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연휴라 직장인들께서는 이번 추석에 푸념이 많고 고향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한 분이 많았으리라.

하지만, 낙지 이 몸은 몇해 전부터 부모님께서 이른바 역귀성을 하셔서 수원 큰형님 댁에 갔다온 정도니 송구스럽기가 그지없다.

오랜만에 만나 송편도 만들며 이야기꽃을 피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역시 얼마전 벌초하러 고향에서 뵌 부모님의 모습은 그새 또 늙으셔 안타까움도....

간만에 벌어진 내기 윷판으로 가볍게 낙순이와 낙지팀은 5만원 꿀꺽~하고, 뒤이어 벌어진 술판에서 맥주도 꼴깍~하고, 또 뒤에 벌어진 고스톱 대결에서도 그동안 한게임 신맞고로 다져진 낙지의 현란한 신공으로 10만원 낼름~하고 조카들에게 만원씩 뽀쮜를 쥐어준 뒤 "명절엔 처갓집도 다녀와야죠" 하며 줄행랑을 쳤다.

물론 뒤에서 부모님 이하 형님 형수님들은 이구동성으로 줄행랑치는 내게 합창을 했다.

"처가살이 하는 넘이 맨날 보면서 뭘 다녀와!!"

그래도 이건 다른 거다. 민족의 대명절이라지 않은가? 이럴 때일수록 잘해야 한다는 쎈쓰! 지난 몇년간의 처가살이 끝에 온몸으로 깨달은 바였다.

3층으로 올라가서 '아랫층에 사는 낙지넘이라고 넙죽 절하고 나서 사윗감 없었는데 이 몸이 좋찮냐구 설레발을 친후 간단한 선물교환(아니다, 낙지가 일방적으로 드린 거니까) 선물상납의 의례를 거친 후 가벼운 술자리.

그리고....참새가 방앗간은 가끔 피해갈 수 있어도, 낙지는 결코 피해갈 수 없다는 월세바둑판이 거실에 펼쳐졌던 것이다.

지난번 랜선을 뽑아버린 낙지의 가증스런(?) 짓으로 1승을 헌납하신 후 한동안 발길을 끊으셨던 장인어른께서 호구가 제발로, 그것도 선물까지 사들고 기어들어 오는데 어찌 아니 즐겁지 않으셨겠는가?

'호구자원방래니 불역낙호아~!!'

하여간, 그렇게 다시 월세바둑은 시작되었다.

칫수는 넉점. 지난번 낙지가 1승을 챙겼다는 이유로 한점이 줄어들었다.

삼베바지 방귀 새는 것도 아니고 고작 1승 한번 했다고 단박에 한점을 줄여버리시는 장인어른의 가공할 협상력. 나중에 "아버님댁에 보일러 못 놔드립니다" 하고 속으로 외친 후 어쩔 수 없이 바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다섯점에도 안되는 바둑이 넉점으로 줄어버리니...천원에 있던 내 병사 하나가 없어진 빈자리는 너무도 휑해 보였다. 중앙이 허허벌판이었다.

오로바둑의 [나도명강사] 코너의 [아리영™]님이 올려주셨던 상수가 하수 다루는 법을 반상에 그대로 펼쳐 보이시는 장인어른. 바둑공부 지지리도 싫어하는 낙지는 아리영님이 올린 흑의 잘못된 수순대로 정확하게 흘러가고.....

나와서 끊어버리면 낙지의 한 귀탱이 절명의 순간에서 긴급 잔머리 발동!!

"저 아버님...지난번 친구가 순수 한방 생약에 기타 등등 하여간 존거는 다 들어가서 비아그라보다 낫다는 정력제를 보내줬는데 저는 별 필요가 없어서 저녁에 아버님 가져다 드릴께요."

안 끊으셨다. 

일단 정력제로 위기모면. 위기 뒤엔 뭐? 챤스가 아니고 재차 위기 ㅠㅠ

이번엔 우변쪽 병사들이 위험하다. 치중하면 낙지의 약한 기력으로 봐도 숨이 꼴딱꼴딱하는 자리다.

"저 아버님...어제 큰형님댁에서 부모님을 뵈었는데 그새 많이 늙으셨더라고요. 근데 아버님은 날이 갈수록 그리 젊어지세요? 제 소원이 뭔지 아십니까? 아버님처럼 멋지게 나이 드는 게 통일 다음에 두번째라니까요오오오~~"

치중 안하셨다.

잽싸게 병사 하나 보내 보강해서 겨우 숨을 쉬게 만들었더니, 이젠 중앙 말들이 대략 장문이면 삶이 운칠기삼이다.

"저 아버님...올해가 가기 전에 어머님과 여행한번 가셔야죠. 저랑 낙순이가 계획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멋진 데로 제가 한번 힘써 보겠습니다."

장문 안 씌우셨다.

그 이후로도 이어진 낙지의 무수한 "저 아버님...." 신공.

"저 아버님...이제 차 좀 바꾸셔야 할 때가 된 거 같은데요, 올해가 가기 전에 제가....."

"저 아버님... 처남 보증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저 아버님... 건물 페인트 공사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저 아버님... 조훈현 친필 싸인 바둑판 보관해 주십시요. 오늘이 가기 전에 드리겠..."

저 아버님...저 아버님..........아직도 귀에 환청이 들린다.

그렇게 월세바둑은 끝났다. 결과는 어찌 됐냐고?
딱 1집 졌다.

내기 윷판과 고스톱에서 따고 남은 10만원 고스란히 장인어른께 쥐어 드리고, 2층으로 계단을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올해가 안 갔으면 좋겠다." 

手談이 아닌 口談으로도 안되는 걸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