河山一局棋

도도한 장강(長江)이 삼만 육천오백 일(日)을 굽이쳐 흐르고 강산이 열 번 바뀌는 세월을 헤쳐온 노인장은 한 폭의 강산 같고 한 판의 바둑판 같은 화선지에 '일필휘지'하여 나지막이 외친다.  

河山一局棋  강산(자연)은 한 판의 바둑이다

'인생은 연극이다.'라고 셰익스피어가 말했다면 '인생은 바둑이다.'라고 그 또한 말한다. 나아가 '수많은 인생을 품어주고 길러주는 강산(자연) 또한 한 판의 바둑이다.'라고 설파한다.

이 고요한 외침은 반세기 넘도록 그를 지켜보며 아껴온 바둑팬의 가슴에 영원히 메아리 되어 남을 것이다.

※ 아래 이어지는 응창기배 오청원 9단의 해설은 중국의 <톰닷컴>에서 발췌했습니다. 오9단의 해설은 그의 해설이라고 분명히 밝힌 부분이고 그 외의 해설은 제 의견입니다.

6회 응씨배 1국

싱가포르. 2009. 3. 3 

최철한●  이창호○  백 2집 반승

☜ <실전진행도 1>

이창호 9단이 백1과 3으로 좌변 흑 두 점을 가르자고 했다.

흑의 최철한 9단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 <참고도 1>

흑1로 끊어 백 한 점을 잡는다면 백8까지의 수순이 예상되는데 백 상변의 골이 깊어진다.

수순 중 백8 대신 A로 축으로 잡는다면 흑B로 축머리 이용당한다.

흑1로 끊어 흑3으로 위를 잇는다면 백은 흑1을 축으로 잡을 수는 없지만 백4로 늘어서 충분히 싸울 수 있다.

흑1로 막아보아도 백8에 이르면 흑은 파탄이다.

☜ <참고도 2>

오청원 9단은 흑1을 추천한다.

이런 수순이라면 백 상변의 골이 깊어지긴 하지만 폭이 너무 넓어 오히려 큰 집이 나기 어렵다는 오9단의 견해 

흑A로 침입하여 좌하귀 백을 괴롭힐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하지만, 이 형태는 일단 상변의 폭이 크기 때문에 최철한 9단이 뛰어들어 수습하는 바둑이 될 가능성이 큰데, 수습보다는 본능적으로 공격을 추구하는 최9단에게 이런 진행은 심연의 무의식에서부터 거부감이 들었을 것이다.

<참고도 2>의 흑7로 보강하지 않으면 <참고도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백A-흑B-백C의 수순으로 흑은 쌈지를 뜰 수밖에 없다.

☜ <참고도 4>

그렇다면 흑1은 어떨까?

이렇게 하면 선수로 이곳을 처리할 수 있어 좋아 보이지만 <참고도 2>의 흑7로 두어도 어차피 백은 중앙을 보강하는 정도이기 때문에 선수를 뽑을 수 있기는 매한가지다.

왼쪽 <참고도 4>에서는 백에게 나중에 A로 막히면 백B 단수까지 맞아야 한다. 왼쪽의 참고도가 <참고도 2>보다 전혀 나을 것이 없다.

☜ <실전진행도 2>

최9단은 흑1을 들고 나왔다. 이 수는 상대에게 굴복당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 보통 꺼리는 수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최9단의 임기응변이 돋보이는 수라고 할 수 있다.

흑 7, 9, 11의 수 또한 '상대의 등을 밀어주는 수'라고 해서 잘 등장하지 않지만, 지금은 흑 7, 9, 11의 수가 상변 백 세력을 지우고 있어서 실전적인 좋은 수가 된다.

어떤 분야든 최고의 경지에 오르려면 선입견을 깨야 한다. 바둑격언이나 책에 나온 수법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으로 정형화된 수단일 뿐, 그것에 얽매이면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없다.

정석이나 격언을 손가락에, 실전을 달에 비유한다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가려져 달이 안 보일 때가 자주 있다.

☜ <참고도 5>

오9단의 해설을 보자. 오9단은 <실전 진행도 2>의 백4 대신에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이 수로는 왼쪽 <참고도 5>의 백1로 잇고 흑이 넘어갈 때를 기다려 백3과 5로 상변을 틀어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진행대로라면 상변 백 세력은 그대로 살아있다.

