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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고향을 여행하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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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고향을 여행하다 (4)
2017-11-03     프린트스크랩
▲ 역사의 한페이지로 남은 1979년 6월 23일 전영선과 장수영의 대국기보.
 
박(博)과 혁(弈) 기(棋)와 박혁(博弈) 그리고 위기(圍棋) 등으로 통일되지 않고 각종 기록과 유물등에 파편적으로 전해오던 바둑이 '위기'라는 비교적 통일된 언어로 굳어진 시대는 중국의 위촉오 삼국시대로 접어든 시점이다.  이 때에 오면 바둑, 저포 등 반상게임의 유행은 급기야 사회의 골칫거리가 될 정도다.

'포박자(抱朴子)'는 바둑 저포 때문에 생업이 파괴될 정도다( 惑有圍碁樗蒲而廢政務者矣)라는 기록을 남긴다. 포박자는 동진의 갈홍(284-343)이 지은 책이다. 개인 저작물이 아닌  '사서(史書)'라는 공인된 출판물에 바둑이 등장하는 것은 남북조시대지만 널리 알려진 내용은 기대조(碁待詔)다.

우리는 그동안  당나라 현종이 궁안에 설치했다는 기대조(碁待詔)를 통치계급이 바둑을 기예로 인정하고 대우했던 가장 유력한 사건으로 인식했다. 당나라 현종은 안록산의 난 등으로 위기도 있었으나 문화 부분과 외교 전략에 밝아 신라, 일본 등 사해 밖의 먼 나라들과도 소통했고 그 소통의 과정에 신라의 '박구', 일본의 '현소' 등 바둑고수들의 활약상도 나타난다.


'기대조'는 중국 황제의 지근 거리에 설치되었고 엄선한 바둑고수들의 근무처다. 유명한 바둑 고수 ' 왕적신' 등이 이곳 출신이다. 그러나 중국역사는 기대조보다 3백년 앞선 위기주읍(圍碁州邑)을 기록한다.


명제는 바둑을 좋아 했다. (관청)위기주읍을 설치하고 건안 왕휴인을 대중정(관직)에 태자우솔 심발과 팽성승 왕항 4인을 소중정(관직)에 임명하고 조정 저수장과 부초지를 정정방문(관직)에  임명했다. -남사 우원전-


남사는 남북조시대의 역사서로 송명제(465-472)가 바둑을 좋아해 궁안에 바둑고수들을 모아놓고 녹봉을 내리며 대우를 하는 한편 관서 이름으로 '위기주읍'이라는 근사한 호칭을 붙여준다. 바둑 고수들을 모아 놓은 관청 정도겠다. '기대조'보다 생동감이 있고 은유의 예술성까지 느껴지는 이름이라 여겨진다. 

위기주읍은 바둑을 특별히 좋아한 한 통치자의 치기(?)어린 일회성 통치에 그치지 않고 무제 ,고제 등 여러 황제를 거치며 중국 고대 바둑사의 등걸이자 옹이로 존재한다. '저사장(楮思壯)'이나 '부초지(傅椘之)' 등 고수들의 바둑담이 생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훗날 바둑평론가 '마원중'이 말한 일품 왕항, 이품 저사장이라 했던 그 사람들이다.


황제 고제(高帝)는 왕항과 저사장의 대국을 지켜보다가 누군가가 회계태수 '양현보'가 고수라고 하자 곧바로 저사장을 회계로 출장 보내어 대국케 한 후 그 기보를 가져오게 하여 복기를 감상할 정도였다. 이 장면은  위기주읍과 소속 기사들의 활약상이다. 특히 위기주읍의 관원인 '왕역(王域)'은 어떤 사건에 연류되어 사약이 내려오자 두던 바둑을 모두 마치고 사약을 받아마시는 호기를 보여주어 역사를 읽는 재미를 주기도 한다.

이 시대 '제윤(諸胤)'이라는 절대고수가 있었다. 여섯 살에 바둑에 입문하여 이십 세에 바둑계에서 천하무적으로 군림한다. 송문제(424-453) 당시 제윤은 천하오절(天下五絶) 중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그러나 제윤은 일가친척 중 한 사람이 반역에 연류되어 연좌로 사형을 당한다.


'사혁'이 평가한 '남북조시대의 '육탐미(陸探微)'가 일품이고 '고개지'가 삼품이고 '왕항(王抗)'이 이품이다' 할 정도로 바둑인의 성가는 높았다. 육탐미와 고개지는 남북조시대의 가장 유명한 화가다. 이들과  바둑 고수 왕항이 동격으로 대우를 받은 것이다. 이런 풍토에서 제윤의 재주는 빛나는 것이었다. 재상 '하상지'는 제윤의 재주는 하늘이 내렸기에 그 재주를 대를 이어야 한다며 사면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도로에 그쳤고 세상은 제윤의 끊어진 재주를 안타까워한다.


남북조시대 바둑은 양무제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양무제는 문화와 불교 등에 전방위로 관심이 많은 인물로 바둑에도 취미가 있어 당대의 고수 280명의 기력을 측정케 하고 '기세'니 '기법'이니 하는 바둑책을 출간케 한다.  남북조시대  ' 위기'는 바둑의 대명사가 된다. 이런 바둑문화는 돈황의 사막과  동방의 백제와 바다 건너 부상(浮桑)에까지 보급되어 후대의 바둑 융성의 토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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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행 |  2017-11-03 오전 6:21:4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이번 년말 유성 우리집에서 한번 봅시다^^ 바둑은 신경 끄고 그리고 이번 낸 책 잘 받았어요^^  
자객행 설수외사 반쪽을 갖고있다니 복사좀 해 주쇼^^
소석대산 |  2017-11-03 오전 6:58:53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위진남북조 시대에 벌써 바둑이 유행했던 모양이군요.
그 당시에도 19로 바둑판에 4점을 미리 배치하고서 대국했을까요?
(평소 이청님 글을 읽을 때에 한글만으로는 의미전달이 잘 안돼 한자를 괄호로 병기해주셨
으면 싶을 때가 종종 있었지요. 오늘 올리신 글은 그리해주셔서인지 눈에 잘 들어옵니다)
 
李靑 확실치 않지만 그런듯합니다.
李靑 |  2017-11-03 오전 7:23:16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行.
한가한 모양^^ 설수외사 하권 맞는거 갈터 상권과 마추어보면 확실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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