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담감과 자신감. 승부사에겐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지옥과 천국을 가르는 이것은 역설(逆說)적이게도 백지 한 장 차이다. 상대가 세다고 부담을 가지면 바둑이 나쁘지 않아도 왠지 불안하다. 그래서 서두르다 그르친다. 반대로 자신감이 있으면 불리해도 뒤집을 수 있다는 여유를 주고, 기회를 잡게 한다.

한상훈이 국내 톱기사들과 붙어도 한번 해볼만하다는 자신감을 가진 계기는 지난해 봄철 41회 왕위전에서 조한승 九단(8강전)과 박영훈 九단(4강전)을 연파하고 나서부터라고 한다.    

프로야구에 ‘2년차 징크스'라는 것이 있다. 입단 첫해엔 펄펄 날던 선수가 2년째엔 죽을 쑤는 현상을 말하는데 바둑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많다. 갓 입단했을 땐 큰 목표를 하나 이뤘다는 생각에 사기도 충천하고 의욕도 왕성해 기세가 하늘을 찌른다. 그 누구와 붙어도 부담 없이 둘 수 있는 시기이기에 가파른 성적을 내며 이목을 집중시키는 1년차 햇병아리를 종종 보게 된다.

프로바둑계에선 입단 직후 初단 시절을 “가장 날이 시퍼렇게 서 있을 때”라고 한다. 수능 끝난 날 해방감에 젖은 입시생들과 시비(?) 붙어 좋을 게 없듯 이때는 고삐 풀린 망아지의 뒷발질에 채이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시기는 어디까지나 범에게 호된 맛을 보지 않았을 때까지이다. 한두 번 승부세계의 쓴맛을 보게 되고 비로소 무서운 범의 존재를 알게 되면 급전직하(急轉直下)하는 패턴을 보인다.

가까운 예로, 2002년 입단 79일 만에 삼성화재배 본선에 진출해 ‘최단기간 세계대회 본선진출' 기록을 세운 박진솔 初단(현 三단)이 대표적인 입단 1년차 스타에서 2년차 징크스에 운 기사다. 이후 박진솔 三단은 이렇다할 활약을 전혀 보이지 못하고 있다.

성적을 제법 낸 기사들에게서도 이러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입단 105일 만에 LG배 본선과 기성전 도전자결정전(대 조훈현)에 오른 윤준상 初단(현 六단)도 입단 직후엔 펄펄 날며 ‘대형 신인 탄생'에 가슴 설레게 했으나 이후 기대에 미치지 못하다가 5년이나 지나서야 이창호 九단을 꺾고 국수에 오르며 존재를 다시 알렸다. 

입단하자마자 신인왕을 거머쥔 한상훈 二 단. 초단으로 LG배 세계기왕전과 삼성화재배 세계오픈 양 대회 8강에 오른 것은 물론 세계대회 결승에 진출한 것은 바둑사상 초유의 일로 2007년 바둑계 최대의 히트 상품이다.

한상훈은 반짝스타는 되지 않을 것

한상훈도 이 전철을 밟을까. 이번 LG배 도쿄 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한상훈의 ‘初단 돌풍'을 바라보는 바둑계의 시각은 다소 ‘거품이 낀 것 아니냐'는 쪽이었다.

프로바둑 데뷔 무대였던 2007년 봄 41회 왕위전에서 조한승 九단(8강전)과 박영훈 九단(4강전)을 연파하고, 6월 12회 LG배 본선16강에서 구리(古力) 九단을 격파하는 등 상위 랭커 두세 명을 이기긴 했으나 대진운이 따른 측면도 있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바둑이 아직 여물지 않은 구석이 뚜렷했다. 하지만 이어진 9월 12회 삼성화재배에서 마 샤오춘 九단에 이어 16강전에서 이창호 九단마저 침몰시키자 달리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11월 도쿄에서 LG배 결승에 진출한 사건은 의구심을 걷어내는 결정타가 되었다.

한상훈 初단이 삼성화재배에서 이창호 九단을 격침한 직후인 지난해 9월 중순, 최규병 九단에게 한상훈의 바둑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솔직히 처음엔 의심했다. 그러나 계속 성적을 내면서 의욕과 자신감이 붙으며 빠른 속도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영훈과의 삼성화재배 8강을 지켜봐야겠지만 현재까지는 상당히 고무적이다. 대기만성형의 기사다.

두터우면서도 힘이 좋고 이를 잘 활용하는 인내력 강한, 초기 이창호 스타일과 비슷한 바둑이다. 이런 스타일이 오래 가기도 하지만 일찍 죽기도 하니 지켜봐야 할 것이다.

고무적인 것은, 아직 속기 스타일에 물들기 전에 긴 승부에서 성적을 낸다는 점이다. 속기전에서 먼저 두각을 보인 이영구나 강동윤과는 반대 조류다. 이들에 견주면 한상훈의 바둑이 보여주고 있는 양상은 더 정통파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규병 九단은 삼성화재배에서 성적을 내면 오래 갈 것이라며 10월 박영훈과의 8강전 결과를 주목했지만, 졌다. 하지만 한달 뒤 LG배에서는 류징(劉菁) 八단과 온소진 四단을 꺾으며 ‘初단 돌풍을 태풍'으로 이어갔다.

