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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바둑을 두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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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바둑을 두었나
2016-06-22     프린트스크랩
▲ 중국의 바둑을 기록한 연행록의 한 페이지. 좌측에 중앙에 한점을 놓고 두는 방식의 조선과 똑같다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고유한 전승바둑인 순장바둑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 그동안 조금씩 모아온 순장바둑에 대한 자료와 여러 곳에 기고를 했던 글들을 모아 다시 한번 검토와 복기를 하면서 여름을 맞이하고 있다. 아래의 글이 필자가 우리 고유의 바둑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던 때의 첫번째 글이다.

 

 

조선의 외교는 거의 중국과 일본에 치중한다. 사은사 성절사 등의 사신단으로 대 중국과 외교관계를 유지하던 조선은 일본과는 조선통신사로 연속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조선은 특히 중국과의 외교 계를 중요시했다. 조선은 거의 700회에 걸쳐 중국(. )과 사신단을 교환한다.

사신단은 정사 부사 서장관 등 고위 관원을 중심으로 거의 500여 명의 대규모 인원이 동원되어 출발부터 귀국까지 전 과정이 철저하게 통제되고 관리된다. 사신단은 중국을 다녀 온 후 연행록이란 보고서를 만들어 조정에 제출해야 했다. 연행록은 대체로 서장관이 담당했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쓰는 경우도 있었다.

 

작성된 연행록은 조정에 보고된 것과 필자 개인이 소장하는 등 이본이 나뉘어져 있었고 조정은 개인이 기록하는 연행록을 불허하여 불시에 개인 소장품을 검색까지 하며 대 중국의 정보를 관리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7백여 편의 연행록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박지원의 연행록일 것이다.

 



▲ 연행록의 한 페이지.


연행록은 대중국의 정치사는 물론 문화, 문물, 풍속 등을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사회상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연행록 중에서 바둑을 기록한 연행록이 10여 종이 있는데 그중 김창집, 김경선, 서유중, 박지원 등이다. 이들은 숙종에서 순조 당시 연경(북경)을 다녀온 사람들로 이들의 취재 속에 당시 연경지역의 바둑이 채록되어 있어 당 시대의 바둑을 연구할 수 있는 단초가 되어 준다.


그동안 우리는 조선에는 조선 고유의 바둑(순장)이 있었고 중국과는 형식이 다른 바둑을 두었다고 알아왔다. 이것은 중국에 전하는 명청대의 기보와 조선에 전하는 20세기 초의 기보(순장기보 47국이 전해온-안영희 님의 연구)가 다르고 청나라 말기의 책 '위기고적보'에 조선의 바둑은 청과 다르다는 기록 때문이다.


명청대의 기보는 흑백이 각기 두 점씩 각 화점을 차지하고 두는 식의 기보가 주류다. 우리(순장)식 바둑은 화점선을 중심으로 흑백이 8점씩을 차지하고 두는 형식이다. 순장바둑은 사실 한자마저도 이렇게 표기한다, 특정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것이다. 20세기 초에 발간된 조선 동아 등 신문에 수록된 기보가 별다른 연구와 검토 없이 우리 고유의 바둑이라는 인식으로 고착화한 것이다.


그러나 18세기~19세기 연경을 다녀온 사신들의 눈은 이 바둑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한다. 1712년 숙종 38년에 연경을 다녀온 '김창업'은 그의 연행록에서 이렇게 중국바둑을 보고하고 있다.


- 어느집에 묵게 되었다. 그 집에 바둑판이 있어 주인과 바둑을 두게 되었는데 우리식과 같았다. 다만 초두에 배자가 없는 것이 달랐다.


이 기록은 읽는 이의 해석에 따라 약간의 편차가 있을 수 있다. 초두의 배자라는 말이 그것이다. (정수현 님의 한국바둑사에는 이 점을 들어 중국식과 조선식의 바둑을 구별했다.) 김창업은 이후에도 3회에 걸쳐 연경을 더 다녀온다. 초두(初斗)와 배자(配子)의 해석을 차치 하고 김창업 이후 1세기 후에 연경을 다시 다녀온 김경선(金景善)은 '유관별록'에서 김창업이 연경에서 두었던 바둑을 다시 증언한다.


