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령이 해제됐다. 봉다리의 딸 돌잔치 때문이다.

봉다리는 한달전부터 자기 딸 돌잔치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떠버리더니 당일인 오늘은 10분마다 직원들한테 참석을 독려한다. 행여 한 사람이라도 누락될까봐 노심초사다. 돌잔칫상에 차려진 푸짐한 안주에 무한정으로 제공되는 술을 생각하면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질 일이지만 지갑 안을 생각하면 생각이 무거워진다. 요즘 금 한 돈이 얼마인가. 20만원도 넘는다. ㅠㅠ 이래저래 이번달도 적자다. 그나저나 어쨌든 봉다리 딸의 돌잔치로 자연스럽게 금주령이 해제된 건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금주령이 해제되면 나머지 금지령도 자동해제다. 그런 생각을 하니 기분이 므흣해진다. ^^

토요일 근무가 끝나기가 무섭게 전 직원이 돌잔치 장소로 간다. 장소는 뷔페다. 하늘 모르게 치솟는 물가에다가 그 많은 음식장만을 하려면 얼마나 고단하겠는가. 돌잔치가 아니라 골잔치가 될지도 모른다. 초대받은 사람 입장에서도 담배도 제대로 못피우고 큰소리도 제대로 못내는 좁아터진 집보다는 뷔페가 좋다. 더군다나 집에서 장만하는 음식하고 산해진미로 차려지는 뷔페 음식이 비교가 되겠는가. 호스트나 게스트나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지는 장소선택이다.

뷔페에 들어서자마자 미리 기다리고 있는 봉다리 형수님과 이산가족이 만난 것처럼 반갑게 인사하고 각자가 준비해온 돌잔치 선물을 전달한다. 그야말로 정이 가득한 아름답기 그지없는 장면이다. 그 와중에 막내는 봉다리의 딸을 안고서 예뻐 죽겠다는 듯이 비명을 질러댄다.

“꺅. 아기가 무지 예뻐요. 나도 이런 아기 낳고 싶어.”

걱정 마. 내가 곧 낳게 해줄 테니까.. -.-

빳떼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자자..에필로그는 이 정도로 끝내고 빨리 음식들 챙겨와서 한잔씩들 하자구.”

봉다리의 말에 비로서 본 게임에 들어간다. 각자 커다란 접시 하나씩 들고 입맛에 맞는 음식을 쵸이스 하기에 바쁘다.

“이 킹크랩에 들어있는 키토산이 얼마나 여자한테 좋은지 모르지. 이게 피부에는 완전 끝장이거등. 그러니까 막내 이거 많이 먹어.”

구라가 막내한테 주절대고 있다. 하여간 조금만 방심하면 저놈은 막내한테 찝적댄다.

“야. 구라 그만 떨고 니꺼나 담아.”

“빳떼리, 넌 그게 문제야. 동료의식이 없다구. 나보다 동료를 챙기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거야. 난.”

“그렇게 동료의식이 충만하면 모난이나 챙겨. 저것 봐라. 접시에다가 저렇게 산더미처럼 담는 거. 저 엄청난 걸 혼자 들고 가겠냐? 그러니까 니가 가서 들어줘. 동료의식이 충만한 구라님께서..”

“이건 말을 해도 꼭 삐딱하게..”

그때 막내가 긴장된 목소리로 빳떼리를 부른다.

“박대리님.”

“어.”

“저기..”

막내는 뷔페 입구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막내의 시선을 따라서 입구쪽으로 고개를 돌린 빳떼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처음처럼의 문부장과 허대리가 입구를 들어서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여자. 도토리다.

“저게 누구야. 처음처럼 문부장하고 허대리, 그리고 그 뭐냐..도대리인지 뭔지 하는 여자잖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말을 주절대는 구라다. 누군지는 안다. 문제는 저것들이 왜 여길 왔느냐는 거다. 우연인가. 여기 다른 행사에 온 건가. 그런데 아니다. 세 사람은 우리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서 보스와 인사를 나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판단이 안된다. 그때 보스가 우리를 부른다.

“지난번 불미스런 일도 있고 해서 사과라고 해야 할까 화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생각에 내가 문부장님을 초대했어. 뭐 부장님도 흔쾌히 초대에 응해주셨고. 아무리 라이벌이라지만 서로 개인적인 응어리 같은 건 푸는 게 좋아. 안 그렇습니까. 문부장님.”

“그래. 그건 고팀장 말이 맞아. 회사가 라이벌이지 우리가 라이벌은 아니잖아. 이래서 내가 고팀장을 좋아해. 마인드가 쿨하잖아.”

