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 다 허기가 질대로 진 터라 게눈 감추듯이 밥을 먹어치웠다. 설거지는 빳떼리 몫이다. 아니, 빳떼리가 자청하고 도토리의 등을 떠밀었다. 도토리는 빳떼리가 설거지하는 동안 발코니에서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를 보고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멀리 수평선에 오징어잡이 배들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도토리는 들뜰 대로 들떠 있었다.

이제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 때다. 이런 분위기에 와인 한잔이면 금상첨화요 화룡정점이다. 집에서 준비해온 와인에 안주로는 치즈를 준비한다. 와인은 샤토 마고 1996년산. 파파가 그야말로 애지중지하는 와인이다. 시가로도 기백만 원이라고 한다. 아마 내가 가져간 걸 알면 다리 몽댕이 하나는 부러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게 문제인가?

와인과 치즈를 발코니 옆 테이블에 놓고 소파에 도토리와 나란히 앉는다.

“웬 와인이야?”

“오늘 같은 날 한잔 안할 수 없잖아.”

“하긴 그래.”

역시 술은 마다하지 않는다. ^^

역시 집에서 준비해간 여자의 엉덩이처럼 풍만해 보이는 와인잔에 붉디붉은 와인을 따른다.

“건배.”

조신하게 잔을 부딪친다. 역시 소주와는 품격이 다르다. 마시는 것도 원샷이 아니다. 음미하듯이 조금씩..

“이건 고르곤졸라 치즈네. 비싼 건데.”

“그 정도는 되야 격이 맞지.”

도토리는 마치 음미라도 하듯이 치즈 한 조각을 입에 넣는다. 치즈가 입속으로 들어가자 달콤하면서도 치즈 특유의 신선한 향이 입안에 가득 퍼지며 눈 녹듯이 녹는다.

“최고야.”

도토리는 감탄을 한다.

다시 건배. 나머지 와인을 입안에 흘려넣는다.

창밖에는 파도소리.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 저 멀리 오징어 잡이 배들의 불의 향연. 더할 수 없는 분위기다. 분위기는 술맛을 더 북돋았다. 그만큼 마시는 속도도 빨라진다. 와인은 취하는지 모르게 취하게 만드는 술이다. 와인 3잔이 들어가자 도토리는 참새처럼 재잘거렸다. 술기운이 올라왔다는 증거다.

“궁금한 게 있어.”

“뭐가?”

도토리가 돌아보았다. 약간 취기가 있는 사랑이 가득 담겨진 눈빛이다.

“지난번 공원에서 말이야. 키스하고 나서 왜 눈물이 글썽였어.”

“그냥.”

“그냥이 어딨어.”

“말로 설명 못해.”

“그럼 뭘로 설명할 수 있는데.”

“말로 못하는 걸 뭘로 설명해.”

“재현하면 되지.”

“재현?”

“키스로..”

말과 동시에 빳떼리의 입술이 도토리의 입술을 덮친다.

도토리는 빳떼리를 떼어내려 몸부림쳤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남자의 완력을 당해낼 도리가 있는가. 더군다나 거부하는 몸짓과 달리 이미 봉인은 열려있었다. 도토리의 열린 입안으로 한 덩어리 살점이 미끄러지듯 들어간다. 잠깐 움츠렸던 도토리의 살점이 빳떼리의 살점을 맞이한다. 두 개의 살점은 서로를 열심히 탐색하고 탐닉했다. 이번엔 도토리의 살점이 빳떼리 입안으로 답방한다.

그 순간 빳떼리의 손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비치웨어 속으로 들어간 손이 브래지어를 밀어올리고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움켜쥐었다. 한줌 가득 들어오는 크기. 적당히 말랑하고 적당히 탱탱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감촉. 봉긋 솟아난 유두가 손가락에 잡힌다.

빳떼리의 입술은 길고 긴 키스를 끝내고 목덜미를 지나 가슴으로 내려온다. 봉긋 솟은 유두가 빳떼리의 입술을 반긴다.

젖무덤을 입안 가득 넣자 낮은 교성 소리가 들린다. 교성소리와 파도소리가 묘한 하모니를 만든다. 손은 밑으로 밑으로 하행한다. 대리석같이 매끄러운 피부다. 옹달샘 같은 옴파로스를 지나 비너스 라인에 도착한다. 마치 무단침입이라도 하는 듯 조심스럽게 팬티 속으로 손이 들어간다.

심장이 방망이질을 하듯이 미친 듯이 뛰었다. 피는 온통 머리로 쏠린 듯이 터질 것만 같았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순간 이 지구상에는 오직 도토리만 있는 것 같았다. 빳떼리의 입과 손이 바빠질수록 도토리의 교성소리는 커져갔다. 이젠 더이상 참을 수 없다.

