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하루만큼은 다들 바둑돌을 놓고 태안반도로 달려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검은 눈물’을 닦았다.
 

조훈현 9단, 최철한 9단을 비롯한 ‘국수의 손’이 원유 유출이란 날벼락에 망연자실한 서해안을 찾아 기름 방제에 나섰다. 서산시에서 40여 분이나 더 달려간 태안군 원북면 신두리 해수욕장. 고현정이 주연한 ‘해변의 여인’ 같은 영화나 방송 드라마의 촬영지로 익히 알려진 바로 그곳이다. 드넓은 사구(砂丘)와 백사장. 가없이 펼쳐진 갯벌. 그러나 거기엔 비릿한 날것들이 사라진 죽음의 땅이었다.

닷새 전, 한국기원 이판진 홍보부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전 국민이 나서 서해 기름 유출 방제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이때, 한국기원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바둑계 차원에서 자원봉사를 가기로 했으니 사이버오로에서도 적극 참가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앞뒤 잴 이유가 없었다.

사실 좀 놀랐다. 사회적인 관심사에 한국기원이 이처럼 신속하게, 적극적으로 움직인 예가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필자의 기억력에 문제가 있지 않다면, 가령 성금이나 개인 후원 혹은 자원봉사로 성의를 표시한 경우는 왕왕 있었어도 전 바둑계 차원에서 이렇듯 작정하고 대규모 봉사활동에 나선 것은 내가 바둑계에 몸담은 20여 년간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우리 바둑계의 사회의식과 참여도가 높아졌다는 얘기일 테고, 바둑이 오랫동안 국민에게 사랑을 받아왔던 만큼 공적 책임감도 덩달아 느끼고 있다는 표증 아닐까.

오전 9시 한국기원에 집결해 전세버스 2대에 나눠 타고 서해안으로 출발했다. 한국기원 소속 프로기사(25명)와 사무국 직원, 사이버오로, 스카이바둑, 대한초등연맹, 여성연맹, 명지대바둑학과, 아마모임 청아모와 서산시에서 바둑교실을 하고 있는 현지 터줏대감 최기남 원장 부부까지 합세한 71명이 신두리 해변에서 구슬땀을 흘렸다. 한국기원은 비닐 우의며 마스크, 장화, 고무장갑을 미리 준비했고 도시락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비 일체를 댔다. 넉넉지 않은 한국기원의 살림살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필자이기에, 고통받고 있는 현지 주민에게 조금이라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세심히 신경쓴 마음씀씀이는 기실 수백만 원의 경비 그 이상 몇 곱절로 다가왔다.

오후에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동참해 준 ‘바둑황제’ 조훈현 9단과 부인 정미화 여사가 고마웠다. 솔직히 고백하면, 그래도 직업이 바둑기자인지라 필자는 내심 유명 기사가 단 한명도 동행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명색이 바둑계 차원의 자원봉사인데 간판스타 한두 명쯤은 얼굴을 내밀어야 체면이 서지 않겠느냐는 속물근성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이창호, 이세돌 9단도 함께 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꽉 짜인 스케줄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고 다행이 조훈현 9단이 선뜻 나서주었다. 조9단의 동참사(辭)는 가히 황제다웠다. 

“오후에 선약이 있어 끝까지 함께 하지는 못하겠지만 1시간이라도 일하다 오겠다. 나야 이제는 시간이 널널(?) 하잖아? ^^ ”

한상열 한국기원 사무총장과 조대현 기사회장, 박종열 5단, 김수장, 김승준 9단 등 중견기사와 최철한, 양건 9단, 온소진 4단을 위시한 젊은 기사들. 여기에 이민진 5단, 김효정 2단을 비롯한 여성기사에서 갓 입단한 조미경, 류동완 초단 같은 새내기들도 기꺼이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이날 필자의 가슴이 가장 짠했던 순간은, 키 큰 젊은이들 숲에 묻혀 보일락 말락 마치 파고에 오르내리는 부표처럼 드러내던 키 작고 백발성성한 윤종섭 3단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다. 1973년 입단해 기사생활 35년 간 무명기사로 살아온 그였고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는, 이제는 원로기사 대접을 받을 군번(?)이었기에 솔직히 그의 자원은  기대하지 않았던 터였다.