“하하..별말씀을.. 그리고 박대리는 여기 도대리한테 정식으로 사과하고. 그때도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안했잖아. 사과할 건 사과해. 그게 남자야.”

빳떼리는 도토리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모른다. 지난번 도토리와의 술자리로 주먹다짐 사건은 유야무야됐다는 걸. 그런데 사과해야 한다. 기분이 더럽다.

“지난번 일 미안하게 됐습니다.”

어거지로 목구멍에서 기어나오는 말이다.

“사과 받아드릴게요.”

여전히 생글거리는 얼굴이다.

“허허..이거 내가 다 속이 시원하구먼. 기분이 좋아.”

“그러게 말입니다. 문부장님. 이쪽으로 오십시요. 일단 맥주나 한잔 하시고..”

“그래그래. 그렇지 않아도 날이 더워서인지 목이 컬컬했어.”

“벌써 날씨가 여름 같습니다.”

보스와 문부장은 테이블에 앉자마자 거품이 가득한 맥주잔을 부딪친다.

두 보스가 자리를 잡자 봉다리가 허대리와 도토리 두 사람을 자리에 앉힌다.

“자자..뭘 그렇게 서있어. 일단 앉으라구.”

각자 한 접시씩 가져다 놓은 안주에 본격적인 술자리가 시작된다.

소주 서너 병이 들어가자 처음에 서먹서먹했던 분위기가 왁자해진다. 도토리는 썩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재치가 넘쳤고 상대방의 말에도 응수가 뛰어나서 전체적으로 화제를 리드했다. 왁자한 분위기에 두 사람만이 제사상 앞에 앉은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술만 축낸다. 모난리자와 빳떼리다. 모난리자는 뭐가 불만인지 잔뜩 부어서 가끔 도토리를 노려보았다. 아마도 도토리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당연히 빳떼리도 이 자리가 편할 리는 없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일어나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 빳떼리에게 맞은편에 앉은 도토리가 슬쩍 말을 건넨다.

“박대리님은 왜 말씀이 없으세요.”

“유구무언. 여자를 때린 파렴치범이 뭔 낯짝으로 히히덕 거리겠어요.”

“아이~그건 다 끝난 거잖아요.”

“그래. 임마. 사과하고 다 끝난걸 왜 자꾸 들먹거려.”

도토리의 옆자리에 앉은 구라가 한마디 끼어든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게 아닐까요?”

“무슨 이유요.”

“제가 어디서 봤는데요 남자가 이성한테 관심이 있으면 오히려 외면하거나 짓궂게 군대요. 자신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한테 접근하게 한다는 거죠.”

도대체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도토리다. 입을 열면 금방 걸쭉한 욕설이 튀어나올 것 같은 빳떼리는 어금니를 질끈 악문다. 참자. 참아야 한다. 무조건 참을 수밖에 없는 전과자의 설움이다.

“그 말뜻은 저놈이 도대리님을 좋아한다는..?”

구라가 눈을 휘둥그래하면서 말한다.

“깔깔깔..말이 그렇다는 거죠.”

도토리는 목젖이 보이도록 한바탕 웃더니 소주 한잔을 마시고 다시 나긋이 말을 잇는다.

“하지만 진심을 알아볼 수는 있죠.”

“어떻게요.”

“단둘이 시간을 가져보는 거죠. 가령 삼겹살에 소주를 한잔 한다든가..”

도토리의 말에 빳떼리의 눈이 희번득해진다.

“그리고..호프집을 거쳐서 노래방, 해장국집에서 다시 한잔하고..”

도토리의 그 다음 말은 빳떼리의 목소리가 삼켰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치는 빳떼리다.

“야 도토리!!!!”

직원들이 일제히 빳떼리한테 시선을 돌린다.

도토리. 영업3과 공공의적 도토리. 그런데 왜 빳떼리의 입에서 도토리가 튀어나오는 건가. 짧은 순간 직원들은 공황상태에 빠진다.

아..지금 내가 뭐라고 그랬나. 도토리. 도토리라고. 분명히 도토리라고 그랬던가.

빳떼리. 이 똥물에 튀겨죽여도 시원찮을 놈아. 아무리 단순무식해도 그렇지. 도토리를 입밖으로 내뱉으면 어쩌자는 건가. 어떻게 할 건가. 9.11사태보다도 더 심각한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할건가.

보스. 봉다리. 구라. 모난리자. 막내. 10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빳떼리한테 꽂혀져 있다. 1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 그 순간이 10년. 100년처럼 길었다.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빳떼리의 말이 이어진다.

“~묵 좀 주세요.”

