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큼 여름이 다가왔다. 일에 파묻혀 계절이 바뀌는 줄도 몰랐다. 단지 옷차림이 가벼워졌을 뿐이다. 그나마 가벼운 옷도 전부 벗어던지고 싶을 만큼 날은 더웠다. 모처럼 일요일에 여름옷 몇 벌 사려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아침부터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내린다. 이럴 땐 마마 차를 슬쩍 쌔비는 게 장땡이다.

차를 몰고 나오자 도로는 아수라장이다. 뭔놈의 차는 이렇게 많은지 8차선 도로가 주차장이다. 괜히 나왔다라는 생각에 차를 돌리려는 순간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도토리다. 그러고 보니 도토리의 오피스텔 앞이다.

도토리는 한손에 우산을 받쳐들고 택시를 잡으려고 동분서주였다. 이런 상황에 택시가 잡힐 리가 없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비바람에 온통 젖은 도토리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오늘따라 원피스를 입은 도토리다.

도토리는 자신의 앞에 멈춰서는 빨간색 폭스바겐 비틀을 보고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타.”

윈도우가 내려지고 빳떼리가 조수석으로 몸을 숙여 얼굴을 내민다. 뜻밖의 상황에 도토리는 당황스러웠다.

“뒤에서 빵빵거리잖아. 얼른 타.”

도토리가 마지못해 차에 올라탄다.

“웬일이야?”

“백화점 가다가 우연히 봤어.”

운전하던 빳떼리가 도토리를 힐끗 보며 말을 잇는다.

“어디 가는 거야? 치마까지 입고.”

빳떼리의 말에 도토리가 허벅지까지 말려 올라간 치맛자락을 잡아 내린다.

“선이라도 보러 가는 거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려줘.”

“고속버스터미널? 어디 가는데?”

“통영.”

“통영은 왜?”

“뭐가 그렇게 궁금해.”

도토리가 발끈 소리친다.

“비밀이면 말하지 말고.”

“비밀이랄 것도 없어. 엄마한테 가.”

“엄마가 통영에 살아?”

“요양원에..”

도토리가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버스터미널도 아수라장이었다. 버스는 뒤엉키고 사람들은 우왕좌왕이었다. 왜 사람들은 비만 오면 저렇게 갈팡질팡인지 모르겠다.

차에서 내리려고 도토리는 숄더백하고 우산을 주섬주섬 챙긴다.

“버스는 있겠어?”

“뭐 있겠지. 고마웠어.”

도토리가 내리려는데 차가 다시 출발한다.

“왜 그래. 차 세워.”

“그냥 가.”

“뭘 그냥 가. 내려줘.”

“통영까지 그냥 가자고.”

“자기가 통영까지 왜 가. 됐으니까 내려줘.”

“난 자기처럼 비정하지 못해서 아는 사람 빗속에 그냥 떨어트리지 못해.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 4시간이면 도착할 거야.”

도토리가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빳떼리의 전화벨이 울린다.

“야. 너 엄마 차 갖고 갔어?”

“응. 백화점에 옷 좀 사려고.”

“백화점 가는데 차는 왜 갖고 가. 빨리 가져와. 엄마 이따 차 써야 돼.”

“알았어.”

전화를 끊고 빳떼리는 혼자 궁시렁거렸다.

“그러게 나도 차 하나 사주면 좋잖아.”

힐끗 도토리를 보자 잔뜩 화가 난 듯 창밖을 보고 있다.

“음악 들을까?”

CD플레이를 누르자 애잔한 팝송이 흘러나온다. Jim croce의 Time in a bottle이다.

If I could save time in a bottle

The first thing that I'd like to do

Is to save everyday

Till eternity passes away

Just spend them with you

If I could make days last forever

If words could make wishes come true

I'd save everyday

like a treasure and then

Again I would spend them with you

그렇게 쏟아지던 비가 통영에 오니 더없이 맑은 하늘이다. 요양원은 남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있었다. 빳떼리는 파랗게 잔디가 깔린 정원 벤치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요양원 환자들은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환자들은 면회를 온 가족들과 얘기를 나누거나 요양원 직원들의 보호 속에 천천히 산책을 즐겼다. 빳떼리는 한눈에 봐도 환자들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있었다. 모두 치매환자들이었다.

한참이 지나자 도토리가 노인 한분을 휠체어에 태우고 나왔다. 빳떼리가 냉큼 달려가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빳떼리를 본 노인의 반응이 뜻밖이다.

“이게 누구냐. 진우 아니냐.”

“엄마. 아냐. 오빠는 죽었잖아.”

“죽긴 누가 죽어. 진우 맞아. 진우야.”

“엄마.”

도토리가 뭔가 말을 하려는데 빳떼리가 한쪽 무릎을 꿇어 노인과 눈높이을 맞춘다.

“맞습니다. 어머니.”

“그래. 진우야. 대체 어딜 갔다 온 거냐.”

“가긴 어디 가겠어요. 돈벌러 갔죠.”