팬티를 벗겨내려는데 도토리가 신음소리와 함께 잠꼬대처럼 말한다.

“안돼.”

당연하다. 여자라면 당연히 한번쯤 거부를 할 것이다. 도토리의 말을 무시하고 팬티를 벗기려는데 만만치가 않다. 엉덩이를 들어줘야 하는데 도무지 도울 생각이 없다. 맘만 급하다. 자연스럽게 벗기긴 틀렸다. 우악스럽게 양손으로 벗기려는데 도토리가 팬티를 잡는다.

“안돼. 이러지마.”

이미 때는 늦었다. 팬티가 찢겨지듯이 도토리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그와 동시에 도토리의 몸 위로 올라타는 빳떼리다. 도토리는 반항하며 소리쳤다.

“그만둬. 이러지마. 이러지 말란 말이야.”

빳떼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 손으로는 발버둥치는 도토리를 우악스럽게 누르고 한 손으로는 바지 벨트를 풀었다. 도토리의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하체를 밀착하려는 순간.

짜악..

날카로운 파찰음이 적막한 밤공기를 갈랐다.

파찰음을 경계로 극과 극의 상황이다. 뜨거운 정열로 가득했던 전(前)과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후(後)다.

따귀를 때린 상태 그대로인 도토리. 따귀를 맞고 고개가 돌아간 상태 그대로인 빳떼리. 증오의 표정인 도토리. 어이가 없는 표정인 빳떼리. 마치 그 상태 그대로 돌이라도 돼버린 듯이 두 사람은 움직임이 없었다.

먼저 움직인 건 도토리였다. 거칠게 빳떼리를 밀어붙이고 반쯤 벗겨진 비치웨어로 몸을 가린 채 뛰듯이 화장실로 들어간다.

쾅 화장실 문 닫히는 소리에 비로서 빳떼리는 제정신이 돌아온다. 방금전 상황이 마치 아득한 옛날같이 느껴진다. 바닥에 뒹구는 주인 잃은 팬티가 비로소 현재 벌어진 상황이란 걸 깨우쳐준다.

마치 포충망처럼 얇디 얇은 하얀색 팬티는 찢겨져 있었다. 그것이 빳떼리를 더욱 참담하게 만든다. 화장실에서는 기척도 없다. 사과라도 해보려다 생각을 접는다. 이런 상황에서 백 마디 천 마디 사과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도토리가 화장실에서 나오길 기다려본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빳떼리는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 걸음이다.

꿈이다. 꿈이란 걸 안다.

저만치 도토리가 도망가고 있었다. 그 도토리를 잡으려고 필사적이다. 그런데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제자리 걸음인 빳떼리는 도토리를 잡을 수 없었다. 마음이 안타까웠다. 저대로 영원히 도망갈 것 같았다. 그런데 도망가던 도토리가 문득 서서 빳떼리를 돌아보았다.

슬픔이 가득한 표정이다.

빳떼리는 지금까지 태어나서 그토록 슬픈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공원에서 키스하고 나서도 저런 표정이었다. 왜 그런 표정이냐고 아무리 물어도 도토리는 대답 없이 그런 표정 그대로였다.

도토리 앞에는 아주 큰 비행기가 있었다. 엄청나게 큰 비행기다. 도토리는 비행기에 올랐다. 도토리를 잡으려고 했지만 도무지 잡히지 않았다. 도토리가 비행기 안으로 사라지자 육중한 문이 닫히고 비행기는 굉음을 쏟아내며 빳떼리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순직간이었다. 도토리를 태운 비행기는 하늘 저만치 날아가고 있었다.

빳떼리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안돼!! 가지마! 내가 잘못했어!!”

그러나 그 소리는 목구멍에서만 맴돌 뿐 입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단지 손만 허공을 향해 허우적대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잠에서 깬다.

눈부시게 쏟아지는 아침햇살과 함께 경쾌한 말소리가 들린다.

“일어났어?”

도토리다. 떠나지 않았다. 기쁨에 왈칵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빨리 씻고 와. 콩나물국 끓였어.”

아침준비를 하는 도토리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명랑한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빳떼리에게는 이불까지 덮여져 있었다. 아마 어제 도토리가 덮어준 모양이다. 빳떼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도토리를 어떻게 볼까 밤새 고민하다 잠이든 빳떼리였다.

콘도 체크아웃 시간까지 바다에서 실컷 놀다가 분당으로 돌아오니 어둑해진다. 하루 사이에 도토리는 많이 변해 있었다. 태양에 적당히 그을린 피부는 선탠한 것처럼 건강해 보였고 훨씬 명랑해졌다. 돌아오는 동안도 뭐가 신나는지 내내 재잘거렸다.

“덕분에 즐거웠어.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도토리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잊어도 돼. 앞으로 더 재미있는 걸 준비할 테니까.”