“깔깔깔..도토리묵 달라고요?.”

“도토리묵? 임마. 그걸 왜 소리치고 그래.”

다른 때 같으면 여지없이 헤드록 감이지만 오늘은 자신의 딸 돌이라 한바탕 소리치는 걸로 끝내는 봉다리다.

“도토리묵 없는데 가져다 드릴까요.”

“됐어.”

모난리자의 말에 돌아서 음식진열대로 걸어가는 빴떼리다. 간신히 위기는 넘겼지만 그렇다고 자리에 앉아있을 기분도 아니다. 쓰리고에 피박 광박 멍따를 당해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27년 인생 중에 최악의 패를 잡았다. 눈앞에 산해진미가 깔려있는데도 그림의 떡이다. 입맛이 떨어진 지는 이미 오래전이다. 초밥코너에 초밥이 종류별로 줄지어 놓여져 있다. 할일 없이 초밥 개수를 세어보는 빳떼리다. 하나..둘..셋..

스무 개쯤 세었을 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린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안다. 도토리다.

“도토리묵은 저쪽인데 왜 여기서 서성대는 거야.”

“왜 여기까지 쫓아오고 야단이야.”

빳떼리가 나지막히 으르릉거렸다.

“쫓아오기는..나도 음식 가지러 온 건데..”

“열심히 담으시지.”

빳떼리는 초밥을 접시에 담는 도토리를 뒤로하고 성큼 걸어간다.

“내가 그쪽 영업3과 철천지원수라면서?”

도토리의 말에 고개를 휙 돌리는 빳떼리다.

“구라씨가 그러드라구. 도토리가 영업3과 공공의 적이라구..”

“그래서. 자신이 도토리라고 자백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 못할 것도 없지.”

“뭐야?”

“내가 뭘 그렇게 큰죄를 졌다고 감추겠어. 바둑 몇 판 이긴 게 그렇게 여러 사람한테 죽을 죄는 아니잖아. 아..그렇지 영업상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 쉽게 사과가 안되겠네. 하지만 그것도 사실 이 바닥에서 비일비재한 일이잖아. 그보다 더한 것도 하는데..더군다나 우린 4차까지 필름이 끊겨가면서 술을 마신 사이잖아. 그 정도면 충분한 사과가 됐다고 생각하는데 난.”

또 눈이 뒤집히는 빳떼리다. 도토리, 니가 정녕 나를 말려죽일 작정이구나. 하지만 여기서 흥분하면 끝장이다. 이성을 차려야 한다. 이성. 빳떼리는 심호흡을 크게 한 다음 나지막히 말한다.

“내 입장은. 내 입장은 생각 안해봤어?”

“무슨 입장?”

“자기가 도토리란 사실을 감추고 밤새도록 술까지 마신 사실을 알면 난 뭐가 되냐고.”

“아..그렇지. 자긴 직장에서 좀 난처하겠네.”

복창이 터질 일이다. 진짜 모르는 건지 알고도 그러는 건지. 도토리의 말에 빳떼리는 심장이 터질 지경이다.

“알았어. 비밀로 할게. 그러니까 빳떼리님도 좀 잘해.”

“뭘 잘해.”

“술자리에서 그게 뭐야. 서먹서먹하게..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잖아. 듣자니까 술자리에서는 개대리라던데 오늘은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으니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빳떼리는 한숨이 터져 나온다. 이 여자 앞에서는 술마시는 것도 내 뜻대로 못한다. 어쩌자고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건지..

한심한 자신의 신세에 축 늘어진 빳떼리를 낯익은 목소리가 화들짝 깨운다.

“여기서 뭣들 하시는 거여요.”

모난리자의 냉랭한 목소리다.

“하긴 뭘..음식 담잖아. 음식.”

“빈접시잖아요.”

“지금 담으려고.”

허겁지겁 닥치는 대로 음식을 담는 빳떼리다.

“도토리묵은 저쪽에 있어요.”

“아. 그래. 어디..”

모난리자가 빳떼리를 끌고가며 도토리를 본다. 쌩한 표정이다.

술자리에 돌아온 빳떼리는 확 달라졌다. 아니, 달라진 것이 아니라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목소리는 뷔페가 떠나갈 정도로 커졌고 맥주에 소주를 연신 위 속으로 공급한다. 누가 알겠는가. 그것이 비밀을 지키기 위한 빳떼리의 눈물겨운 몸부림이라는 것을..

왁자한 술자리는 뷔페를 나와서 2차 3차로 이어진다. 도대체 어디까지 달린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오늘도 빳떼리는 필름이 끊겼다. (6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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