 담겨져 있다는 건..

미친 거다. (1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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