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가까워졌지요.~

현역에서 은퇴한 전직 프로7단 제길할(諸吉轄, 68세) 씨.

바둑만이 전부인 줄 알고 한길을 걸었으며, 눈에 띄진 않았지만 꾸준한 성적을 내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정열을 바친 바둑인생이었다. 그러다보니 바둑을 빼곤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이자 에뜨랑제요 이방인이자 국외자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가 요즘 큰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그 결심이란 바로 다음 달에 있을 총선에 출마하기로 한 것.

'기도보국(棋道報國)'의 기치 아래 바둑을 통한 예와 도의정치를 실현하고 '승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승복할줄 아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평소의 생각을 실천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지난번 대선에서 유권자들의 가슴에 큰 획을 그어버렸던 '불심으로 대동단결'의 국태민안 호국당 김길수 후보처럼 자신도 역시 '바둑으로 일통강호(一統江湖)'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유권자들의 마빡에 흑돌을 한 움큼씩 뿌려댈 자신이 있었던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다.

제길할 씨는 일단 총선에 출마하기로 결정한 후부터 마음이 바빠졌다. 솔직히 기존의 정당에선 공천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무소속으로 나가긴 더욱 싫었던 것이다. 그것은 일천만 바둑팬에 대한 모독이란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일천만 바둑팬의 소속이면 소속였지 왜? 무소속이란 말이던가.

그는 그날부터 바로 창당작업에 돌입했다. 이곳저곳 알아보니 일단 중앙당을 창당하려면 20인 이상의 발기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발기인 20인이라...
발기하는 넘 스무 명만 모으면 되는 거네? 근데 발기하는지 안하는지 어떻게 알지? 껍데기 홀라당 베껴 볼 수두 읍구..거참...'

제길할 씨가 그동안 쌓아놓은 인맥이야 어디 20명뿐이랴.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자신처럼 환갑을 훌쩍 넘긴 연배라는 점에서 고민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쩐다...'

신사 체면에 대놓고 '너 발기냐? 안 발기냐?'하고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우회적으루다가 '요즘 부부금실은 좋고?' 해봐야 실없는 놈 취급받기 십상이겠고...진퇴양난에 사면초가요 첩첩산중이로군...

기도보국과 일통강호의 큰 뜻을 접어야 한단 말인가? 그까짓 발기 때문에?

제길할 씨는 통탄을 했다...통탄을 하다가...하다가...불현듯 떠오르는 생각!

'비아그라(Viagra)'
바이아그라가 맞나?

그는 재빨리 이곳저곳 손을 대 중국 보따리상을 통해 밀수(?)된 비아그라를 구입했다.

푸른 건지 초록인지 하여간 묘한 빛깔을 내며 포커판의 다이아몬드 에이스처럼 생겨먹은 비아그라를 한 알 집어들고 제길할 씨는 꿈에 부풀었다.

너를 통해 기도로 보국하고 강호를 일통하리라!

제길할 씨는 즉시 청첩장? 부고장? 아니 초대장을 돌렸다.

내용인즉슨...

'이래 저래한 취지로 '기도보국 일통강호당(棋道報國 一統江湖黨)' 창당을 위한 발기인 대회를 개최하오니 뜻있는 기우님들께서는 많이 참석하시어 꼭 발기(?)하여 주시길 앙망하옵니다...'

그리고 초대장 안에 비아그라 한 알씩을 넣어놓고, 추신을 이렇게 붙였다.

'참석하시어 발기해 주시는 분께는 한 통씩 더 드립니다. 특히, 발기한 채로 오신 분들은 두 통씩 되겠습니다.'

강서구 내발산동에 우뚝! 서있는 남근빌딩 20층에서 개최된 기도보국 일통강호당은 참석한 200여 명이 일제히 발기한 덕분에 제길할 씨를 대표자로 선임, 성황리에 발기인 대회를 끝마쳤다.

그리고 한달 뒤...

조선 동아 중앙 한겨레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딴지일보 등 유수의 언론매체의 사회면엔 이런 기사가 실려 있었다.

부산경찰청 외사수사대는 20일 성분미상의 중국산 가짜 비아그라를 밀반입해 시중에 유통시킨 혐의(약사법 위반)로 밀매조직 일당 13명 중 국내 총책 김모(49)씨와 중간 판매책인 속칭 '기도보국 일통강호당' 대표 제모(68세)씨와 같은 판매책인 성인용품점 '진동달걀' 업주 유모(36)씨 등 11명을 붙잡아 김씨와 제씨 등 10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특히 중간 밀매책인 제모씨는 비아그라 판매대금을 유령정당을 창당한 후 후원금으로 회계처리한 혐의를 받고 있다.

한편, 발기인 대회에 참석하여 비아그라 성분인 구연산 실데나필이 과다함유된 중국산 가짜비아그라를 복용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현재까지도 발기가 안풀리는 등 심각한 후유증을 얻었다...

棋道報國 一統江湖黨 代表 제길할(諸吉轄) 씨...

밀매조직의 허위진술에 억울한 누명을 쓴 채 기도보국과 일통강호라는 평생의 숙원을 접어야 하는 신세가 돼버린 그.

제길할 씨는 유치장 한구석에서 이렇게 소리치고 있을 뿐이었다.

"제기랄~~~~"

2003-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