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선 국수 국기 등의 칭호가 생길만큼 양반과 문인들의 필수적인 풍류로 자리 잡았으며 이서구의 기객소전에 따르면 조선 정조 때에 요즘의 프로기사처럼 바둑으로 생계를 꾸리는 전문기사가 나타났는데 평민출신 기사 정운창은 보성에서 한양으로, 한양에서 평양으로 종횡무진하며 기존의 바둑고수들을 물리치고 조선 제일의 국수가 되었다.

당시 호방한 몇몇 양반가에서는 실력이 좋은 기객들을 먹여 살리면서 바둑을 두게 하고 후배들은 그것을 지켜보며 배우게 했다. 때로 큰 대결에서 이름을 얻은 국수는 서로 데려가려고 다툼까지 일기도 했는데 당시 조선제일의 국수 김종귀(김종기라고도 한다)는 한양땅 이대감의 휘하에서 큰 기객이었다.

"뭐라 평양감사 휘하로 자리를 옮기겠다? 하필이면 나하고 견원지간인 그자에게 가겠다고. 김종귀 네가 누구덕분에 국수자리에 앉았는데."

"죄송합니다. 이건 그간의 밥값입니다."

"발칙한 놈! 내 전국을 뒤져서라도 너를 이겨낼 기객을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썩 물러가거라!"

한편, 전라도 보성땅의 시골장터 이름 없는 무명기사에 불과했던 운창은, 어느날 사랑하는 소영이가 빚 때문에 한양으로 팔려갔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운창은 소영을 데려간 사람이 한양에서 바둑 기사들을 거느리는 이대감이라는 말을 듣고 주저 없이 찾아가게 된다.

"내 집에 기객이 될 테니 소영이를 풀어달라?"

"예 나으리댁의 기객이 되어 대국을 치르겠습니다."

"내 집의 기객이 되겠다? 좋다. 김종귀를 이긴다면 즉시 소영이를 풀어주마!"

"예? 김종귀라면 한양 최고의 국수가 아닙니까?"

"이미 평양으로 떠났느니라. 석달 뒤 평양감사가 큰 대회를 열기로 했다. 그 자리에서 반드시 김종귀를 꺾어라!"

과연 석달 뒤 정운창은 김종귀를 이길 수가 있을까? 소영과 운창은 안타깝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운창은 그 길로 길을 떠나 스승을 찾게 되는데...

두달을 헤맨 끝에 가까스로 스승을 만나 한수 배움을 청하게 된다. 오래전 소영의 주막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운창이 홀로 바둑을 연구할 때 만난 전설의 기사가 삭낭자. 그의 스승이었다.

새끼로 꼰 망태기를 들고 전국을 떠돌며 그 안에서 잠을 자곤 해서 삭낭자라 불리는 그를 혹자는 광인이라 하고, 혹자는 화를 피해 숨어사는 양반가의 인재라고도 했는데...

"언제나 한집을 꼭 이기시더니 오늘은 꼭 한집을 져주셨군요."

"져준 것이 아니다. 스승인 내게 굳이 이기려 들지 않았기에 길이 보인 것뿐이다."

삭낭자는 돌을 쓸어담으며 떠날 채비를 한다.

"어디로 가십니까? 전 아직 멀었습니다."

"남은 한달은 그간의 적수들과 겨루어 보거라."

기언(記言)별집에 전하는 삭낭자는 나이를 물으면 언제나 스무 살이라고 대답하였고 고수와 두거나 하수와 두거나 단지 한집만을 이겼으므로, 세상에서 한집 승부가 난 바둑을 가리켜 ‘삭낭자의 바둑’이라 하였다 했다.

새나 짐승이 얼어죽을 만큼 추운 날에도 그는 발가벗은 채 지냈으며, 누가 옷을 주더라도 받지 않는 기인이었다.

한편, 운창은 남은 한달 동안 전국의 내로라하는 기객들을 찾아가 대국을 펼쳐 단숨에 무너뜨렸다. 보성에서 떠오른 정운창의 이름 석자는 삽시간에 한양을 거쳐 국수 김종귀가 있는 평양까지 돌풍을 몰고 올라갔다.

예정된 석달이 지나 운창은 평양감사가 주최한 바둑대회에서 드디어 김종귀와 만나게 되었다.

운창과 대면하기 전 이미 소문을 들어 두려워했던 김종귀는 운창의 적수가 되지 못했고 승부는 운창의 것이 되었다.

"대감마님 김종귀를 꺾었으니 소영이를 풀어주신다는 약조를 지켜주십시요!"

"껄껄껄...지키고 말고...상금인 백금 20냥은 너희들 혼례비용으로 쓰거라. 소영이는 이만 이리 나오거라!"

먼발치에서 대국을 지켜보던 소영은 눈물을 글썽이며 앞에 나서는데 이대감은 말을 잇는다.

"소영이가 시골장터에서 하릴없이 술과 바둑으로 소일하는 너를 안타까워해서 내게 찾아와 부탁을 하였느니라. 마침 나도 김종귀를 이길 기객을 찾고 있었고...과연 정운창 자네는 조선 제일의 국수일세."

(덧글) 윗글은 KBS의 ‘시간여행 역사속으로(종영)’에서 나왔던 '기객소전'의 드라마 내용을 글로 옮긴 것임. 인터넷에서 내용검색을 한 결과...이서구의 ‘자문시하인언’ 속에 실린 ‘기객소전’과 이옥이 지은 ‘정운창전’에서 김종귀와(조희룡이 쓴 호산외기-壺山外記-에는 김종귀(金鍾貴)란 이름으로, 이옥의 정운창전에서는 김종기(金鍾基)란 이름으로 나옴) 정운창의 대결 내용은 전해지며, 기타 내용은 재미상 덧붙인 듯.

이서구의 기객소전 중 정운창 전기는 계명대 김윤조 교수가 발굴했다고함.

또, 글에서 나온 삭낭자는 조선 후기에 김려(金 錤 )가 지은 한문소설 담정유고(捻庭遺藁) 권9 단량패사 (丹良稗史)에 실려 있는 내용으로 운창의 스승이란 얘기도 사실이 아닌 듯.

2005-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