2007년 6월, 12회 LG배 세계기왕전 16강에서 중국 랭킹1위 구리를 잡는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것은 서곡에 불과했다.

전대미문(前代未聞)의 初단 결승진출! 생애 최초의 결승진출!
비록 LG배가 병역면제 혜택이 주어지는 기전은 아니지만 근래 폐지된 동양증권배 대신 국내 주최 세계대회를 넣어야한다는 요구가 거센 상황이고 향후 국회에서 법개정이 된다면 소급 적용할 가능성도 있기에 병역 미필자인 한상훈이나 온소진은 특히 이번 승부에 대한 집착이 강했을 터, 부담감이 상당했을 것인데 이겨냈다. 입단대회에서 번번이 부담감에 오그라들던 그 한상훈이 아니었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2007년 한해의 성적만 가지고 평가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으나 한상훈이 지난해 같은 활약은 보이지 못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반짝 스타'로 전락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허장회도장-김원도장과 트로이카 시대를 이끌고 있는 권갑용도장의 문주 권갑용 七단은 경쟁 도장(김원)이 배출한 한상훈을 이렇게 칭찬한다.

“한마디로 내공이 엄청 센 아이다. 그동안 입단대회에서 우리 애들에게 많이 발목을 잡혔으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입단한 건 그만큼 개인능력이 대단하다는 얘기다.”

흔히 유망주들을 평할 때 수읽기가 세다거나 감각이 뛰어나다거나 싸움이 강하다거나 하는 특장을 거론한다. 하지만 한상훈을 얘기할 땐 인내력이 좋다거나 내공이 세다거나 자기관리가 뛰어나다거나 하는 말을 우선한다. 이제 갓 데뷔한 새내기다보니 아직 이거다 할 색깔을 갖추지 못한 단계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나 한상훈이 자기류의 기풍을 구축했다 하더라도 이런 유의 평가야말로 그를 가장 잘 나타내는 촌평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줄곧 동거동락하며 키운 스승 김원 七단의 얘기도 제자의 부단한 노력과 성실한 자세에 맞춰 있다.

“자기관리가 철저한 아이였고, 비록 입단은 늦었지만 입단할 때부터 또래에 비해 (바둑이) 불안감이 적어 성적을 낼 것으로 기대했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 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입단하고 나면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는 안도감에 정신자세가 풀어지게 마련인데 상훈이는 초지일관한 아이라 사실 걱정을 별로 안했다. 또 입단하자마자 연일 승승장구하다보니 풀어질 틈조차 없었다. 집이 용인인데 도장이 있는 홍은동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금도 매일 나와서 공부한다. 무지무지한 노력파긴 하지만 이쯤되면 성격을 타고났다고 봐야한다.

자기관리야말로 프로한테는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상훈이는 꾸준히 공부하는 자세가 돼 있고 자신감을 세우면서도 본인의 부족함을 잘 안다는 게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요인이다.”

아버지 한열홍(51, 회사원) 씨의 자식 평도 같은 맥락이다. “특별히 공부한다기보다 꾀를 안 부리고 우직하게 공부하는 타입”이라며 어린 나이에 흔히 관심을 갖는 게임에도 전혀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고 전한다.

김원 七단도 “지금까지 수많은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게임 안하고 욕 안하는 건 상훈이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부모와 스승이 오히려 ‘FM 범생이(?)' ‘순둥이' 같기만 한 면을 걱정해야할 정도였다니까 알만하다.

2007년 9월, 제12회 삼성화재배 16강전에서는 세계최강으로 군림하던 이창호마저 격파하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한상훈은 이창호를 닮았다

한상훈의 바둑도 안정적이고 장기전에 강하다는 점에서 본인의 차분한 성격과 닮았다. 두텁게 반면을 운용하면서 다른 기사들보다 더 냉정하고 지구력이 좋은 편이다. 지구력이 좋다는 얘기는 균형감이 좋다는 얘기와 상통한다. 이창호 九단의 기풍과 흡사하다는 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늘 책을 곁에 한다는 면도 닮았고, 독서량이 많아서인지 ‘어린 철학자' 같은 면모를 보인다는 점도 흡사하다.

아니나 다를까. 한상훈은 인격적인 면에서 이창호 九단을 가장 존경하며 자기관리의 본보기로 삼고 있다고 한다. 한편 기풍적인 면으로는 자유분방하게 두면서도 틈 없이 강한, 자기 개성이 양껏 무르녹아 있는 바둑을 두는 이세돌 九단을 닮고 싶다고 했다.  

[장면도] 가장 존경하는 기사와 꿈에 그리던 첫 대면. 그러나 위축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창호니까 이겨보자. 이기면 대박이다!”는 생각이 앞섰다며 해맑게 웃는다.

역시 명불허전. 확실히 이창호의 바둑은 달랐다고 한다. “틈이 안 보이게 뒀고 매 수 평범한 듯한데 포석부터 다음 수, 이후 흐름을 자기 페이스로 가져가려는 힘이 느껴졌다. 초일류의 내공은 이런 거구나 하는 걸 느꼈다.”