“돈 다 필요 없다. 이제 어디 가지 마라.”

“알았어요. 어머니.”

“근데 우리 진희랑 언제 결혼할 거야.”

다시 엉뚱한 소리다. 노인의 말에 도토리는 그만 얼굴을 감싸고 소리 없이 울음을 터트린다.

“곧 할겁니다. 어머니.”

“그래. 빨리 해. 그래야 내가 편히 눈을 감지.”

“그런 말씀 마세요. 오래 사셔야죠.”

“오래 살면 뭐해. 우리 진희만 고생이지.”

노인은 연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말 속에는 결혼이란 말이 수십 번도 더 나왔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마당에도 딸에 대한 걱정이 묻어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토리는 말이 없었다. 언제나 가는 길은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이라도 더 본다는 생각이지만 돌아 올 때는 속상함에 가슴이 먹먹했다.

무거운 침묵을 전화벨 소리가 깬다. 마마다. 벌써 10번도 넘게 하는 전화다.

“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혹시 뭔 사고라도 난 거 아냐?”

“사고는 무슨 사고. 지금 가는 중이라니까.”

“내가 너 때문에 못산다. 이따 집에서 보자.”

집에 오면 잡아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말투다. 아마 밤새도록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미안해. 공연히 나 때문에.”

마치 본드라도 붙여놓은 듯이 입을 다물고 있던 도토리가 무겁게 한마디 한다.

“미안하긴. 신경 쓰지마.”

도토리는 달랑 한마디하고 다시 입을 닫는다. 이번엔 빳떼리가 먼저 말문을 연다.

“어머니는 얼마나 되신 거야.”

“4년.”

“좀 가까운데 모시지. 그럼 자주 찾아뵐 수 있잖아.”

“엄마 고향이야. 맘 같아서는 내가 모시고 싶은데 그럴 형편도 아니고 고향 바다나 맘껏 보시라고.. 그것도 이제 얼마 안 남았지만.”

“좋지 않으셔?”

“의사말로는 올해 넘기기 힘드시데.”

도토리의 말에 숙연해진다. 화제를 바꾼다.

“오빠가 있었어?”

“응. 엄마한테는 희망이고 나한테는 아버지 같았어. 바둑도 오빠한테 배운 거고.”

“그런데 어떻게..”

“새벽에 신문배달 하다 뺑소니차에 치었어.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공연히 말을 꺼낸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분당에 도착하자 어둠이 내렸다. 차를 대리운전으로 집에 보내고 두 사람은 삼겹살집으로 들어갔다. 하루종일 밥 한톨 입에 넣지 않은 두 사람이다.

술은 확실히 우울증 치료제다. 조금전까지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듯이 우울했던 기분이 삼겹살에 소주 몇 잔 들어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달해진다.

“나 노가다도 했어.”

“노가다? 여자가 어떻게 노가다를 해.”

“도배말이야. 22살때인데 아마 그때 술을 처음 배웠을 거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점심때면 꼭 소주를 마시더라고. 그러면서 나한테도 한잔 하라는 거야. 한잔 마시면 힘든걸 잊을 거라고..그래서 마시게 됐어.”

도토리는 술 몇 잔이 들어가자 혀가 꼬부라져서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두서없이 주절댔다. 아버지는 10살때 암으로 돌아가시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전전해온 직업이 열손가락으로 꼽아도 부족하다고 한다. 우유배달부터 식당, 가정부, 치킨집, 제과점, 캐디, 물류센터, 중국집..

그렇군. 남자보다 더 거친 저 손의 역사는 그런 거였군.
빳떼리는 도토리의 손을 애잔하게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희망이 없더라구. 죽을 때까지 도배일이나 할 용기가 없었어. 그래서 한 1년 하다가 때려치웠지. 술 좀 따라봐.”

“좀 천천히 마셔.”

“오늘따라 우리 빳떼리님이 왜 이렇게 얌전할까. 나 때문에 그래? 내가 불쌍해 보여서?”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빳떼리가 버럭 소리친다.

“깔깔깔..그러니까 빳떼리답네. 자, 건배.”

어김없이 원샷이다.

“결국 도배일 때려치우고 노래방 도우미를 하게 됐어.”

“노래방 도우미?”

빳떼리의 목소리가 커진다.

“그래. 좋지 않다는 건 알아.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그때 엄마가 치매에 걸리셨거든. 돈이 많이 필요했어. 더러운 돈이든 뭐든 그렇게 번 돈으로 엄마를 요양원에 입원 시켰어. 그때 그 남자를 만났어.”

그 남자. 헤어졌다는..

“우연히 손님으로 만났는데 단골이 되고 그렇게 된 거야. 그땐 난 너무 외롭고 힘들었어. 매일을 산다는 게 지옥 같았어. 인생이란 커다란 짐을 짊어지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거든. 아무한테나 밤이 새도록 내 신세타령을 하고 싶었어. 그렇게 힘든 나에게 그 남자는 큰 나무처럼 의지가 됐어. 결국 그렇게 헤어졌지만.. 그 남자하고 헤어지고 잠시 방황하다 우연히 처음처럼 행사 알바를 하게 됐는데 거기서 윗사람이 날 좋게 봤나봐. 그렇게 처음처럼 정식직원이 된 거야.”

