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Warning!> 영화 '친구'를 보신 분만 읽으세요.
이글은 나의 아주 깊은 추억 속에 자리 잡은, 오래두고 가깝게 사귄 벗에 대한 이야기이다.
푸르디 푸른 어린시절.
그 무엇보다 바둑을 더 좋아하던 세 친구가 있었다.
프로기사를 아버지로 둔 거칠지만 의리가 있었던 준석.
가난한 장의사의 아들로 우리 주변에서만 돌던 내성적인 동수.
그리고 화목한 가정에서 티 없이 자란 모범생인 나 상택.
모범생이었던 나와는 달리 둘은 학교보단 동네 기원에 가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또, 주먹도 곧잘 쓰는 등 반항적이기도 했다.
준석과 동수는 바둑으로나 주먹으로나 라이벌이긴 했지만, 선을 접히는 바둑과 펀치의 강도와 세기 등 그 어느 쪽으로도 동수는 준석을 넘어설 순 없었다.
그들과 바둑을 함께 둘 때 자주 이런 얘길 했었다.
"니들 조남철하고 조훈현하고 알까기 하면 누가 이길 것 같노?"
"조남철이다. 바둑하면 조남철 아이가. 알까기도 바둑판에서 바둑알로 하는데 조남철 따라갈 수 있나? 조훈현이는 안즉 멀었다. 준석아 내말이 맞제?"
"동수 일마야. 그거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기다. 조훈현이 글마는 판세가 쪼매만 불리해지모 흔들어 삔다 아이가. 흔들기 모르나? 흔들기. 상대가 깔 때 고마 쎼리 흔들어 삐면 무슨 재주로 지가 까겠노? 조훈현이가 마 최곤기라."
한번은 둘이 기원에서 노닥거리다 담임선생님에게 붙들려 학교로 잡혀온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볼떼기를 한손으로 쥐어잡고 마구 흔들어 댔다.
"동수, 네 아버지 뭐하시노?"
"의삽니더."
"의사? 그래 집에 돈 좀 있다고 지금 유세하는기가?"
퍽~!
"그게 아이고, 장의산데예."
"그래 니 아버지 죽은 사람 염해주며 힘들게 사시는데 네는 이게 뭐꼬?"
퍽~!
"준석이 일마 일로 와라."
"준석이 니 아버지 뭐하시노?"
"기삽니다."
"기사? 그래 니 아버지는 운전하시느라 쎄빠지게 핸들잡고 고생하시는데 니는 이기 뭐꼬?"
퍽~!
"바둑기산데예."
"그래 니 아버지 바둑기사라서 좋겠다~"
퍽~!
"누가 좋다고 했습니까? 쓰~동수야 짐 싸서 가자."
그렇게 그 둘은 그 길로 학교를 때려쳤다.
그후 준석이가 집으로 나를 초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의 첫사랑, 진숙을 알게 됐다.
"친구야~ 여기 딸내미들 보이나? 야들이 그 공포의 7목회(七目會), 일명 레인보우! 아이가. 맘에 드는아 하나 골라봐라."
첫눈에 들어오던 진숙과 둘만 남겨진 방에서 내가 서툰 기타 솜씨를 자랑하며 '연가'를 불렀을 때, 그녀는 다가와 내 남방 앞주머니에 있는 손수건을 꺼내며 이렇게 말했었다.
"니 억쑤로 순진하네~. 오늘은 오목만 둬주께~"
나와 진숙이 오붓하게 오목을 두고 있었을 때, 은근히 진숙을 찜해뒀었던 동수는 준석과 화장실에서 다툼이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 그게 둘 사이의 운명을 갈라놓는 단초가 됐을 거라는 느낌도 든다.
"준석아? 왜 진숙이가 상택이하고 같이 있노?"
"친구 아이가"
"그럼 내는? 내는 니 시다바리가?"
"죽고 싶나~!"
"니는 조남철하고 조훈현하고 알까기 하면 누가 이길 것 같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바둑으로 한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최고가 되겠다던 준석이는 프로기사인 아버지의 소개로 입단의 요람인 ‘권을용 바둑도장’에서 수학하며 프로의 꿈을 불태우고 있었고, 동수는 끝내 준석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동네기원을 전전하며 내기와 사기에 찌든 마귀가 되어가고 있었다.
미국으로 떠난 이후엔 난 친구들과 연락조차 하지 못했다.
5년쯤 후엔가? 나는 둘의 소식을 가끔 머리 식히려고 들어오는 오로바둑의 대기창에서 수근거리는 사람들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착실히 도장에서 실력을 쌓아 입단대회에 나온 준석과, 준석이 입단대회에 출전한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폐인 같은 마귀생활을 청산하고 오직 준석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온 동수.
체계적으로 공부한 준석과 재야에서 수많은 현금이 오간 판에서 잡초처럼 살았던 동수, 둘 다 결선에 진출하긴 어렵지 않았다.
결선.
7승1패로 다른 두 명과 함께 선두였던 준석과, 준석이 이긴 모든 상대에게 100수 이전에 투석을 했던 1승7패의 동수. 동수로서는 결선에 진출한 목표가 준석을 탈락시키기 위함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준석이 자칫 동수에게 패할 경우, 같은 7승1패를 달리고 있는 다른 두 명이 쉬운 상대만 남겨놓은 상태였기에 자칫 3위로 밀려 내년 시드나 확보한 채 올해 입단이 물건너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둘은 그렇게 바둑판을 놓고 마주 앉았다.
처음 입을 연 것은 준석이였다.
"동수니 나 떨어뜨릴라고 왔다제? 마이 컸네 동수!"
"원래 바둑돌 잡은 손은 내가 더 컸다 아이가~"
"동수야. 여기서 기권하고 오로바둑에서 7단 달고 베팅머니나 챙겨라."
"니가 가라. 오로바둑! 아직도 내가 니 시다바리가?"
대사와 요도가 초반정석을 이미 중반으로 이끌었고, 중반 이후엔 바둑만이 아닌 둘만의 힘겨루기가 팽팽했다.
판은 어느덧 종반으로 들어섰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판세는 우변에서 중앙을 휘감아 얽힌 두 사람의 대마 패싸움에서 결판이 나게 되는 상황으로 이르렀다. 각생인 빅의 길을 외면하고 장렬히 패로 들어간 동수의 선택으로 관전하는 사람조차 그 결과를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
다음날 동수는 본선 대국장인 홍익동 한국기원 근처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자신이 준석과의 대국에서 잡은 흑돌을 소주와 함께 모두 집어
삼킨 채...
서로가 만패불청인 상황에서, 자체 팻감이 한개 더 많았던 준석의 극적인 승리로 결정난 후의 일이었다.
오래두고 가까이 사귄 나의 벗들. 준석과 동수.
난 귀국하고도 준석을 찾지 않았다. 그를 보면 동수가 생각나고, 나를 보면 그 또한 동수를 기억하겠기에.
하지만, 꼭 한번은 보고 싶다. 그리고 묻고 싶다.
"니 이창호 하고 이세돌하고 알까기 하면 누가 이길꺼 같노?"
덧글) 동수가 그 많은 흑돌을 집어 삼킨 후, 단 한개 팻감이 모자라 1의1에 놓고 불계를 선언했던 그 최후의 흑돌을 손에 쥔 채 준석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준석아 네 선물 잘 받았다. 이제 마지막 남은 하나까지 내 몸에 넣고 갈끼다. 미안하고 고맙데이..."
준석은 직감할 수 있었다. 그가 몸 안에 넣고 가려는 자신의 선물이 무엇인지를...
준석은 전화기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동수야.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2003-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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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돼지
술익는향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