실전 진행처럼 백이 녹색의 공간에 세력을 쌓을 필요가 없다는 오9단의 의견이다.

☜ <실전진행도 3>

실전진행에서 백은 후수로 세력을 쌓았지만, 흑이 17로 하변에 선착하자 백의 세력이 뻘쭘해졌다.

초반 진행은 분명히 흑의 호조다.

☜ <실전진행도 4>

이어지는 실전에서 백은 1부터 5까지의 수순으로 흑진에 소박한 둥지를 틀고자 했다.

오9단은 실전과 다른 진행을 제시한다.

백은 먼저 1로 건드려 팻감을 만들어 놓고 백3으로 3-3을 노린다는 것이 오9단의 각본이다. 흑이 먼저 패를 따내도 백은 A에 팻감이 있기 때문에 흑이 B로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오9단의 스토리.

흑이 B로 굴복한다면 이후의 진행이 매우 어렵다. 무엇보다 백은 우변 흑 세력을 한시바삐 삭감하는 것이 급선무. 흑은 바로 패를 하지 않고 우변으로 곧장 향할 수도 있다. 오9단의 의견이 어떨지는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 <실전진행도 5>

이9단이 백◆로 젖힌 장면이다. 우하변에 미생마를 남겨놓고 다시 우변을 초토화하려는 이창호 9단의 배짱이 엿보인다.

☜ <실전진행도 6>

최9단은 흑1로 모자 씌었지만, 이 수는 호쾌하게 느껴질 뿐 좋은 수는 아니었다. 최9단은 초반 좌변에서 선입견에서 벗어난 2선의 내려서는 수를 선보이며 형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최9단은 실전적인 수가 아닌 통상적 공격수인 모자씌움의 매력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실족하고 만다.

통쾌하다고 여겼던 흑의 모자씌움은 백8로 우상변의 백 대마가 완생하자 백의 도우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오9단의 해설이다.

오9단은 왼쪽 참고도의 흑1을 제시한다. 백4를 기다려 흑5로 덮어 누른다면 우상변의 백 세 점이 숨쉬기 곤란해진다.

백A로 벌리면 후에 흑B가 뼈아프게 기다리고 있다.

백이 그렇다고 해서 백B로 두는 것은 흑A로 쇄골짚음을 당해 두집내자고 각설이 타령을 불러야 한다.

☜ <참고도 8>

백 대마가 깔끔하게 수습되고서 종반에 접어든 시점이다.

실전에서는 백◆에 흑이 그냥 A로 받고 백이 B로 미끄러져 백이 우세를 확립했는데 흑A 대신 흑1과 백2를 교환하고 흑3으로 이쪽을 선착했으면 흑에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오9단은 주장한다.

흑3은 백 대마가 아직 완생이 아님을 은근히 노리는 의미도 있다.

6회 응씨배 3국. 싱가포르. 3.7

최철한● 이창호○  흑 불계승

☜ <실전진행도 1>

백1은 흑2와 교환되어 우변 백 대마의 안형은 없어지지만 상변에서 실리적으로 이득을 보겠다는 수이다. '대마킬러' 최9단 앞에서도 당당한 이창호 9단이다.

과거, 스승 조훈현 9단을 상대로 그는 철저하게 두터움으로 승부했다. 돌다리를 두들겨 보고도 건너지 않는 신중함으로 조9단의 번뜩이는 감각과 파워를 무력화시켰다.

그러던 이창호 9단이지만 후배와의 대결에서는 물러섬이 없다.

실전 진행은 결과적으로 백1과 흑2의 교환이 빌미가 되어 백 대마의 고생길이 열렸을 뿐 아니라 흑이 A로 들여다보았을 때 반드시 백B로 이어야 하는 부담이 남았다.

중반 실전진행이다

흑1에 백은 백2로 이어야 했기 때문에 상변 백의 모양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실전진행도 1>의 백1은 수습에 능한 이창호 9단의 자신감의 발로이지만 찬성할 수는 없다.