“알았어. 기대해볼게.”

도토리는 활짝 웃었다. 건강한 웃음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빳떼리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빠진다.

어제 도토리는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자신의 몸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정조관념 때문일까? 아니다. 나이 27살이면 그런 관념에 충분히 자유로운 나이다. 더군다나 이미 남자를 사귄 경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극한 행동까지 보이는 건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고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도토리와 스킨십을 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 흔한 팔짱 한번 안 끼고 어깨를 감싸거나 허리를 끌어안는 것도 절대 불허하는 도토리다. 기껏해야 공원에서 단 한번의 키스. 그것도 도토리가 먼저 시도한 것이다. 도토리는 그렇게 철저하게 벽을 쌓았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물론 빳떼리는 그 해답을 풀지 못한다.
앞으로 다가올 비극을 전혀 예측할 수 없으므로..

휴가가 끝나고 며칠 뒤. 퇴근 후 별일도 없어서 집으로 직행해서 쉬고 있는데 봉다리한테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를 받자마자 마치 난리라도 난 것처럼 급하게 소리를 지른다.

“야. 빨리 오로에 들어와.”

“왜요?”

“왜긴 뭐가 왜야! 도토리 그놈이 대기실에 앉아있다구.”

“그게 뭐가 어쨌다고요.”

하마트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그렇지. 아직까지 난 도토리와 원수지간이지.

“그래요. 알았어요. 금방 들어갈게요.”

비밀을 가지고 연기한다는 건 정말이지 어색하고 어렵다.

오로에 들어가서 도토리한테 쪽지를 날린다.

-허과장님이 자기를 봤나 봐. 얼른 복수혈전을 벌이라는데..

-ㅋㅋㅋ

-한판 둬. 오랜만에

-그러지 뭐. 근데 그냥 두면 심심하잖아.

-내기 하자고? 뭐 내기할까.

-영화 보여주기.

-좋아.

대국이 이뤄진다. 돌을 가리자 내가 백이다.

10여 수 진행되자 대국실에 사람들이 떼거리로 들어온다. 영업3과 직원들이다. 이유는 뻔하다. 야유든 뭐든 방법을 총동원해서 도토리를 지게 하려는 수작이다. 이제는 체면이고 뭐고 없다. 그런데 우리 직원들 대명을 보면 가관이 아니다.

보스 대명은 ‘천사표바둑’이다. 쩝..천사는 무슨 놈의 얼어 죽을 천사인가. 바둑을 두면 상대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다. 거기다 행여 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욕설이 난무해진다. 그래서 매너하향을 밥먹듯이 한다.
봉다리는 ‘헤드록’이다. 그나마 제대로 지은 대명이다.
‘침묵의남자’ 전에도 말했듯이 구라다. 가증스런 대명이다.
막내의 대명을 보면 귀엽기 그지없다. ‘핑크탱크’ 핑크색 탱크란 뜻이다. 대명처럼 무지막지하게 전투를 즐긴다. 아니, 즐기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게 그거다. 영업3과 입사해서 주변의 압력으로 억지로 바둑을 배웠는데 배운 게 오직 전투뿐이다.
모난리자의 대명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앙팡테리블’ 무서운 아이란다. 거참..어디서 주워 들은 건 있어 가지고..그나마 바둑이 제일 차분하다.

바둑이 중반에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야유가 쏟아진다.

-흑흑흑 돌 날라가유. bb

-백반 ^^

-도토리가 뭔 바둑이야. 묵이나 무치지.

-빳떼리님 홧팅

그 와중에 구라는 카카오로 열심히 훈수를 한다. 훈수를 무시하자 전화벨이 울린다. 받으나 마나 고수가 가르쳐 준 대로 두라고 주절댈 것이다. 스마트폰을 끈다.

바둑은 제법 잘 짜여졌다. 그림 같은 포석에 서로 잽을 주고 받다 치열한 전투가 진행된다. 서로 잡아먹기 위해서가 아니고 실속을 챙기기 위한 전투다. 공격을 한 사람은 적당한 실리를 챙기고 도망간 사람도 짭짤한 이득이 있다. 서로 만족스런 결과다. 승부는 마무리에서 갈렸다. 빳떼리가 큰곳을 몇 군데 놓치는 바람에 10여 집을 손해 본다. 결국 도토리는 덤을 주고 3집반을 남긴다.

또다시 패배다. 그런데 그렇게 분하지도 화가 나지도 않는다. 바둑 한판 잘 둔 기분이다. 적의(敵意)가 없는 바둑은 이런 기분인 모양이다.

도토리한테 쪽지가 날아온다.

-일요일 1시까지 CGV앞 카페베네에서 만나.

-ㅇㅋ

(11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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