- 바둑두는 법은 오직 중앙에 한점을 놓는 것만 다를 뿐 나머지는 우리와 똑같다.


연경에서 중국의 지식인들과의 교류에 정신이 팔려 있던 김창업과는 다르게 김경선은 중국 여항의 각종 기록을 빼곡히 채록하고 있다. 마술 점술 연극 등 거의 모든 문화상을 기록한 김경선은 장기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 장기 두는 것은 우리와 비슷하다. 다만 장이 모(方)로 가지 못하고 사(士)가 바로 가지 못하고 차와 포의 사용법이 다르다.


김경선이 본 장기의 모습은 매우 정확하다. 오늘날에도 중국과 한국의 장기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런 세세하고도 정확한 김경선이 중국바둑이 우리와 거의 같다고 적고 있다.


이 점은 '서유중'의 기록에도 대동소이하다. 20세기초 조선의 바둑을 취재한 미국인 '슈투어드컬린'은 당시 조선의 장기가 일본 중국과 매우 다르다고 기록하며 조선의 바둑에 대한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것도 조선 중국의 바둑의 형식이 별다르지 않다고 본 탓이다. 박지원은 여정에서 여러번 바둑을 언급하고 있으나 모두 일행들과의 이야기다.



이런 기록들을 유추하면 당시 조선 중국에는 4배자, 16배자(순장식이라 하는) 바둑의 형식이 두어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조선에 특별히 16배자 형식이 유행했던 것인지는 모른다. 숙종실록에는 청나라 사신들이 한양에 와 있을 때 영접도감에서 수시로 조선의 고수들과 바둑 기물을 들여달라는 요구가 나온다. 영접도감에 조선의 고수들이 불려들어가 중국의 사신들과 바둑을 두었다면 어떤 형식의 바둑을 두었을까.


오늘날 우리는 순장바둑이라는 유령(?)에 홀려 있다. 순장바둑이 우리의 고유의 것이란 믿음과 자부도 중요하지만 순장바둑이 과연 우리만의 것이고 우리만의 전통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깊은 연구와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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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메미르 |  2016-06-22 오전 12:53:57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잘 보았습니다.  
orobet1915 |  2016-06-22 오전 4:33:53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순장바둑 만이 우리의 고유 바둑이 아니라...<4배자> <6배자><16배자> 형식의 바둑이 모두 두어 지고 있었는데...그중 <16배자>바둑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유행하게 되어서 우리바둑은 <16배자 순장바둑이다>라고 잘못 인식 되었다 는 내용으로 이해 했습니다.  
orobet1915 저도 그런 해석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만...다만 고대 바둑판에도 16점의 화점이 나타나는 것이 이상합니다. 배자를 위한 방점이 아니라면 구태여 필요없는 점을 바둑판 위에 새겨 넣은 이유가 무엇일 까요? 단순히 바둑 열의 숫자를 헤아라기 쉽게 하기 위함 이었을 까요? 좀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李靑 김달수선생은 16개의 화점이 윷과 저포의 흔적이다 그런 연구를 하시더군요^^
선재동자 |  2016-06-22 오후 6:40:03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순장바둑은 사실 한자마저도 이렇게 표기한다, 특정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됩니다.  
李靑 順將 巡將 順丈 巡丈인지요^^;;
하이디77 순장의 한자 표기는 이렇게 한다라고 특정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순장바둑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지요.
18센티 |  2016-06-23 오전 10:18:39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그럼 박지원의 열하일기도 연행록인가요??  
李靑 을병연행록을 남긴분이 박지원선생이죠. 연행록의 본류에서 다소 색다르게 쓴 것이 열하일기라고 보면 될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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