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현실적으로 즐기는 것은 바둑 같은 고급 오락물일진대 바둑 비법(秘法)이 담겨있는 책자를 선물로 갖다 주면 어떨까? 해서 당시 시중에 떠돌고 있는 원나라판 현현집(현현기경)을 보다 쉬운 말로 완역(完譯)하여 왕창조가 그들에게 뇌물성으로 갖다 줬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인데,

다소 황당스럽긴 하지만 이런 가설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아래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왕창조의 현현기경이 번각되어 나오기 전까지 원나라 판 현현집(현현기경)을 번역한 다른 종류의 현현기경은 그 당시에 전혀 없었을까?

확실한 단정을 내리긴 어렵지만, 현재 중국에서는 현현기경의 판각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可查可考证的版本主要有三种：
一是元青城杨氏“清江书堂”刻印的元刻本《玄玄集》；及元版；
二是汪昌朝于明万历年间按元至正本翻刻的，书名为《坐隐斋先生自订棋谱全集》；及明版；
三是清人补刻的《元元棋经》，此版及清版，与明刻本相同，只是字体不一而已。
元版可能已散佚，明版是目前见到的最早版本！
明代《永乐大典》、清代《四库全书》均收录。

현현기경 주요 판본으로 3가지가 존재하는데,

첫번째 판본은 원나라때 청성양씨가 만든 '청강서당'각인의 원각본인 <현현집>이고, 흔히 원(나라)판본이라 불린다.

두번째 판본은 왕창조가 명나라 만력년간에 원판본을 기반으로 번각한 판본으로 흔히 <좌은제선생자정기보전집>이라 불리고, 이를 명(나라)판본이라 한다.

세번째 판본으로는 청나라때 박각이 펴낸 <원원기경>인데, 이 판본을 청(나라)판본이라 한다. 명판본과 같은 내용이고 단지 글자체가 좀 다를 뿐이다.

원판본은 이미 소실되어 찾아 볼 수가 없고, 명판본이 그나마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전해진다. 명나라때 <영락대전>과 청나라때의 <사고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왕창조의 현현기경 판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둘째, 원나라 판 현현기경 문자부(서문등)에는 난해한 몽고 문자등이 섞여있어 명나라 사람들이 읽기에 어려움이 있었을까? 그리고 왜 원나라판 현현집은 왕창조의 현현기경 판본이 나온 이래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을까?

우집의 서문과 구양현의 서문, 안천장 서문에 의하면 현현집(현현기경)은 1347년과 1349년에 발간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당시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던 몽골족의 대신 바얀(Bayan, 佰顔)은 이보다 앞서 한족(漢族)을 억압하는 여러 가지 정책을 펼쳤는데 그 중 하나가 한족이 몽골 문자나 아랍 문자를 읽고 배우는 것 등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1339년 그의 조카 토크토에 의해 실각되어 그가 세운 정책들이 모두 폐기되어지는 시기를 전후로 당시 식자층에서는 몽골문자나 아랍문자들이 통용되었을 것이니 1347년, 1349년에 출간된 현현집에도 몽골문자가 섞여 있을 수도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서문을 쓴 우집은 과거 필화(筆禍) 사건으로 인하여 황제(순제)의 노여움을 사서 까딱했으면 목이 달아날 뻔했다가 당시 실력자 토크토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 관직에서 쫓겨났던 이력이 있는 사람이다.  ( 이 필화사건에 대해서는 서문 설명때 자세히 소개함)
그런 그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필화(筆禍)에 또다시 휘말려들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서 현현집의 서문을 썼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우집이 쓴 현현집의 서문 내용 중에는 전임 황제- 문종- 와 바둑에 얽힌 일화를 소개하는 등 은근히 황실과의 인연을 소개하는 부분이 있다.)

현현집에 또 다른 서문을 쓴 구양현은 당시 조정에서 삼사(三史) 편찬을 주관했었고, 경세대전을 집필하는 등 막강한 위치에 있던 현직 관리였던 만큼 그의 서문 내용에서 몽골문자등을 전혀 사용치 않는 우(愚)를 범하지 않았으리라는 추정 역시 가능하다.

그리고 현현집(현현기경)보다 200여년 앞서 발간되었던 남송(南宋) 시대의 바둑책 망우청락집(忘憂淸樂集) 속에는 휘종 황제가 지은 바둑 시(詩)가 실려 있는데, 그렇다면 원나라판 현현집(현현기경)에도 당시 원나라 황제를 칭송하거나 황제와 관련된 시가 부록처럼 딸려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런 것(바둑 사활 문제들과 직접 관련이 없는 문자 부분)들이 원나라가 망하고 나서 주원장의 명나라가 들어선 후에도 온전히 남아있거나 모두 번역하여 출판하기에는 분명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