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인어른의 전화

간밤에 장인어른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자네 요즘 바둑만 둔다며?" (☞내 딸 굶겨 죽일라는겨?)

"아,네네네네...."(☞다 큰 지지배가 일러바치기는...)

"그래 바둑은 많이 늘었나?" (☞이 하수야, 둔다고 느냐?)

"아, 네네네네..."(☞재미로 두지 실력 늘라고 두남요?)

"바둑에 너무 빠지지 말게...(☞존말로 할 때 들어!)

"아, 네네네네..."(☞가끔 일도 합니다...헤헤)

"언제 놀러오게, 바둑 한 판 두자고"(☞네 돈 따먹은 지 오래여)

"아, 네네네네..."(☞예전의 제가 아닙니다...흐흐)

"술 담아 놓은 것도 있네...와서 술 한잔도 하고"(☞술 좀 작작 처먹어라)

"아, 네네네네..."(☞사둔 남말 하십니다요)

"그럼 이만 끊네"(☞내 딸 굶기기만 혀봐, 확 쎄려삘껴!)

"아, 네네네네..."(☞산입에 거미줄 칠라굽쇼?)

옛날에 전 우리 아버님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줄 알았습니다. 근데 여자친구 아버지, 즉 장인어른도 장난이 아니드만요.

한창 여자친구와의 연애질에 불꽃을 피우고 싸돌아 다닐 때가 기억납니다. 제 생일이었는데요, 저녁에 둘이 조촐하게 파티를 하고 헤어진 후 밤에 전화통화를 하다보니 또 보고 싶더라고요. 그땐 다 그렇지 않습니까?

살살 여자친구를 꼬드겼지요. 온갖 감언이설과 혹세무민을 첨가하여 뱀 혓바닥으로 마무리를 했지요.

슬그머니 나와서 같이 있다가 새벽에 들어가면 감쪽같다. 뒷일은 내가 책임진다. 같이 있고 싶은 것이지 아무 일도 없다. 걱정마라. 오빠 믿지? 일년에 한번인 생일날이다. 나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 준다는데.

뭐 이런 식으로 집에서 탈출을 시켜서리 새벽녘까지 즐겁게(?!) 놀다가 들여보냈지요.

아침나절에 전화 울리드만요. 예감이 안 좋데요.

"여보세요."

"야 이런 개$#@%$!@$&*$#, 이런 죽일$&*@$%%#$#@"

(매너 등급이 하향 될지 몰라 자세한 표현을 못합니다)

".............."

"너 뭐하는 #$%#$%$#$$#$%%%*&%%$%$#냐!"

".............."

"너 거기 어디야, 당장 쫓아가서 모가지를 확 %#%$%^$#@#$%"

".............."

새벽에 슬그머니 문 열고 집에 들어가다가 현관에 지키고 섰던 장인어른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모진 고문 끝에 제 전화번호를 불고 말았던 여자친구!

갑자기 유관순 누나 내지는 할머니가 무지하게 자랑스럽더군요. 고문한다고 제 전화번호를 불다니요. 나쁜 지지배...놀 땐 좋다더니만...

하여간 장인어른 다혈질이드만요. 근 30분을 혼자 욕하시던데, 우리말의 어휘가 그렇게 다양하고 현란한지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세종대왕 만쉐~

그후론 제가 장인어른 앞에선 걍 꼬랑지 내려 버립니다.

이런 장인어른에게 제가 요즘 바둑에 재미를 붙여 일에 소홀히 한다고 여자친구가 일러 바쳤나 보네요. 하여간 지지배 고자질은...

요즘 워낙 장사도 안되고 해서 바둑 좀 뒀기로서니 그렇게 장인어른 빽 믿고 고자질한다면 나도 한칼 있다 이거야...

난 오로 기우들께 이런 사실을 고자질 하거든! 푸캬캬캬캭~~

덧글1) 장인어른 기력이 기원1급이신데요, 예전에 제가 오로바둑을 소개해 드렸더니 딱 한판 만에 때려치우시더군요.

공교롭게 첫판에 매너불량자를 만나서 욕을 얻어자셨다는군요. 자판이 안되니 같이 욕할 수도 없고 꽤나 열받으셨나 보대요. 뭐 엄한 마우스 하나 아작났대나 뭐래나...모니터였나?

덧글2) 그때 장인어른께 욕한 분 아직도 아이디 기억하고 있답니다. 조심하십쇼~

2003-07-12

2. 거긴 손빼면 안돼

오랜만에 여자친구의 집엘 다녀왔습니다. 결혼한 처지에 네집내집을 구분하는 게 남우세스럽긴 하지만, 원래 제집은 아니잖아요?

우리 장인어른 바둑 무지하게 잘두십니다. 기원에서도 짠1급이시죠.

그렇다고 전국구 강자는 아니시고요, 그래도 단골기원에선 나름대로 적수가 없다고 하시더군요. 물론,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기원은 잘 다니지 않거든요.

처음 여자친구를 만났을 때 제 급수는 사이버상의 10급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장인어른과 대국할 때는 한주먹 까는데 만족하지 않고 입고 있던 옷의 주머니 주머니마다 백돌을 한 움큼씩은 넣어놓고 계가할 때 백집에 뿌려대야 겨우 만방날 것을 두세 방으로 막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이젠 명색이 오로1단 인지라 5점 이상은 깔지 않습니다. 5점으로는 중반으로 넘어가기 이전에 이미 만방의 조짐이 여실히 보이지만, 오로회원 그것도 유료회원의 체면이 있지 5점 이상은 못 깔지요.

하여간 예정된 수순대로 장인어른과 5점으로 대국을 하였습니다.

제 집에도 바둑판은 있지만, 예전 글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바둑판은 때때로 라면 밑받침이 되기에 둥그렇게 탄 자국이 선명하지요. 하지만, 장인어른 바둑판은 성역 그 자체입니다. 예전 모 검사가 쓴 '성역은 없다'란 책이 있지만, 엄연히 성역은 있는 법이지요.

그 질 좋은 바둑판에 흑돌 다섯개를 주섬주섬 올려놓고 머리를 조아리고 대국이 개시되었습니다.

장인어른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여자친구에게는 "술가져와라" 장모님께는 "안주가져와라"를 외치십니다.

커피에겐 담배가 있지만, 바둑에겐 술이 있지요.

그렇게 대국이 이어졌고 결과는 세 방이었습니다. 장인어른께서 봐주셨기에 그 정도로 끝난 것이지요.

"방당 만원씩 삼만원이네~"

아직도 많이 버시는 양반이 꼭 저러신다니까요.

여자친구에게 준비한 봉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많이는 넣지 못했지만, 지도료도 포함하고 술과 안주값에 용돈까지 계산한 액수였습니다.

그리고, 항상 덧붙이는 보험용 멘트를 날렸지요.

"아버님. 저희가 돈을 많이는 벌지 못하지만 매일매일 재밌게 살려고 노력하고 또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대학 중퇴에 좋지 못한 경력도 갖고 있던 저였기에 딸과 함께하는 것을 허락받기까지 힘들었기에 보험은 필수였습니다.

여자친구는 제 세상 만난 듯이 널뛰어 다니고, 한판 더 두자는 장인어른을 말리는 장모님의 단호한 목소리는 아파트 밖을 메아리치고 간만에 먹은 양주에 몸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듯한 그 느낌.

"거기는 손빼면 안돼"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지는 장인어른의 훈수 소리가 아직도 메아리치는 아침입니다.

2002-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