기사들의 컨디션이 좋을 때는 자신의 수가 과하다 싶으면 머리 한편에서 적절하게 브레이크를 걸어준다. 극단적인 실리파 마효춘 9단이 좋은 바둑을 둘 때는 극단적인 실리의 유혹을 적절하게 뿌리칠 때이고 축, 장문 안되면 끊고 보는 서능욱 9단이 좋은 바둑을 둘 때는 무조건적인 싸움의 유혹에서 벗어나 적절하게 실리를 챙길 때이다. 응창기배 3국은 마인드 컨트롤을 잘하는 돌부처 이9단 본연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다. 이9단의 컨디션이 안 좋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응씨배 3국까지의 내용을 설명할 수 있을까? 왜 이창호 9단은 유독 최철한 9단에게 이런 식의 패배가 많은 것일까?

<실전진행도 2>

이9단이 백◆로 풍덩 뛰어든 장면

실전에서 최9단은 흑A의 압박을 선택했지만 오9단은 흑B로 일단 실리를 챙겨놓고 공격하기를 추천한다.

흑B를 두기 전에 교환해야 할 수순이 있다.

<참고도 1>

나비처럼 날아 흑1로 쨉을 던져야 한다고 오9단은 강조한다. 백2는 불가피하다.

그냥 백4로 뛰다가는 흑A로 건너 붙임 당해 파탄이다.

<실전진행도 3>

실전진행에서 최9단은 흑A와 백B를 교환했는데 우변과 하변의 백 대마를 분단하여 공격의 효과를 극대화해야 할 흑으로서는 싱거웠다는 오9단의 의견

<참고도 2>

흑은 일단 흑1과 3으로 갈라놓고 봐야 한다고 오9단은 강조한다.

<실전진행도 4>

흑이 공격을 늦추는 바람에 백 대마가 편하게 수습될 찰나, 실전진행의 백◆가 실수이다.

이 수는 나중에 흑A로 움직이는 맛을 남겨 백 대마가 심하게 몰리는 빌미를 제공한다.

바늘 끝만 한 허점을 교묘하게 발견해내 맹독을 주입하는 최9단을 상대로 이9단이 틈을 보인 장면이다. 비록 바늘 끝만 한 틈이지만 최9단의 맹독이 주입되어 활성화되기에는 충분한 공간이다.

백◆는 백A로 말끔하게 연결했다면 백 대마가 그렇게까지 시달림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반의 실전진행이다. 최9단의 맹독이 흑1로부터 서서히 주입되기 시작한다.

실전에는 안 나왔지만 흑A의 급소도 눈에 들어온다.

<실전진행도 5>

<실전진행도 4>에 이어 흑은 좌상귀 걸치는 진행을 택했다.

<참고도 3>

오9단은 실전진행 대신 왼쪽의 참고도를 제시한다.

먼저 좌하귀 3-3을 파고 흑11로도 좌상귀의 3-3을 파는 '양 3-3퍼레이드'를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흑이 전체적으로 두터워서 이렇게 실리를 바짝 챙겨놔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참고도 4>

만약 백이 4로 녹색 흑 세 점을 굳이 차단하겠다고 한다면 흑 세 점을 가볍게 보겠다는 의도이다.

<실전진행도 7>

중반 실전진행에서 이9단은 양곤마를 내버려둔 채 백◆로 또 한번 실리를 챙겼지만, 상대는 살모사의 독을 백 배 농축한 맹독을 머금은 최철한 9단이다. 이후 백의 양곤마는 온몸이 거의 마비되는 지경까지 이른다.

설령 백◆로 두지 않으면 불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백A 정도로 두어서 훗날을 기약하는 쪽이 강태공 이창호 9단 본연이 모습이 아닐까?

응씨배 1국과 3국을 통해 이창호 9단은 '대마킬러' 최9단을 상대로 잡을 테면 잡아보라는 배짱을 과시한다.

수습에 능한 기사는 오히려 대마가 잘 잡힌다. 자신의 수습능력을 믿고 대마의 안위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물에 잘 빠진다. 수영실력을 과신해 먼바다까지 가기 때문이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말실수를 잘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말솜씨를 믿고 거침없이 말하기 때문이다. 월드베이스볼대회 일본과의 1차전에서 김광현 투수는 자신의 주무기인 슬라이더를 일본 타자들이 계속해서 공략했음에도 슬라이더를 고집하다가 무려 8실점 했다.

천하제일의 수습능력을 갖춘 이창호 9단이지만 응씨배 3국에서 보여준 이9단의 바둑은 그 정도가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돌부처 이창호 9단의 가슴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솟아오르는 것일까?.

앞으로 전개될 4,5국에서는 이창호 9단이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여 반격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