도토리는 소주 한잔을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지난번 얼굴 네모난 여자 사건..그래, 자기 말이 맞아. 내가 도발한 거야. 그것도 정도가 심했다는 것도 알아. 그런데 그거 알아? 자기들은 뭐가 잘못돼도 돌아갈 곳이 있잖아. 집이든 부모든 형제든..그런데 난 갈곳이 없어. 나뿐이야. 이세상에 달랑 나 혼자야. 그래서 잘못돼서도 안되고 져서도 안돼. 회사가 믿는 만큼 해야 해. 그래야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거야. 알아?”

도토리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빳떼리를 보았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이다.
원망과 슬픔, 자괴감..

소주 2병이 비워졌을 때 도토리는 얼굴을 테이블에 박았다. 빳떼리는 겨우 소주 서너 잔을 마셨을 뿐이다. 빈속에 소주 한병 반을 마셨으니 오죽하겠는가.

오늘은 빳떼리가 도토리를 데려다준다. 술에 취한 사람을 데리고 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택시에 태우고 내리고 업고서 가야 한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빳떼리다. 남자인 나도 이렇게 힘든데 여자인 도토리가 어떻게 나를 집까지 데리고 왔는지 의아스럽다.

간신히 오피스텔에 도착하자 또다른 난관에 봉착한다. 버튼키의 비밀번호를 모른다. 도토리한테 비밀번호를 캐내기 위해 한참을 씨름을 한다. 한참 만에 겨우 잠꼬대처럼 도토리 입에서 말이 나왔다.

“내 생일.”

“생일이 언젠데.”

“10월10일..”

1010을 누른다. 맞긴 맞는 건지.

맞다. 문이 열린다. ^^

오피스텔에 들어가 도토리를 침대에 눕히고 간신히 한숨을 돌리는 빳떼리다.
문득 잠들어있는 도토리가 눈에 들어온다.

도토리의 얼굴을 이렇게 자세히 보는 건 처음이다. 그러고 보니 꽤 예쁜 얼굴이다. 갸름한 얼굴에 적당히 볼륨 있는 볼, 긴 눈썹에 도톰한 입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코. 눈부시도록 하얀 목덜미. 남자라면 누구나 호감을 가질만한 얼굴이었다.

빳떼리의 눈은 얼굴에서 몸쪽으로 내려왔다. 원피스를 입어서 몸의 윤곽이 훤하게 드러난 도토리의 몸은 육감적이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빳떼리다.

빳떼리는 도리질을 쳤다. 말도 안돼.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토리는 여자가 아니야. 빳떼리, 이성을 차려.

아무리 몸부림쳐도 몸은 이성의 지배에서 이미 벗어나 있었다. 빳떼리의 엉덩이는 이미 침대에 걸쳐진 상태다.

그래, 키스만. 키스 정도는 괜찮아.

빳떼리가 도토리 얼굴을 향해 천천히 상체를 숙이는 순간 도토리가 뒤척이며 턱을 들었다. 꼬막처럼 잔뜩 오므린 입술을 앞으로 쭉 내민 상태다. 그때라도 상황을 눈치 챘어야 했다. 그런데 빳떼리는 그 동작이 키스를 받아들이는 동작으로 착각한다.

이 앙큼한 것, 깨어 있었군. 내 키스를 기다린 거지. 그럼 정열적으로..

그 순간 도토리가 벌떡 상체를 일으키면서 빳떼리의 입술과 격렬하게 랑데뷰를 한다. 사실 슬로우 비디오로 보면 랑데뷰하기 전에 도토리의 입에서는 걸쭉한 토사물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얼굴에 온통 토사물을 뒤집어쓴-일부는 빳떼리의 입으로도 들어간-빳떼리는 킹콩처럼 발광을 했다. 당장 미치기 일보직전이지만 그전에 당장 해야 할 일이 생긴다.

침대에서 상체를 숙인 도토리가 마치 방바닥이 변기라도 되는 듯이 위 속에 남은 음식물을 끄집어낼 자세다.

“안돼!!”

기겁을 했지만 이미 화장실로 가기에는 늦었다. 단지 도토리가 더 쉽게 토할 수 있도록 등을 토닥거려 줄 수밖에.. -,.-;;

위 속에 있는 것을 다 토해낸 도토리는 속이 시원하다는 듯 뒤로 벌렁 누워 다시 잠자리에 든다. 남은 일거리는 빳떼리의 몫이다.

온통 토사물 천지다. 이걸 다 처리하려면 밤을 새도 부족할 것이다.
빳떼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쌔근쌔근 자고 있는 도토리를 보고 이를 갈았다.

이 죽일놈의 인연. (9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