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박영훈 프로를 '어린 왕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어린 왕자가 아니었다. 그가 어린 왕자로 불린 이유가 있겠지만 적어도 바둑판에서만큼은 그는 어린 왕자가 아니었다.

소설 속의 어린 왕자는 겉모습에 집착하고 숫자를 좋아하는 어른들에 대해 조소하고 낭만을 꿈꾼다. 어린 왕자와 동질감을 느끼며 그와 대화를 나누었던 소설 속의 비행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떠올린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하면 정작 중요한 것은 물어보지 않고 "그 애는 나이가 몇이지? 형제들은 몇이고? 아버지는 많이 버니?" 항상 이런 것만 묻는다.

박영훈 프로의 바둑은 어린 왕자와 닮지 않았다. 그의 바둑은 계산에 기초했으며 현실적으로 수치화시킬 수 있는 실리에 탐닉했다. 수치화시킬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인 세력과 중앙에 소홀했다.

그러나 이런 선입견 또한 옛날이야기일 뿐, 요즘은 그의 대국에서 어린 왕자의 체취를 물씬 풍기는 몸짓이 수시로 탐지된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낭만을 꿈꾸는 어린 왕자처럼 그의 바둑에서 자유로움과 먼 우주로의 비상을 느낄 수 있다.

<후지쯔배 국내선발전 최종국> 2009. 2.16

박영훈 9단●  조한승 9단○ 

흑◆를 처음 접한 순간에는 중앙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돌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수는 박영훈 9단이 진정한 어린 왕자로 거듭났음을 바둑팬에게 알리는 동시에 이 바둑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한 수가 된다.

좌변, 일렬로 쭉 늘어선 쇠구슬 같은 흑 대마는 자체 삶과 뻥 뚫린 탈출구가 있어 시달릴 말이 아니다.

시급한 곳도 없고 딱히 큰 곳도 안 보이는 현재 국면에서는 흑◆로 자작가를 짓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흑◆는 말 그대로 '자작가'일 뿐 좋은 수라고 할 수 없다. 이렇게 두어서 확실히 이길 수만 있다면 백 번 천 번 두어야 옳겠지만, 지금은 적극적인 상상력과 움츠리지 않는 비상이 필요한 때이다.

흑◆는 녹색의 공간을 차지했다는 의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런 초가집 정도는 끝내기 단계에서도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 가령 쌍방 마늘모 할 수 있는 2선의 끝내기 자리는 흑◆에 못지않다.

아방궁 정도면 모를까, 고작 초가집 하나 마련하고자 초반에 한 수를 기꺼이 투자하는 것은 고기 뷔페에서 고기는 안 먹고 '수정과'와 '식혜'만 먹는 꼴이다.

'이렇게 큰 초가집이 어디 있나.'라고 따지실 기우님도 계실지 모르겠다….

바둑은 자신의 집만 짓는다고 해서 이길 수 없고 상대 집만 깬다고 해서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자신의 집(또는 세력)도 넓히면서 상대의 집(또는 세력)을 깨는 '일거양득'의 수를 누가 더 많이 두느냐에 따라 바둑의 승패는 결정된다.

또한, 공격과 수비를 겸하는 '일거양득'의 수를 두어야 함은 두 말하면 입만 아플 터이다. 그러한 점에서 흑◆는 다목적의 의미심장한 수다. 저 먼 우주를 향해 있는 흑◆는 가장 높이 멀리 비상하는, 골프용어이기도 한 '알바트로스'를 연상시킨다.

             알바트로스☞ 실재하는 새이며 펼친 날개의 길이가 3미터나 되는 것도 있다고 한다 
 

백1로 침입했을 때 흑이 A나 B로 우변을 단속한다면 비상하여 한껏 폼을 넓힌 흑◆가 자작가를 짓는 수보다 왜 좋은지 그 이유를 금세 알 수 있다.

우상귀만 보더라도 백이 ABC 중 어디로 침입하든 간에 흑이 안에서 살려주지 않고 백을 밖으로 몰아갈 때 흑◆는 분명히 도움이 된다. 

흑◆의 진가는 따로 있다. 실전에도 나오지만 흑◆는 바로 흑A를 노리고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흑◆는 우변의 폭을 넓히면서 백의 우상귀 침입 또한 방비하며 흑A의 공격까지 엿보는 그야말로,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누에 키워서 번데기도 먹는 '일거삼득' 환장의 수법이다. (여기서 환장이란 너무 좋아 소장, 대장이 꼴딱 뒤집힌다는 뜻으로 쓰였고 결코 속어가 아니라고 우겨봅니다….)

모양에 밝은 기사가 둘 법한 흑◆는 우상귀를 굳히고 백의 우변 침입을 간접 방비한다는 점에서 흑A와 일맥상통하지만, 사실은 흑A와 큰 차이가 있다.

실전처럼 흑A로 두어야 다음 흑B로 백을 압박할 때 흑A와 B가 호응할 수 있다. 한 끗 차이가 천지차이가 될 수 있음이다.

실전진행이다.

다이너마이트를 안고 뛰어든 백1을 적절하게 공격하며 애초에 의도했던 흑20에 안착한 박영훈 9단의 몸짓은 몸을 좌우로 기울여 지그재그로 비행하는 알바트로스의 날갯짓을 보는듯하다.

박영훈 9단은 어린 왕자로서의 면모를 아낌없이 발휘해 이 바둑을 승리로 이끌었고 이젠 후지쯔배에서의 비상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자유와 낭만의 내음이 코끝을 자극하는 '알바트로스의 비상'을 왼쪽 참고도에서도 만날 수 있다. 

흑▲의 비상은 상변의 폭을 키움과 동시에 하변 흑4점에 대해 응원을 보내며 좌우 또한 살핀다.

가만, 그러고 보니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아닌가? 이 바둑은 바로 불멸의 기사 '슈사쿠'가 18세 때 당대 고수 '인세키'와 펼친 대결이다. 당시 '슈사쿠'의 이 수를 본 '인세키'의 귀가 빨개졌다고 해서 '이적(耳赤)의 수'라고 이름 붙여졌고 고금의 3대 묘수로 통함은 많은 기우가 알 것이다.

그냥 중앙을 향해 던져놓은 듯 별거 아닌 것 같은 이 수가 왜 3대 묘수가 되었을까? 슈사쿠의 명성이 그렇게 만든 건 아닐까? 가장 높이 비상하는 알바트로스의 기상이 깃든 이 수는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라는 말도 있듯 판 전체를 굽어보고 있다. 지금의 프로들이야 "이 정도야 뭐"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런 수를 익숙하게 만들어 준 공(功)은 온전히 슈사쿠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콜럼버스의 달걀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알고 나면 쉽지만 그것을 처음 발견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자유와 낭만을 이야기하다 보니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바둑계의 낭만파 '오송생 9단'이 머리를 스친다.

왼쪽 참고도는 철의 수문장 섭위평을 상대로 오송생 9단이 그의 골문을 열어젖힌 회심의 일국으로 오9단의 흑번이다.

흑◆

자유로운 착상과 먼 하늘을 비상하는 낭만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준 오9단의 체취가 물씬 풍기지 않는가?

과거, 수치로 환산될 수 있는 실리에 탐닉했던 박영훈 9단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던 감각을 발견해내 갈고 닦고 있다. 기존의 장점인 계산력과 어린 왕자의 낭만적인 감각을 조화시킨 박영훈 9단의 비상이 저 하늘 어디까지일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