뜻밖인 만큼 더 놀랍고 감동했다. 생각해 보면 이러한 생각 또한 그간 스타들에게만 눈길을 돌리고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던 필자의 속물근성이 빚어낸 한 조각 단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있는 듯 없는 듯 산그늘 같기만 했던 이 무명기사가 그 어떤 유명기사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거대해 보였다. 봉사활동에 유명기사들의 비마행마만을 잔뜩 기대했던 내 자신이 바위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원유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오후 5시 무렵, 등뒤로 서서히 낙조를 드리우며 서해가 갯벌의 치맛단에 조금씩 밀물을 적시기 시작한다. 자연이 사람을 물리는 시간. 자원봉사들이 하나 둘 떠난 갯벌엔 한국기원과 행복나눔재단의 자원봉사단만이 남아 마무리를 한다. 기름 때 닦아낸 걸레와 원유 머금은 흡착포를 잔뜩 담은 마대들을 뭍으로 들어 나르는데, 문제는 이 속에 타르 범벅인 돌덩이가 몇 개씩 들어 있다는 것. 자연 젊은이들의 입에서 해조음 같은 쇳소리가 쏴쏴 쏟아져 나온다. 통풍되지 않는 우의 탓에 전신이 땀투성이다.

일간지 바둑담당 기자로 유일하게 동행한 스포츠칸의 엄민용 기자. 이 양반은 바둑계 인사들이 소풍을 가는 줄 알고 속아서 따라왔다고 너스레(?)를 떨더니, 사십 중반의 나이임에도 젊은이들에 조금도 밀리지 않고 끝까지 ‘노가다’를 마치고선 이렇게 공배를 메운다. “어, 오랜만에 몸 한번 풀었네.”

그는 지금껏 필자가 만나본 일간지 바둑담당 기자 가운데 단연 최고로 멋진 기자다. 기사 한 줄을 건지기 위해 ‘위장 자원(?)’한 기자라면 저렇게까지 몸을 던질 필요가 없다. 자원 봉사를 위해 오히려 회사에 취재 핑계를 대고 ‘위장 출장’온 것임에 틀림없다. 늦은 밤 한국기원에 돌아와서도 젊은 친구들을 저인망 훑듯 맥주 집으로 우르르 끌고 간 이도 바로 엄기자다.

기사회장 조대현 9단과 잠시 나눈 얘기가 밀물처럼 가슴을 꽉 채운 채 아직도 찰랑댄다.
“프로기사들도 1% 사랑나눔 같은 걸 해보고 싶어요. 꼭 대국료의 1%가 아니더라도 대국료를 수령할 때 세금을 떼고 나면 우수리 돈이 있죠. 이걸 기부하는 거죠.”

문득 상상해 본다. 농구 선수가 3점 슛을 한 개씩 터뜨릴 때마다, 배구 선수가 스파이크를 하나씩 꽂을 때마다 일정 소액을 적립하는 것처럼 우리의 바둑스타들도 1승을 거둘 때마다 1만원씩 적립하여 기부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우리 유명 스타들도 남모르게 선행을 제법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있으나, 우리도 이제 이런 정도는 대놓고 해도 되지 않을까. 어디 욘사마처럼 몇 억씩 내놓아야만 맛인가.

평일인 데도 귀경길은 무척 막혔다. 버스 속에서 명지대 바둑학과 학생들이 연신 까르르 터뜨리는 웃음에는 피곤끼가 조금도 묻어 있지 않다. 그래, 저 나이에는 살짝 건들기만 해도 간지러움을 참지 못해 터뜨리는 웃음처럼 나도 한때 주체 못할 청춘이 있었지. 귓전에 설핏 들리는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참으로 싱그럽고 또한 대견하다.

“우리 조만간 신두리로 MT 한번 올까? 1박 2일 코스로 자원봉사도 겸해서 말야.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